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우리는 WHTS컴퍼니의 첫 기업설명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기념 뒤풀이로 고깃집을 찾았다.
"여러분, 오늘처럼 좋은 날은 끝까지 달려야죠? 맞습니까?"
"맞습니다!"
"거기 잔에 반만 채운 사람 누구예요? 다 보고 있습니다. 어서 꽉 채워봐요. 준비됐으면 건배하겠습니다. 흠흠, WHTS컴퍼니의 승승장구를!"
"위하여!"
"위하여!"
박태식을 필두로 몇몇 직원들이 분위기를 요란하게 띄운다.
나는 술자리에서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지만 오늘같이 즐거운 날은 예외였다.
'가끔은 이런 요란한 회식도 나쁘지 않네.'
기업설명회에서 공개한 전기차 예약은 초대박을 쳤다.
발표와 동시에 테슬라 홈페이지가 버벅대기 시작하더니, 5분도 안 돼서 예약 페이지가 아예 뻗어버렸다.
테슬라 측의 발표에 의하면 최대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버가 아예 다운됐다고 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몰려든 사람이 전부 전기차 예약자는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테슬라 예약이 시작되면서 몰린 인파는 대부분 도토리코인 투자자들이었다.
가상화폐로 어떻게 차를 예약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서,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접속했다고 한다.
여기에 예약이 시작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실구매자, 예약번호 앞자리를 차지해서 웃돈 받고 파려는 장사꾼까지 몰려들자 서버가 뻗어버린 것이다.
"앞으로 우리 자동차 사업팀은 많이 바빠질 겁니다. 그래도 그만큼 여러분의 대우도 좋아질 테니! 저, 박태식만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오오! 멋지십니다!"
"이사님만 따라가겠습니다!"
자동차 사업팀은 신규 부서인지라, 직원들의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발령받은 곳이 한직은 아닌지, 대우는 예전보다 좋은지, 승진은 가능한지 등등의 우려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박태식이 벌써 직원들과 의기투합해서 술잔까지 돌리는 모습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친화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슬그머니 일어나서 고깃집을 나선다.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가 나를 반긴다.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이런."
호주머니에 라이터가 없다.
때마침 고깃집 건물 뒤편에서 담배 연기가 넘어온다. 불을 빌릴 생각으로 연기 쪽으로 갔다가 전혀 의외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소영 씨?"
그녀는 깜짝 놀라서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소영 씨도 담배 피우셨습니까? 일 년이 넘도록 같이 일했는데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아, 그, 그게..."
이소영은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머릴 짜내는 듯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쉰다.
"한국에선 담배 피우는 여자 이미지가 별로 안 좋다고 해서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소영 씨가 좋으면 그만인 거죠."
나는 이소영이 떨어트린 담배를 주워다가, 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돌려준다.
그녀는 담배를 받아들고는 내 눈치를 살핀다.
"왜요? 새 걸로 붙여 드려요?"
"아, 아뇨. 됐어요."
잠시 대화 없이 담배 연기만이 허공에 흩어진다. 그녀는 끝까지 담배를 들고만 있을 뿐,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쭉 이어진다.
불편하다. 뭐라도 할 말이 없을까 하다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이 넘었네요."
"뭐가요?"
"제가 소영 씨를 만난 지 일 년이 넘었다고요."
"아..."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죠? 소영 씨가 대학교 강당에서 가상화폐 강연하던 날."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기억나요. 제 강연의 반응이 정말 안 좋았었는데, 대표님이 오셔서 칭찬해주셨잖아요."
"강연 내용이 훌륭해서 훌륭하다고 말해드린 것뿐입니다. 다른 이들이 진흙 속의 진주를 못 알아본 거죠."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띄워주는 게 아니라 결과가 그렇잖습니까. 우리의 도토리가 같이 강연했던 뷰테린의 이더리움을 압도적으로 제쳤으니까요."
"그야, 대표님의 능력이 있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거죠."
내가 없었어도 이소영은 독자적인 가상화폐를 만들어내서, 엄청난 성공까지 거두는 천재다.
나는 그녀의 능력에 편승했을 뿐.
이건 내게 있어서 일종의 부채였다. 이런 책임감 때문이라도 나는 지금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둬야 했다.
"그때 소영 씨를 만난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녜요."
"제 안목이 소영 씨를 골랐으니 소영 씨는 대단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 말,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내 팔을 툭 건드린다.
"소영 씨, 앞으로도 저와 쭉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니 술기운이 뒤늦게 올라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까부터 조금 얼굴이 뜨거운 것 같다.
"..."
그녀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붉은 입술이 실룩이며 나를 유혹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빠져들 것 같은, 그런 탐스러운 입술이었다.
허락은 필요 없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자, 입술도 나를 향해 다가온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눈을 꼭 감는 그녀.
그렇게 서로가 맞닿으려던 차에.
"대표님! 신우혁 대표님!"
가게 입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우리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멈칫하며 우린 서로를 쳐다보다가, 그녀가 먼저 얼굴을 붉히며 반대편으로 도망가 버렸다.
"거 참. 타이밍 한 번 죽여주네."
가게 입구로 갔더니 왠 직원 하나가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온다.
"앗!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뭡니까?"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내가 너무 까칠하게 대답한 것 같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세요."
"아, 그게, 저..."
그는 재차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쥐어 짜낸다.
"테슬라의 엘론 대표가 방금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 * *
"오! 대니얼! 반가워요! 정말, 정말 반가워요!"
공항 입국장에서 나온 엘론은 몇 차례나 내게 반가움을 표하며 손을 맞잡는다.
이미 주변엔 기자들이 깔려 있었기에, 이런 우리의 모습은 엄청난 플래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환영합니다. 먼 곳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번 건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땐,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전혀 수고스럽지 않습니다. 핫핫핫!"
우리는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에 빠르게 공항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는 미리 준비해둔 차가 서 있었다.
"오우! 롤스로이스! 이게 대니얼의 차입니까?"
"맞습니다."
"멋진 차긴 하지만, 대니얼의 스마트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차량이군요."
"이건 스마트가 아니라 부자 이미지를 위한 차라서요."
엘론은 내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는 씩 미소를 짓는다.
"저희 전기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대니얼의 이미지와 딱 어울리는 차가 될 겁니다."
우리는 나란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은 일반 차량보다 여유가 있었기에 편히 업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한국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번에 진행한 예약 건 때문에 왔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기더군요."
예약자 폭주로 전기차 예약 페이지가 마비된 뒤, 테슬라는 반나절 만에 예약 페이지를 복구할 수 있었다.
"예약 절차를 마친 사람이 6만 명 가까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하핫. 그랬죠."
2시간 만에 6만 명이나 되는 예약자가 몰린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런 대박 성과가 났음에도 엘론의 얼굴엔 기쁨보다 난처함이 더 짙게 떠올라 있었다.
"혹시 가상화폐 보증금 제도가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인기가 많은 방식을 왜 싫어하겠습니까. 보증금 제도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점진적으로 적용하겠습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엘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가 조금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말씀해보시죠."
"이번에 6만 명이라는 예약자를 받긴 했지만, 저희는 그만한 인파가 몰릴 줄 전혀 예상을 못 했습니다."
이해한다. 나도 실 예약자가 그만큼 많이 몰릴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서 본래라면 3천 대 정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신 뒤에 말을 토해낸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테슬라는 예약받은 차량 6만 대를 생산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럼 몇 대나 출고할 수 있습니까?"
"한국 지역으론 올해 한 대도 출고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오더를 6만 대 받았는데, 1대도 출고가 안 된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내가 펄쩍 뛰고 난리를 쳐야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표정의 변화 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렇군요."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엘론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당연히 안 괜찮죠. 하지만 출고가 안 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론은 연신 감사를 표한다. 그에겐 내가 성인군자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성인군자라서 별 반응을 안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테슬라가 차를 못 줄 걸 알고 있었다.
테슬라의 연간 생산량은 8만 대 수준.
그건 내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정도 생산량으론 미국 내의 물량을 쳐내기도 버거울 터.
실제로 테슬라 차량이 정식으로 한국에 인도되는 시기는 올해를 넘겨, 내년 중순이 다 돼서였다.
"올해 한 대도 출고가 안 된다라... 저는 이해를 해도 한국의 고객들은 불만이 폭발할 겁니다. 당연히 예약 취소 물량도 쏟아지겠죠."
2시간 만에 6만 대를 팔았다고 홍보를 잔뜩 때렸는데, 예약 취소가 쏟아지면 그건 테슬라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었다.
엘론도 그걸 알았기에 내게 사정을 해온다.
"WHTS컴퍼니 측에서 한국 예약자를 달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희 측에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염치없는 건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한참 뜸을 더 들이다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끄덕인 것도 아니고, 가로젓는 것도 아닌 상태였다.
"그럼 테슬라에서 두 가지를 확실히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어떤...?"
"첫째는 한국 내 테슬라 차량의 판매, 관리를 WHTS컴퍼니에 전적으로 일임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당연히 해드려야죠."
"둘째는 적어도 내년까지 예약 물량을 넘겨주셔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테슬라는 일 년에 8만 대를 간신히 생산한다. 거기서 6만 대를 한국에 배정하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절반인 3만 대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능할 것 같은 게 아니라 절반이라도 확실히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차량 출고가 내후년까지 밀리면 저도 곤란해집니다."
엘론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로선 이번에 잡은 6만 대나 되는 예약 물량을 놓치기 싫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좋습니다. 엘론 씨가 확실히 약속을 해주셨으니,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이어 한숨을 내쉬는 엘론과 달리, 나는 출고 지연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었다.
왜냐고? 한국에선 내가 굳이 일을 벌이지 않아도, 제삼자가 개입해서 출고 지연의 핑곗거리를 만들어 줄 게 뻔히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