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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차량가 20%의 선금을 받자고 했다니?"
"케네스, 일단 이야길 끝까지 들어봐."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잖아. 우리가 예약금 명목으로 돈을 조금만 받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당연히 알지. 부담 없는 금액으로 예약자 수를 늘려서, 그걸 마케팅에 쓰기 위해서잖아."
"그걸 뻔히 알면서 예약금 20%를 받겠다고 한 거야? 아무리 돈이 급해도..."
케네스가 자꾸 제 할 말만 떠들어 대자, 참다못한 엘론도 목소릴 높여서 맞대응한다.
"케네스, 제발 주둥이를 잠시만 붙잡고 있으면 안 될까? 나도 말 좀 하자. 내가 이해시켜 줄 게. 오케이?"
"알겠어."
"좋아. 이제야 들을 준비가 된 것 같네. 그 가상화폐 있잖아. 아니지 디지털 금이라고 부르기로 했던가? 아무튼, 그걸 쓰기로 했어."
케네스는 인상을 확 찌푸린다.
"전혀 이해가 안 됐는데."
"고객에게 선입금을 받으면 가상화폐를 돌려주기로 했다고. 보증금 명목으로."
보증금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야 케네스의 주름졌던 미간이 살짝 펴진다.
"전액을 다 돌려주겠다는 거야?"
"그런 뉘앙스였어. 그리고 그 가상화폐에는 화폐 용도만 있는 게 아니라 데이터 기록도 가능하다더라. 그래서 우리가 언제, 무슨 차종을, 얼마 주고 예약했는지 전부 써셔 있단다."
"흠? 정보 기록이 가능하면 일종의 계약서 기능을 겸하는 방식이로군. 그렇다면..."
케네스는 잠시 턱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아하!'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그거면 계약 자체를 다른 사람이 받아갈 수 있는 거잖아?"
"무슨 뜻이야?"
"가상화폐에 예약날짜, 차종이 나와 있다며? 그렇다면 그 가상화폐를 사면 정보도 같이 양도받게 되는 거지."
"음... 그런가?"
"확실해. 아예 노리고 만든 거라고. 이게 제대로만 돌아가면 예약자끼리 먼저 나올 차를 웃돈 주고 거래하게 될 거야."
현재 테슬라S 모델은 예약이 수십만 대나 밀려있어서 출고까지 적어도 1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예약자의 가상화폐를 사서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필시 웃돈을 주고 가상화폐를 사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참고로 미국은 신규 출시 차량이나 인기 차종은 딜러에게 웃돈을 주고 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그리 거부감이 드는 방식도 아니었다.
"오호. 나는 단순히 가상화폐 홍보 목적으로 밀어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런 용도가 있었군."
"그 대니얼이라는 녀석, 머릴 잘 썼어. 그가 구상한 대로 판이 짜진다면 꽤 괜찮은 시너지가 날 거야."
"그럼 바로 승인하자고."
엘론은 투자금 때문이라도 WHTS컴퍼니의 제안을 받을 생각이었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CFO인 케네스는 끝끝내 고갤 끄덕이지 않는다.
"엘론, 기다려봐. 우린 신중해질 필요가 있어."
"뭘 기다려? 방금까진 너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잖아."
"아이디어가 구상대로 잘 굴러갔을 때 이야기지. 우린 가상화폐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예약자들이 가상화폐를 받아들일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당장 회사에 돈이 급했던 엘론은 짜증이 솟구쳤다.
"굴러들어온 기회를 걷어차라는 소린 아니겠지?"
"투자는 받아. 대신에 가상화폐 보증금은 실적용 전에 테스트부터 하겠다는 조건을 붙이는 거다."
"무슨 테스트?"
"특정 지역에서만 가상화폐 보증금 예약을 받아 보는 거야. 만약 테스트 지역에서 반응이 좋으면 다른 지역까지 확대하면 되는 거고, 반대로 반응이 안 좋으면 그걸 핑계 삼아서 폐지하면 그만이지."
엘론은 계획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테스트 지역은 어디가 좋을까?"
"너무 큰 시장이면 곤란해. 그렇다고 너무 시장이 작으면 테스트 결과가 제대로 안 나올 수 있고."
마침, 8월부터 전기차 사전 예약을 준비 중인 곳이 있었다.
적당한 시장 규모에, 적당한 구매력을 지닌, WHTS컴퍼니에서도 반길만한 지역이었다.
* * *
-WHTS컴퍼니의 신우혁 대표는 2016년 푸른씨앗 청소년지키미 활동과 더불어 나눔, 후원 활동을 활발히 했기에 위와 같은 감사패를 수여합니다. 앞으로도 타인의 귀감이 되는...
회사의 대표 이사는 회사일 보다 대외적인 업무에 더 치이게 된다.
그 대외적인 업무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이번에 참석한 사회 공헌 활동, 쉽게 말해 기부 행사되시겠다.
내가 마음이 천사라서 기부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가 돈을 잘 번다고 소문이 나면 사방에서 기부하라고 먼저 연락이 온다.
그걸 일일이 대응해주면 헛돈이 줄줄 새는 거고, 전부 쳐내면 꼬투리를 잡아서 악의적인 기사가 나간다.
그렇기에 수많은 기부처 중, 그나마 괜찮은 곳을 찾아서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것이 회사 이미지도 살리고, 내 몸도 덜 피곤해지는 방법이다.
-WHTS컴퍼니는 지금까지 총 30억 원에 달하는 후원금을 내주셨습니다. 덕분에 많은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릴 빌어 신우혁 대표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짝짝짝짝.
감사패가 전달되는 타이밍에 박수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진다.
나는 사진으로 쓸 수 있는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는 무대를 내려왔다.
"대표님! 후원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후원을 쭉 해오셨다고 하던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청소년 지키미에 30억 원이라는 큰돈을 후원하셨는데요. 다른 복지 단체에 후원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인터뷰 부탁 좀 드릴게요! 잠시면 되세요!"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이 몰려든다.
다들 손에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채다.
이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다. 내가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걸 귀신같이 캐서 포털 뉴스에 박제해 버린다.
'기자들에겐 아예 건수를 안 주는 게 최고지.'
나는 형식적으로 고개만 까딱거려준 뒤에 바삐 행사장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내 동선을 예측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는 기자가 여기에도 숨어 있었으니.
"대표님! 잠시만요!"
햄스터를 닮은 여기자가 부리 캐나 달려와서 내 옆에 들러붙는다.
"누군가 했더니 권 기자님이셨군요."
하이에나 같은 기자 중에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만 기삿감을 몰아주고 있었으니까.
"헥. 헥. 걸음이... 엄청... 빠르시네요."
"기자님들 덕분에 도망가는 기술만 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뒷길로 나올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대표님 전담이잖아요. 이젠 행사장 구조만 봐도 어떻게 나오실지 알죠."
휴대폰으로 시간을 살핀다.
15시 20분.
이쯤이면 짧은 인터뷰 하나 정도는 하고 갈 수 있겠다.
"10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앗! 바로 질문드릴게요. 얼마 전에 테슬라 대표인 엘론 씨와 만나셨잖아요. 혹시 테슬라와 업무 제휴 계획이 있으신가요?"
"벌써 소문이 돌았던가요?"
"전기차 동호회에선 난리가 났어요. 특히 한국에는 테슬라 자동차가 들어오길 기대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비밀로 할 사항도 아니었으니 이참에 아예 공개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 제휴 같은 게 아닙니다. WHTS컴퍼니는 테슬라모터스의 지분 37.15%을 취득해서 최대 주주가 됐습니다."
가상화폐 개발사의 전기차 업체 인수.
내 입에서 특종감이 나오자 권지은의 눈이 거울처럼 반짝거린다.
"그렇단 말씀은 CEO가 바뀌는 건가요?"
"아닙니다. 기존 테슬라모터스의 모든 경영 사항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캐피탈사와 헤지펀드들이 쥐고 있던 지분을 저희가 싹 쓸어 모은 것뿐이죠."
"아하. 앞으론 전기차 투자로 방향을 잡으셨나 보네요?"
"단순하게 그럴 생각이면 지분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수첩에 글씨를 휘적거리던 그녀의 손이 멈추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럼 무슨 의도로...?"
"여기서 다 풀어버리면 나중에 발표할 거리가 없어집니다."
"그래도 조금만 힌트를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부분적인 힌트는 기대감을 올려주잖아요."
"음... 한국에도 테슬라모터스의 전기차 출시를 기대하는 분이 많다고 했던가요?"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수첩 위에 펜을 바짝 세운다.
"기대해도 좋다고 전해주세요. 곧 한국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 * *
후원 행사를 끝내고 바로 차를 타고 이동한다.
목적지는 인천공항이다. 본래 출국장으로 가는 일이 잦았지만, 이번은 입국장으로 들어간다.
"야! 신우혁! 마중 나온다던 놈이 나보다 늦게 도착하면 어떡해!"
입국장에 갔더니 박태식이 이미 입국장 입구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바쁜 척하기는."
"바쁜 척이면 얼마나 좋겠냐? 대외업무를 내가 몰아서 하는데 솔직히 죽을 맛이다."
박태식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어깨동무를 걸친다.
"그래서 나더러 한국에 돌아와달라고 한 거구나?"
"아니. 대외업무는 힘들어도 내가 계속해야지."
"그게 아니면 왜 오라고 한 거야?"
"네가 일본지사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미 일본에선 와츠가 인기 SNS가 됐고, 와츠 페이 취급점도 많아졌잖아."
"뭔 소리야. 와츠는 몰라도 와츠 페이는 아직 한참 멀었어. 실사용자가 많지 않단 말이다."
보수적인 일본 시장에서 페이 서비스가 활성화되려면 페이백이나 미끼 상품으로 돈을 물 쓰듯 퍼부어야 한다.
하지만 그 짓을 해서 얻는 이득이 크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페이 서비스는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수익은 한 줌 밖에 안 돼. 그러니 가상화폐로 편의점과 마트에서 결제가 가능한 정도만 유지해도 충분한 거야."
"그래도 지금껏 들인 노력이 있는데..."
"페이 서비스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걸 네가 더 잘 알잖아?"
박태식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얕게 한숨을 쏟아낸다.
"휴... 알겠어. 그럼 내가 한국에서 뭘 하면 되는 거야?"
"이번에 테슬라모터스 지분 인수 했잖아. 거기서 한국부터 시범 서비스를 한다니까 네가 전담해줘."
"자동차를 팔라고?"
"아니.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부가적인 서비스를 준비하면 돼. 예를 들면 할부금융, 보험, 케어 서비스 같은 부문이 있겠지."
박태식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입만 벙긋거린다. 전혀 예상을 못 했나 보다.
"나는 그 서비스 부문에 가상화폐를 접목할 생각이야."
"어...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잘 생각해봐. 테슬라는 이미 국경의 제약 없이 온라인으로 신차 예약을 받고 있잖아? 가상화폐는 그들의 비즈니스 방식에 딱 맞는 수단이야."
가상화폐로 선금을 내고 보증금을 처리하거나, 다달이 할부 서비스를 이용한다.
보험도 마찬가지다. 현금을 주고 보험 증서를 대신하는 가상화폐를 받은 뒤, 만기가 되면 간단하게 환급과 갱신까지 가능하다.
물론 현금이나 신용카드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가상화폐를 쓰면 모든 일이 국경, 세금, 환전 따위의 제약 없이 이뤄질 수 있었다.
"아이디어 좋은데? 보증금과 할부 서비스는 가상화폐 기반 데이터만 있으면 전 세계적으로 가능하잖아."
"그렇지."
"갑자기 확 끌리는데? 당장 시작하자."
"서비스 시작 전에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어."
흥분해서 펄떡거리던 박태식이 눈빛으로 답을 재촉해온다.
"가상화폐 서비스 도입 전에 사전 테스트를 해달라고 하더라."
"테스트?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거야?"
"그렇겠지. 가상화폐가 생소한 개념이다 보니 테슬라 측도 바로 도입하긴 꺼려졌을 거야."
이건 테슬라뿐만 아니라 어느 업체라도 같은 조건을 제시했을 거다. 아직은 가상화폐의 안정성과 여러 가지 특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였으니까.
"그래서 우선은 한국에서 시범 서비스를 하기로 했어."
"한국? 음... 어떠려나."
"어떻긴. 한국은 대표적인 얼리어답터의 나라잖아. 젊은 세대가 신제품을 쓰는데 거리낌이 없고, IT와 가상화폐에도 굉장히 친숙하지."
"듣고 보니 한국이 최적의 장소네?"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지역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은 최고의 테스트베드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우리가 가상화폐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