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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슬라모터스가 한국 시장에 전기차를 내다 팔려면 어떻게 해서든 정부 기관을 구워삶아야 했다.
판매 허가만 받을 생각이라면 정부가 걸고넘어진 충전 단자만 교체하면 됐지만, 전기차는 판매 허가로 끝나는 상품이 아니었다.
약 2천만 원에 달하는 구매 보조금.
테슬라 구매자가 이 돈을 받으려면 환경부의 친환경 인증이 꼭 필요했다.
정부로선 자국 차량에 우선해서 보조금을 지급하고 싶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슬라 전기차를 배제고 싶을 거다.
대현까지 뒤를 봐주고 있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이고.
대현그룹과 정부가 쌓아 올린 카르텔을 해외 기업이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과 맞상대할 수 있는 국내 기업과 손을 잡고, 함께 공세를 펼칠 계획을 세웠다.
"반갑습니다, 오성그룹의 전용택입니다."
"WHTS컴퍼니의 신우혁입니다."
재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탐욕, 갑질, 오만, 독선 같은 부정적인 단어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매체에서 재벌을 그렇게 그려왔고, 실제로 재벌가의 갑질은 심심찮게 뉴스를 타곤 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만난 재벌의 첫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WHTS컴퍼니를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크게 키우셨더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아, 일단 명함부터 받으시겠습니까?"
깍듯한 인사는 물론이고 자신의 명함을 두 손으로 받혀서 이쪽으로 내민다.
솔직히 놀랐다. 이건 내가 상상하던 재벌이 아니라 교과서에 나올 법한 직장인의 모습 아닌가.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전용택 부회장님이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요?"
"그렇습니다."
전용택은 의외라는 듯 내 표정을 살핀다. 내가 진담인지 아니면 형식적인 인사인지 몰라서 저러는 것 같다.
"보고를 못 받으셨습니까? 제가 오성전자 쪽에 연락을 넣었었는데요."
"아... 그러셨군요. 제가 요즘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부회장님은 오성처럼 큰 회사를 총괄 경영하시는 분 아닙니까."
듣기 좋아하라고 해준 말인데, 어째선지 전용택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이후에도 비슷한 대화가 이어졌지만, 전용택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이쯤에서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저를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WHTS컴퍼니가 테슬라모터스의 최대주주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WHTS컴퍼니는 가상화폐와 SNS가 주력 사업이라고 들었는데, 동떨어진 전기차 업체에 투자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저에게 투자 이야기를 들으러 오신 겁니까?"
"그보다 전기차 관련 산업의 전반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저보다 오성 그룹의 전문가들에게 듣는 편이 나을 텐데요."
잠시 말이 뚝 끊기고 정적이 흐른다.
목이 텁텁할 만큼의 불편한 분위기가 깔렸으나, 나는 그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꾹 참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오성 내부의 전문가들은 도움이 안 됩니다."
"오성이라면 국내에서 최고의 인재가 모인 곳이잖습니까. 그런 전문가들이 도움이 안 되신다 하면..."
"복잡한 내부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을 제가 알아야 저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전용택의 입이 한일자로 닫힌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지요."
"아, 아닙니다. 말하겠습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말을 쏟아낸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 진행 중이던 일이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의 최종 결정을 하게 됐는데... 그룹 내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그룹 내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최대한 많은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오성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에서 이토록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건이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닐 터.
거기다가 의견을 듣고픈 분야가 전기차라면?
"혹시 허먼 인수 건 때문에 그러십니까?"
순간적으로 전용택의 눈이 부릅떠진다.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역시 맞았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커피를 한 번 홀짝이며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말을 내놓는다.
"제가 테슬라 지분을 취득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업체를 알아보고 다닌 줄 알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럼..."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제가 알아본 업체 중엔 허먼사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애초에 테슬라 말고 다른 업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시기 즈음에 오성이 허먼을 인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먼사라면 자동차 전자 장비 쪽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 아닙니까? 오성이 보유한 반도체, 소형 디스플레이, 자동차 부품 사업과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겠군요."
나는 그가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골라서 늘어놨다. 그러나 전용택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내가 허먼 인수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길 기대했던 걸까?
"부회장님은 허먼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나 봅니다."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인수를 거부할 이유를 찾고 다니시는 겁니까?"
"거부할 이유를 찾다니요? 저는 절대 그런 생각으로 신 대표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제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만."
전용택은 입술을 질끈 깨문다.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오성의 현 오너는 부회장님입니다. 허먼 인수가 내키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쳐내십시오."
"맞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저도 신 대표님처럼 회사를 당차게 경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못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요."
전용택은 힘없이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킨다. 제 할 말이 끝났으니 자리를 파할 생각인가 보다.
이렇게 그를 보낼 순 없었다.
나는 방금 떠올린 멘트를 기습적으로 던진다.
"확실히 능력이 부족한 것 같긴 하군요."
방금까지 흐리멍덩했던 전용택의 눈매가 나를 홱 노려본다.
"굉장히 무례하군요."
"그럼 눈앞에 고객이 앉아 있는데, 푸념만 하다가 일어나는 오너를 유능하다고 평가해야 합니까?"
테슬라는 오성이 생산하는 반도체, 카메라 모듈, 디스플레이, 배터리까지 구매할 수 있는 잠재고객이었다.
전용택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건지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앉는다.
"저희와 계약을 맺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건을 맞춰주신다면 오성뿐만 아니라 허먼의 제품도 계약할 수 있습니다."
내 입에서 허먼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일순간 번쩍하고 불꽃이 인다.
"어떤 조건입니까? 어서 말씀해보시죠."
* * *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전용택은 흥분을 삭이기 위해 주먹을 반복해서 쥐락펴락한다.
몇 달 동안 그의 속을 썩이던 허먼 인수 건의 출구를 드디어 찾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허먼 인수 직후에 테슬라와 대규모 공급 계약을 발표하면 누구도 내 능력을 의심치 않겠지.'
아버지가 벌여놓은 초대형 인수 건을 아들인 자신이 완벽하게 매듭짓는다.
이보다 좋은 결말은 없었다. 만약 계획대로만 된다면 모두가 자신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할 것이며, 경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도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다.
"후후후..."
자신에 대한 평가가 뒤바뀔 것을 생각하니 벌써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동안 아버지보다 못한 아들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얼마나 참고, 또 참았던가. 그룹 내에서도 은연중에 보였던 불신에 찬 시선도 이번 일로 말끔히 사라지리라.
꽈악.
그는 주먹을 꽉 말아쥐어서 억지로 웃음기를 밀어 넣었다.
아직 축배를 들긴 일렀다. 테슬라와 정식 계약을 맺으려면 먼저 상대가 제시한 조건을 이행해야 했다.
* * *
[전용택의 오성, 미국 전장전문 기업 '허먼' 9조5000억 원에 전격 인수! 역대 최대 규모 M&A에 전문가들도 깜짝 놀라.]
[오성, 전기차 사업에 시동 거나? 허먼 인수로 자동차 전자장비 부문에서도 강자로 우뚝.]
느닷없이 발표된 오성의 허먼 인수 소식은 관련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놨다.
특히 자동차 사업이 주력인 대현그룹은 소식이 발표된 아침부터 경영진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전용택이가 이런 짓을 했다고? 웃긴 소리. 그놈은 이렇게 큰일을 벌일 배짱이 없어. 보나 마나 전무홍의 짓이야."
대현의 이태석 회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따라서 임원들이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 전용택은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성이 허먼 하나 인수했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암요. 자동차는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죠. 오성은 이미 쫄딱 망한 전례도 있고요."
"전무홍 회장이 없으면 오성은 이빨 빠진 호랑이일 뿐입니다."
긴급대책회의였지만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전용택 부회장이 지휘하는 오성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도중, 회의실 쪽으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크, 큰일 났습니다!"
직원 하나가 서류철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무슨 일인데 큰일이라는 거야?"
"방금 증권사에서 정보가 들어왔는데, 오성이 테슬라와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무슨 계약?"
"오성의 기존 제품은 물론이고, 이번에 인수한 허먼의 제품까지 사전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허먼 인수발표도 전에 물량 계약을 먼저 맺었다는 것은 테슬라 측과 긴밀한 협약 관계가 이미 구축됐다는 뜻이었다.
회의실의 임원들은 다들 화들짝 놀라서 떠들기 시작한다.
"말도 안 됩니다. 허먼 인수의 성공 여부도 모르는데 어떻게 테슬라와 계약했단 말입니까? 저건 가짜 뉴스입니다."
"출처가 어디야? 그거 찌라시 맞지?"
임원들이 정보를 가져온 직원을 질책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떨어댄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처음엔 하나만 울리던 휴대폰이었으나 얼마지 않아 사방에서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눈치를 보던 임원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하나둘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빠져나간다.
보다 못한 이태석 회장이 소리친다.
"무슨 일인데 그래?"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한 임원이 고갤 바짝 숙인 채 말했다.
"환경부에서 전기차 충전 단자를 통일하겠다던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뭔 소리야? 잘 진행되던 계획을 왜 철회해?"
"그것이..."
"빨리 말해봐! 답답해 죽겠네!"
임원은 곧 떨어질 불호령을 예상한 듯 울상이 된 채로 입을 뗀다.
"오성 측에서 입김을 넣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