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76화 (76/174)

< 76 >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했다.

이에 따라 은행은 가상화폐 ATM을 전부 철거했고, 가상화폐를 거래 수단으로 쓰던 상점들도 다시 볼리바르와 달러 거래로 회귀하게 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번 정책으로 외환 수수료 세금이 정상화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월말에 들어온 외화 수수료는 금지 정책 시행 전보다 더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무슨 소리야? 외화 수수료가 오히려 더 줄었다니?"

보고를 받은 마두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외화 이체 수수료는 물론이고, 환전 수수료까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장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회의장에 있던 모든 시선이 경제부 장관 쪽으로 쏠린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 기기들은 확실히 철거를 마쳤습니다만, 해외에서 가상화폐 거래가 큰 폭으로 느는 바람에..."

"해외라니?"

"콜롬비아 국경 쪽에 가상화폐를 환전해주는 브로커들이 있다고 합니다."

마두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돈 하나 이체받겠다고 국경을 넘어간다고?"

"가상화폐를 쓰는 이체 수수료가 너무 싸다 보니, 브로커 수수료를 주더라도 이득이라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은행은 막았지만, 암시장이나 식품 거래소에선 여전히 가상화폐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와츠 페이는 특별한 결제 기기 없이, 휴대폰의 QR코드만 있으면 거래할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실물 화폐를 인출하는 ATM만 빼버리는 우를 범했다.

"안 되겠군. 당장 국경에 군대를 배치해서 가상화폐 브로커 놈들을 차단하도록."

"그건 힘들 듯합니다. 콜롬비아와 맞댄 국경이 너무 넓은지라..."

"누가 다 잡으래? 몇 놈만 대표로 잡아서 족치면 될 것 아냐!"

"아, 알겠습니다."

마두로는 답답한지 제 가슴을 몇 번 두드리다가 중얼거린다.

"이참에 눈엣가시 같았던 암시장도 싹 쓸어버려야겠어. 세금도 안 내는 도둑놈들."

"대통령님, 이미 암시장은 규모가 너무 커졌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봐, 장관. 그깟 폭동이 무서워서 암시장을 그냥 두란 말이냐?"

"폭동이야 진압하면 그만이지만 곧 선거가 있잖습니까. 그때까지만 지켜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관 입에서 선거라는 말이 나오자, 마두로는 비웃음부터 흘리고 본다.

"선거? 어차피 결과는 다 정해져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누군가 들었으면 큰일이 날 소리겠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지시한 내용은 다들 들었지? 최대한 빨리 시행하도록 해. 알겠나?"

* * *

-오! 신 대표, 안 그래도 내가 전화 한 번 하려고 했었어.

오랜만에 듣는 신정의 회장의 목소리 톤이 높다.

나는 휴대폰을 고쳐 잡고서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있다마다. 다음 달에 우리 비전 펀드 출범식이 있는 건 알지?

비전 펀드.

자본금 1000억 달러짜리 초대형 펀드의 이름이다. 최근엔 추가 투자자를 받아서 자본금이 1300억으로 불어있었다.

-그때 WHTS컴퍼니 투자를 1순위에 올리기로 확정 지었다네.

"좋은 소식이 맞았군요."

-아직 놀라긴 일러. 더 좋은 소식은 투자금을 30억 달러까지 증액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가 나왔어. 핫핫핫!

기존에 예정됐던 투자금은 약 7억4천만 달러 정도였다. 그게 30억 달러가 됐다면 4배가량 투자금이 불어난 셈이다.

"회장님께서 힘을 써주시니 일이 술술 풀립니다."

-만장일치는 내가 힘을 쓴다고 나오는 게 아니야. 이건 전부 자네가 시작한 가상화폐 결제 시스템 덕분이지.

"아직 시범 서비스만 진행 중인데 그걸 좋게 봐주신 겁니까?"

-얼마 전에 남미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게 주효했어.

최근 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주변국인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엘살바도르까지 가상화폐 서비스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상화폐 결제를 금지했더니 그 수요가 주변국으로 퍼진 영향이었다.

-그 동네는 사업가들이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 아니잖은가? 그런데 자네가 몇 달 만에 자릴 잡아버리니 다들 놀라서 자빠진 게야.

"운이 좋았습니다."

-너무 겸손 떨지 말게나. 운만 좋아서 남미 지역으로 사업 확장이 가능했다면 너도나도 진출했을 걸세. 그리고 남미에서 성공했다면 화폐 가치가 불안정한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먹힌다는 뜻 아닌가?

이후에도 신정의 회장은 한참이나 나를 추켜세워줬다.

나를 칭찬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안목이 정확했음을 자화자찬하는 의미로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엔 투자를 철회해야 한다고 떠들던 것들이, 입도 뻥긋 못 하는 꼴을 보니 어찌나 통쾌하던지.

"일이 잘 풀려서 참 다행입니다."

-험험, 나는 처음부터 잘 풀릴 줄 알고 있었어. 아 참,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한 게야?

신정의 회장과 통화를 시작하고 30분 만에 드디어 내가 전화한 용건을 말할 수 있게 됐다.

"다름이 아니라 곧 미국 대선이 치러지잖습니까?"

-그렇지.

"회장님께선 정치 후원금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습니다."

-허허, 그래. 자네도 그럴 때가 됐군. 나는 선거 때마다 모든 후보에게 100만 달러씩 넣어주고 있지.

신정의 회장이 공개한 100만 달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액수를 뜻했다.

나중에 각 당의 최종 대선 후보가 정해지면 그때부터 물 밑에서 본격적인 후원 경쟁이 시작된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 모두에게 후원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네. 그래야 나중에 뒷말이 안 나와.

모든 후보에게 후원금을 주면 탈은 안 날지라도,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적어지게 된다.

한 마디로 신정의 회장은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전략을 쓰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은 이례적으로 한 사람에겐 후원금을 주지 않았군.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누구긴 누구겠나. 도날드 트럼프지.

저 이름을 듣는 순간, 입가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실리콘 밸리는 힐러리와 샌더스에게 반반, 월가는 크루즈에게 후원금을 밀어준 모양이더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야.

"트럼프가 외롭겠습니다."

-원래 당선 가망이 없는 후보가 그런 법 아니겠나.

신정의 회장이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이 당시만 해도 모두가 트럼프만은 대통령이 안 될 거라고 여기던 시기였으니까.

-자네는 어떤 후보에게 후원할 셈인가? 힐러리? 샌더스? 아니면 공화당의 크루즈?

"저는 배당이 높은 쪽에 걸어볼 생각입니다."

-그럼 샌더스겠구먼.

신정의 회장을 찾아가지 않고 전화로 통화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표정 관리를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을 거다.

* * *

미국 대통령 경선 초반, 도날드 트럼프는 '지지율 1%도 안 되는 후보'라는 평가를 받으며 철저히 배제당했다.

하지만 경선이 진행될 갈수록 정치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해줬고.

그 결과, 트럼프는 공화당의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공화당 경선 최종 후보.

본디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엄청난 유명세와 후원금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트럼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조지 소로스 "트럼프는 대통령이 돼선 안 될 사람." 테드 크루즈 후보에 1800만 달러 베팅.]

["트럼프 저지하자" 공화당 보수세력 총결집.]

["트럼프가 후보로 올라오면 차라리 힐러리 뽑겠다." 공화당 유권자들 반 트럼프 목소리 커져.]

미 대선 후보인 트럼프는 신문 6개를 펴놓고 하나씩 헤드라인을 살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신문 기사는 하나 같이 그에게 부정적이거나, 아니면 그를 헐뜯기 위한 허위 기사들로 가득했다.

꾸깃.

트럼프는 신문을 싹 모아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것으로 모자라서 침까지 뱉어준다.

"퉤, 이 썩을 승냥이 자식들."

언론사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트럼프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건 공화당에 우호적인 언론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런 언론의 편향성 때문에 트럼프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있었다.

"이것들이 난리를 치니까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잖아."

같은 공화당 후보인 크루즈는 벌써 4500만 달러에 달하는 후원금을 모았으나, 트럼프는 600만 달러의 후원금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그의 개인재산을 털어서 선거를 끌고 가는 중이지만, 언제까지 이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존! 후원자 명단을 가져와."

트럼프는 기존에 후원했던 큰손들에게 다시 전화를 돌리기로 했다.

"여기 있습니다."

후원자 리스트를 받고 나니, 다시 이가 빠득빠득 갈린다.

실리콘 밸리야 원래 민주당에 가까우니 그렇다 쳐도, 친 공화파인 월가에서조차 후원금이 없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치솟았다.

"월가에서 들어온 후원금이 진짜 0원이 맞는 거야?"

"그렇습니다."

"후. 미치겠군."

"이번 경선까지만 이기면, 그때부터는 저희에게도 공화당 지지자들의 후원금이 들어올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트럼프는 발작하듯이 팔걸이를 쿵쿵 내려치며 소릴 질러댄다.

"나는 공화당 경선 1위 후보야! 1위 후보! 그런데 왜! 이 몸을 패스하고 패배자인 크루즈 놈에게 후원이 가냔 말이야!"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원래 대통령엔 그리 큰 욕심이 없었지만,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시선을 느낀 뒤로 그는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대통령이 되고 말 거라고.

"어디 두고 봐라."

트럼프는 후원자 명단을 꼼꼼히 훑어갔다. 이미 후원한 사람 중에도 다시 후원할 여력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던 도중, 특이한 후원 목록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이건 뭐야? 1000만 달러 상당의 가상화폐?"

"전자 화폐 비슷한 투자 상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돈독 오른 은행 놈들, 별 걸 다 만들어 내는군."

"가상화폐는 은행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화폐입니다. 그래서 돈의 흐름 파악이 기존 시스템으론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돈의 흐름 파악이 불가능하다? 트럼프는 사업가였기에 이 말을 듣고 바로 촉이 왔다.

"그럼 이 돈을 선관위에 보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호오."

선관위에 신고할 필요가 없는 후원금, 사실상 트럼프 뒷주머니에 다이렉트로 꽂아준 비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돈을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1000만 달러나 준 후원자라니, 자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재차 명단에서 후원자의 정보를 확인하며 말했다.

"WHTS컴퍼니? 처음 듣는 곳이군. 여긴 뭐 하는 회사지?"

"가상화폐를 개발,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얼마 전엔 와츠라는 동영상 SNS도 출시했습니다."

"동영상? 아아, 기억이 나. 휴대폰의 멍청한 춤을 보고 따라 추게 했던 그 SNS?"

"맞습니다. 젊은 층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긴다.

"오케이. 미팅 일정 한 번 잡아 봐."

"남은 일정이 빠듯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1000만 달러나 꽂아준 놈인데 얼굴 한 번 봐주는 게 예의지."

"알겠습니다."

비서가 자릴 떠난 뒤, 트럼프는 한참이나 후원자 목록을 보다가 중얼거린다.

"가상화폐를 만든 개발사가 내게 가상화폐를 줬다라... 벌써 돈 냄새가 진동하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