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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공화당 후보 중 한 명이었던 도날드 트럼프는 이제 공화당의 정식 후보가 돼 있었다.
그가 정식 후보로 뽑히기 직전까지도 기존 정치 세력과 언론은 그를 거짓말쟁이, 제노포비아, 인종주의자, 여성 혐오주의자로 낙인찍었으나 시대의 흐름은 그를 대통령 정식 후보로 이끌었다.
"우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도시에서 불법 이민자에 의해 범죄가 일어나고, 일자리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동안 민주당이 남긴 것은? 죽음, 파괴, 테러리즘, 그리고 나약함입니다."
"나, 트럼프를 뽑아주십시오! 오직 나만이 쇠퇴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천 명의 공화당 지지자가 운집한 광장에서, 트럼프는 4천 단어나 되는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연설문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극단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기존 정치인들의 위선과 가식에 질린 대중은 이런 '트럼프식 화법'에 큰 호응을 보내왔다.
"후보자님, 퍼펙트한 연설이었습니다."
비서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트럼프를 맞이하러 갔으나,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다.
"피곤하군. 연설하는 내내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이후에 기자들과 인터뷰가 남았습니다만..."
"내가 피곤하다고 했을 텐데."
"알겠습니다. 기자들에겐 제가 적당한 핑계를 말해두겠습니다."
트럼프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자신의 자동차에 올라탄다.
불편한 자동차 뒷좌석이지만, 시끄럽고, 피곤한 유세 현장에선 이곳보다 마음 편한 곳이 없었다.
"내가 왜 힘들 게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트럼프가 선거 출마를 발표한 지도 벌써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는 지쳐있었다. 체력적인 문제 외에도 정신적인 피로가 극심했다.
언론과 민주당의 공세는 그렇다 쳐도, 같은 편인 공화당에서도 트럼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빌어먹을. 될 대로 되라지."
트럼프는 머릿속 골칫거리들을 멀리 치워버리고 눈을 감았다. 차의 엔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그렇게 의식이 사라지기 바로 직전에, 살짝 열린 창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후보자님, 이젠 일어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트럼프는 눈을 감을 채로 다시 인상을 구긴다.
"날 쉬게 내버려 둘 순 없나?"
"저도 죄송스럽습니다만, 지금 만나셔야 할 후원자는 큰 금액을 후원했던지라."
"누군데 그래?"
"WHTS컴퍼니의 대니얼 신 대표입니다."
그제야 트럼프는 한쪽 눈을 살며시 뜬다.
"기억나는군. 선거 초기에 가상화폐를 후원했던 동양인 사업가였지?"
"맞습니다."
"으음. 그가 왔다면 어쩔 수 없군."
트럼프가 차에서 미적거리며 나오는 동안, 상대는 이미 차 앞까지 다가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오우! 친구,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그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은 마음에 드는군요."
트럼프는 과장되게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그는 방금까지 피로에 쩔어서 투덜거렸을지라도 후원자 앞에서는 활짝 웃는 프로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 곳으로 자릴 옮깁시다."
"장소라면 제가 준비했습니다."
상대는 트럼프 차의 바로 뒤편을 가리킨다. 그곳엔 대형 캠핑카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
"그렇습니다."
캠핑카는 일반 캠핑카보다 크기가 배 이상인 대형 캠핑카였다.
트럼프는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으나, 상대의 호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지 못해 걸음을 옮긴다.
끼익.
차량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널찍한 구조였다.
먼저 불그스름한 조명이 보였고, 옆에는 정체 모를 향이 피워져 있었다.
"편하게 앉으시죠."
상대는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먼저 자릴 잡는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들이 대야를 가지고 와서 그의 발을 씻기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마사지?"
"한국에서 유행 중인 힐링테라피입니다. 몸이 지쳤을 때, 이렇게 의자에 누워서 케어를 받으면 피로가 싹 풀립니다."
평소의 트럼프였다면 이런 의심스러운 마사지는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심신이 워낙에 지쳐있었던 터라, 속는 셈 치고 의자에 몸을 뉜다.
* * *
"드르르렁... 드르르렁..."
시끄러운 코 고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차 안에 울려 퍼진다.
트럼프는 마사지사들이 본격적인 마사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발을 씻기는 과정에서 곯아떨어졌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피곤했으면 진작시킨 대로 누울 것이지."
70세 노인이 반년이 넘도록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선거 유세를 했으니, 몸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리라.
이럴 때 내가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가져와도 그에겐 귀찮은 일로 여겨질 뿐이다.
먼저 분위기부터 풀고, 본론은 그다음에 나와도 늦지 않다.
똑똑.
캠핑카의 작은 창으로 트럼프의 비서가 눈치를 준다.
이젠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슬슬 깨울 시간이다. 나는 옆 의자에서 잠든 트럼프의 어깨를 건드린다.
"으음..."
고개만 반대로 돌릴 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재차 어깰 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미리 냉장고에 넣어뒀던 시원한 콜라를 두 캔 꺼내왔다.
트럼프의 귀에다 대고 콜라 캔을 따자 '치익!'하는 탄산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번쩍 떠진다.
"음? 으음? 무슨 일이야?"
트럼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눈을 껌뻑이고 있는 그의 앞에다가 콜라를 내민다.
"한잔하시겠습니까?"
트럼프는 목이 말랐는지 콜라를 넙죽 받아서 마신다.
"깊이 잠드셨더군요. 피로가 많이 쌓이셨나 봅니다."
"요즘 무리를 하긴 했지."
트럼프는 의자에 몸을 늘어트린 채, 발과 허벅지를 주무르는 마사지를 즐겼다.
캠핑카 밖에선 비서가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으나 그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케어 서비스는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다마다요. 지금껏 내가 받았던 서비스 중엔 단연 최고입니다. 핫핫핫!"
그의 웃음은 비즈니스 관계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짜 웃음이었다.
"아, 그나저나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왔습니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트럼프 씨의 선거에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선물?"
나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마사지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트럼프는 마사지가 중단되자 입맛을 다셨다. 발 마사지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트럼프 씨가 공화당의 후보가 되셨지만 아직 공화당의 지지를 완벽히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부 크루즈를 지지하던 놈들이요. 아니면 월가의 좀생이들이거나."
트럼프는 주류 정치인이 아니다 보니, 공화당 내에서 입지가 탄탄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정치 후원금도 제대로 모으질 못해서 자신의 사비를 써가며 선거 레이스를 뛰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트럼프 씨가 보수 진영에 확실한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지라면 이미 지겹도록 냈습니다. 도중에 공화당 멍청이들이 방해해서 그렇지."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한방이 아니라서 효과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트럼프는 슬며시 고갤 돌려서 내 얼굴을 훑는다.
"가져온 선물이라는 게 뭐길래 그러는 거요?"
"실리콘밸리의 핵심 사업을 텍사스에 빼앗아 오는 겁니다."
"뭐라?"
트럼프가 깜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언급한 텍사스는 공화당의 최대 텃밭이자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지역으로 민주당에 우호적인 사업을 빼앗아 온다면 선거의 판도를 바꿀 수 있었다.
"대니얼,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제가 테슬라 최대 주주가 됐다는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테슬라면 그 전기차 개발 업체?"
트럼프의 표정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깃든다. 테슬라가 유명하긴 하지만, 아직 생산 규모가 그리 큰 업체는 아니었던 탓이다.
나는 트럼프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서류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라서 소릴 지른다.
"1000에이커(약 400만 제곱미터) 부지의 공장이라고?"
"초창기엔 1000에어커지만, 차후 3000에이커까지 규모를 증축할 예정입니다. 일단 공장이 들어서면 1만 개의 신규 일자리와 10만 개의 간접 일자리가 생길 테지요."
트럼프는 너무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쐐기를 박았다.
"최근 기업들의 행태를 보면 이만한 규모의 공장은 중국에 짓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씨는 그 공장을 미국에, 그것도 공화당의 심장인 텍사스로 가져오는 것이죠."
그는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맞잡는다.
"멋지군! 정말 최고로 멋집니다! 내가 대니얼을 알게 된 건 정말이지 일생일대의 행운입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이번 테슬라 공장 건은 트럼프의 정치적 아젠다인 '쇠퇴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딱 들어맞는 이벤트였다.
그러니 트럼프가 이토록 입에 침까지 튀겨가며 흥분할 수밖에.
"이번 계획의 실행을 위해서는 트럼프 씨의 도움이 살짝 필요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말만 해주십시오. 나, 트럼프가 뭐든 해드리겠습니다. 핫핫핫핫!"
* * *
내가 테슬라의 신축 공장 건으로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한국에서도 전기차와 관련된 새로운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환경부 인증이 거절됐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목소릴 높이자, 박태식은 조건 반사처럼 한숨을 쏟아낸다.
"말 그대로야. 인증 보류나 서류 보강이 아니라 아예 거절을 때려 버렸더라."
"거절이 뜬 이유가 뭐야?"
"충전 단자를 걸고넘어졌어. 국내 표준단자로 맞춰오지 않으면 아예 인증을 안 해주겠단다."
박태식은 환경부에서 온 서류를 보여준다.
그곳엔 2016년 하반기부터 지정된 표준 충전 단자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이거... 그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대현의 전기차에서 쓰는 CHAdeMO 충전 단자야. 이걸 안 쓰면 내년에도 인증을 안 내주겠대."
올해야 출고할 물량이 없어서 인증이 안 나는 편이 유리하지만, 내년엔 무조건 출고를 개시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환경부 인증에서 막히면 출고할 방법이 없었다.
"테슬라에 충전 단자를 변경해달라고 할 순 없는 거야?"
"대놓고 출시를 막겠다고 나왔는데 변경해온다고 달라지겠어? 그땐 또 다른 핑계를 대겠지."
"아후, 씨!"
박태식은 앉아서 머릴 벅벅 긁어대다가 자릴 박차고 일어난다.
"우혁아. 안 되겠다. 우리도 맞불 대응으로 나가자."
"맞불?"
"그래, 맞불. 대현에서 로비로 출시를 막았으면, 우리도 로비로 풀어야지. 국토부랑 환경부만 손을 쓰면 될 거야."
"아서라. 한국에서 재벌가를 어떻게 이기냐."
"아니면 이참에 정치권으로 줄을 대는 건 어때? 정부 고위층이나 청와대 쪽에 로비를 하면..."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소릴 꽥 질렀다.
"야! 박태식! 절대 그런 짓은 하지 마라. 진짜 큰일 난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야.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했으면 당장 머릿속에서 지워."
이번 정권과 뇌물 건으로 엮였다간 이후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그러니 정부와는 최대한 거릴 두는 게 답이었다.
"국내에 테슬라를 기다리는 예약자가 6만 명이나 되는데 이대로 손을 놓고 있으란 말이야?"
"누가 가만히 있겠대? 이독제독(以毒制毒)을 쓸 생각이다."
"이독제독이면...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뜻이잖아."
"맞았어."
국내에서 무소불위 권력을 지닌 재벌과 맞붙어선 승산이 없다.
그러니 재벌과 맞상대를 하려면 다른 재벌을 끌어와서 서로 싸움을 붙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대현을 이길 정도의 재벌가라면 국내에선 그곳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