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83화 (8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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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상화폐의 폭락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응접실의 분위기가 차갑게 변한다. 어찌나 날 노려보는지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가상화폐 관계자들.

이번 폭락 사태로 큰 손해를 봤을 테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아, 정정하겠습니다. 정확히는 가상화폐의 폭락이 아니라 이더리움의 폭락이라고 해야겠군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쩍 마른 사내가 벌떡 일어난다.

이더리움의 개발자인 비탈릭 뷰테린이었다.

"정말로 당신이 한 짓이었나?"

"뭘 했다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뻔뻔한! 이번 사태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데!"

뷰테린이 먼저 소릴 질러 대자, 다른 참석자들도 여기에 가세해서 나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런 짓을 꾸민 이유가 뭐예요? 설마 경쟁사 제거?"

"이 범죄자! 당신은 오늘부로 끝장이야!"

"이번 일 때문에 가상화폐 판에서 투자자들이 얼마나 빠져나간 줄 아시오? 이건 업계 전체가 손해를 보는 멍청한 짓이란 말이오!"

사방에서 적의에 가득 찬 시선이 쏟아진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간 진짜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이 나올 것 같다.

이쯤에서 진실을 말해주기로 한다.

"해킹당할 걸 미리 알았다는 것과 직접 해킹했다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난 황소 같던 사람들의 표정이 단번에 의문으로 물든다.

이쯤이면 청중 쪽의 준비는 끝난 것 같다. 나는 준비했던 내용을 찬찬히 풀어 놓는다.

"두 달 전. 저희 보안팀에서 도토리코인의 접속 코드를 손보던 도중, 치명적인 보안 취약점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더리움도 같은 취약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뷰테린을 흘깃 쳐다본다. 그러자 뷰테린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끼어들어서 목소릴 높인다.

"두 달 전에 취약점을 알았다면 미리 알려줬어야지! 범죄를 방조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떠드는 거요?"

"그 방조라는 표현. 굉장히 거슬리는군요."

"그게 방조가 아니면 뭐지?"

"저희는 이미 이더리움 개발사 측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것도 메일을 두 번, 공식 트윗에 한 번. 총 세 차례에 걸쳐서. 그럼에도 응답이 없었다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세 번이나 연락을 취했음에도 무응답이었다면 사실상 무시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잠시 조용해졌던 장내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다.

"메일로 알렸으면 방조한 게 아니잖아요?"

"답이 없으면 다른 루트를 통해서 더 확실하게 알렸어야죠."

"아니, 사실상 경쟁사나 마찬가진데 알려주려고 연락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 아녜요? 그리고 메일에 답이 없어서 트윗도 했다잖아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당사자인 뷰테린은 사색이 되어 일행과 쑥덕거리고 있었다. 진짜 연락이 왔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다.

'발뺌해도 소용없을 거다. 메일을 보냈다는 증거가 우리 쪽에 있으니까.'

물론 순진하게 '당신네 가상화폐에 어떤 결함이 있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낸 게 아니라, 두루뭉술하게 기술적인 논의를 하고 싶다고 보낸 게 전부다.

별 내용도 없는 메일이지만 지금처럼 여론몰이가 한창일 땐 완벽한 면피용 카드가 된다.

툭툭.

나는 책상을 가볍게 두드려서 주변의 시선을 내 쪽으로 모은다.

"저희 WHTS컴퍼니는 26억 달러에 달하는 이더리움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도토리코인의 리스크를 헤징하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실시간 방송을 듣는 사람도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일들로 이더리움과 이더리움 개발진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보유한 가상화폐의 매각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까 딴지를 걸었던 사내가 들고일어난다.

"거짓말! 겨우 메일을 확인 안 했다고 보유 가상화폐를 전부 파는 경우가 어디 있어? 메일은 명분일 뿐. 그는 처음부터 가상화폐를 팔 생각이었습니다!"

"방금 겨우라고 했습니까?"

나는 일부러 코웃음 소리가 나도록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앞서 말했듯이 WHTS컴퍼니는 26억 달러의 이더리움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보유량만 따지면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듭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26만 달러가 아닙니다. 무려 26억 달러입니다."

나는 액수를 재차 강조한 뒤에, 사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헤비 투자자의 메일을 무시할 정도면, 일반 투자자의 피드백은 아예 안 듣는다고 봐도 무방한 것 아닙니까?"

"무시한 게 아니라... 모든 메일을 일일이 확인하기 힘들어서 그랬던 겁니다."

"그 답변이 더 황당하군요. 수십억 달러의 투자금을 모았으면서 QA 전담 직원 하나 두지 않았다니. 역시 이더리움을 정리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대화가 여기까지 흘러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참석자들의 쯧쯧거리는 혀 차는 소리가 난다.

"이더리움 개발팀은 WHTS컴퍼니와 비교하면 구멍가게 수준이야."

"내가 저런 곳에서 만든 가상화폐에 그 거금을 투자했었다니. 황당합니다. 황당해."

"개발진의 대응을 보니, 이번 이더리움 해킹 건은 불운의 사고가 아니라 언젠간 일어날 필연이었네요."

뒤늦게 이더리움 개발진이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관리 인원을 더 뽑았다.' 같은 말로 진화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돈을 잃은 투자자들에겐 그들의 말이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니까.

* * *

WHTS컴퍼니에서 진행한 생중계 직후, 이더리움은 신뢰성 논란에 불이 붙으며 시세가 다시금 곤두박질쳤다.

한때 900달러에 달했던 이더리움은 160달러까지 처박혔고, 여론까지 최악인지라 반등의 여지도 없어 보였다.

이에 이더리움 개발진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뒀던 극약처방을 꺼내들었다.

"이런 일로 하드포크를 하겠다니?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더리움 사무실에선 격양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두 명의 목소리가 아니라, 개발진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너희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의 이더리움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개발팀의 수장인 비탈릭 뷰테릭이 직접 설득에 나섰으나, 개발자들은 여전히 하드포크에 난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드포크가 실행되면 기존의 이더리움을 버리고, 새로운 버전의 이더리움으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안 좋은데 하드포크라뇨? 투자자들이 들고일어날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아요. 하드포크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고요. 농담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총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뷰테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존의 이더리움은 신뢰를 잃었어. 취약점을 완벽히 제거할 방법도 없고. 그러니 우리가 재기할 방법은 하드포크로 완전히 새로운 이더리움을 출범하는 것뿐이야."

직원들에게 하드포크 계획이 담긴 서류가 전달된다.

서류에는 하드포크의 시기와 방법은 물론이고, 투자자들의 반발을 잠재울 보상안까지 기술돼 있었다.

"보다시피 계획은 완벽해. 우린 이더리움의 무결성을 손에 넣고, 투자자들은 더 큰 가치를 얻는 거야. 이것이 바로 윈-윈이지."

이더리움 개발팀은 사실상 비탈릭 뷰테린의 원맨팀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가 결정을 내렸다면 나머지 개발자는 따르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지시대로 개발이 진행됐을 거다.

하지만 이번은 회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 아닌가.

이런 시기에는 제 몫을 챙기기 위해 허튼 생각을 품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번 하드포크는 보안과 신속이 최우선이 돼야 해. 그러니 당분간은 사무실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자."

이후에도 뷰테린은 열정적으로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에 몇몇 개발자들은 은밀히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 * *

"대표님, 가상화폐 운영팀 보고서입니다."

이소영이 서류철을 한 아름 들고 와서 책상 위에 올려둔다.

서류철의 두께만 봐도 두통이 밀려온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삭이며 말했다.

"예. 수고했어요. 옆에 두세요."

보고서를 옆에 두라는 것은 이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소영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이더리움 말인데요. 저번 주에 공매도 포지션을 잡으셨잖아요."

"그랬었죠."

"이미 이더리움이 한 차례 크게 폭락하면서 수익을 냈는데, 또 공매도를 진행하는 게 맞나 싶어서요."

나는 저번 초청 생중계 전에, 이더리움의 하락에 베팅하는 공매도로 4000만 달러의 투자수익을 챙겼다.

그놈들이 퍼트린 루머로 우리가 손해를 봤으니, 공매도로 깽값을 챙긴 셈이다.

"걔들은 아직 사태 수습도 못 했잖습니까? 여론도 안 좋은 상황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끌면 시세는 더 떨어질 겁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이소영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입을 뗀다.

"제가 지인에게 비공개 정보를 하나 얻은 게 있어요."

"어떤 정보죠?"

"이더리움이 하드포크를 준비 중이래요."

하드포크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기존에 쓰던 가상화폐에 덧씌우는 방식이 아니라 업데이트 가상화폐를 새로 발행한다는 점이 달랐다.

"하드포크가 성공적으로 실행되면 이더리움이 다시 반등할 거예요."

"실패하면요?"

"실패하면 시세는 더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굳이 무리해서 공매도를 고집할 필욘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맞다. 하드포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투자한다는 것은 동전 던지기에 돈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이 동전의 어느 면이 나와도 돈을 버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들이 하드포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습니다. 이더리움 시세는 무조건 폭락할 겁니다."

"어째서요?"

"이번 하드포크는 새로운 이더리움을 출시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일명 신형 이더리움이죠."

이소영도 아는 개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신형 이더리움이 출시되면 기존에 쓰던 구형 이더리움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거래소에서 거래가 정지되고... 폐기 수순을 밟겠죠?"

"개인이 전자지갑에 소유한 가상화폐를 폐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구형 이더리움을 소유한 이들이 폐기를 거부하면 어쩔 겁니까?"

실물 화폐는 강력한 정부의 힘으로 구형 화폐 폐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하지만 가상화폐는 정부로 불릴만한 중앙 조직이 없기에, 소유자가 거절하면 손댈 방법이 없었다.

"구형 이더리움을 쥐고 있어봤자 의미가 있나요? 어차피 거래소에서 거래도 안 되는 데이터 쪼가리가 될 텐데요."

"그 말은 거래소에서 거래만 되면 가치가 생긴다는 뜻 아닙니까?"

이소영은 그제야 내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무릎을 '탁' 친다.

"구형 이더리움 소유자들이 거래소 상장을 밀어붙일 수도 있겠네요?"

"십중팔구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야 이득을 보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이번에 이더리움을 해킹한 해커가 그런 부류에 해당한다.

"최악의 경우, 이더리움이라는 이름의 가상화폐가 2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시세도 반 토막이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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