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
내가 베네수엘라까지 온 이유는 사업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솔직히 경제가 파탄 직전인 나라에서 얻어먹을 게 뭐 있다고 사업을 벌이겠는가.
방문 목적은 도토리 코인의 사용처 확보와 약간의 실험정신이 전부였다. 애초에 제시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남미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
분명 그랬을 텐데...
하이퍼 인플레이션, 막대한 해외 송금 수수료, 범람하는 위조지폐.
놀랍게도 가상화폐는 현 베네수엘라의 문제점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걸 알게 된 이후로 단순한 실험정신이 '진짜 성공할지도 모르겠는데?'라는 수준까지 올라오게 됐다.
여기에 가상화폐 보급을 제안한 시몬은 추가적인 당근까지 제시하고 나섰다.
-가상화폐 서비스 보급에 발 벗고 나서 주신다면 베네수엘라의 석유개발사업 우선권을 배분해드리겠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원유 매장량 1위 국가다.
당장은 원유를 시추 여력이 없지만, 앞으로 경제가 정상화되고 기반 시설이 복구되면 어마어마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문제는 먼저 경제를 살려야 석유를 파먹든 말든 할 텐데, 그게 쉽진 않아 보인단 말이지."
어젠 흔쾌히 승낙했다만, 하룻밤을 자고 나니 걱정이 쏟아진다.
베네수엘라의 앞날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까지 깜깜한 암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고 석유를 파먹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무모했다.
'내가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건가? 아니지, 어차피 도토리 코인 사용처가 생기는 것 자체가 내겐 이득이잖아.'
베네수엘라 경제가 어찌 되든 간에, 나는 로메로 가문을 적당히 도와주면서 이득을 취하면 그만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거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린다.
"우혁! 일어났어?"
제시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리고는 내 앞에 멈춰서 빙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어때?"
"뭐가 어떻냐는 거야?"
"옷 말이야. 베네수엘라 스타일로 입었는데 어울리는 것 같아?"
베네수엘라 스타일이라고 해도 내 눈엔 그게 그거처럼 보였다. 그래서 솔직한 감상평을 내놓는다.
"미인대회에 나오는 사람 같네."
"어떻게 알았어? 이거 미인대회에서 자주 입고 나오는 옷이야. 혹시 베네수엘라 미인대회를 본 적 있어?"
"어... 뉴스에서 조금 봤었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베네수엘라는 미인대회가 아주 유명한 나라였다.
베네수엘라 대회에서 우승하면 세계 대회 우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더 설명이 필요할까.
"빨리 나가자. 빨리. 빨리."
"어딜 가자는 거야?"
"베네수엘라를 구경시켜줄게. 어젠 정전이라서 아무 데도 못 갔잖아."
제시는 기분이 좋은지, 폴짝거리며 나를 문 밖으로 끌고 간다.
그녀의 행동만 보면 가볍게 마실이라도 나가는 것 같지만, 우리에겐 어제처럼 운전사와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우혁은 먼저 어딜 가보고 싶어?"
제시가 다시 눈을 빛낸다. 내가 어떤 유명한 곳을 말할지 기대된다는 눈치였다.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베네수엘라에 관심이 없었기에 아는 지명 자체가 없었다.
"글세.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제시는 살짝 실망한듯 했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나를 이끈다.
"오늘 관광은 이 미모의 가이드님에게 맡겨 둬."
"마음대로 하시죠."
우리가 먼저 도착한 곳은 카라카스 동부의 시장이었다.
좌판에 물건을 깔고 흥정하며 파는 모습은 한국의 시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 철물점을 지나치다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된다.
"저건 뭐야?"
철물점에서 물건을 살 때, 지폐의 액면가가 아니라 지폐 무게를 달아서 물건 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건 몇 년 전에 바뀐 구권이야. 정부에서 기습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서 기존 화폐는 가치가 휴짓조각이 됐어."
"아니, 올해 또 리디노미네이션을 한다며?"
"아마 그럴겠지?"
지금껏 화폐가 휴짓조각이 된다는 말을 비유적인 표현으로만 썼었는데, 그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신권이 발행되면 지금 쓰이는 화폐도 저런 식으로 거래되겠지.'
이후에도 시장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상점 대부분은 파리만 날렸고, 그나마 식료품을 파는 상점만 사람이 다녀간다.
그런데 그 식료품 상점에서 파는 식료품이 하나 같이 저질이다.
채소와 과일은 무르거나 썩어 있었고, 고기에서는 코가 저릿할 정도의 식초 냄새가 난다.
그러다 유독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상점이 눈에 들어온다.
"저긴 뭘 파는데 줄이 저렇게 길어?"
"국가에서 운영하는 상점이야. 들어가 볼래?"
솔직히 들어갈 생각까진 없었지만 왠지 제시가 들어가길 원하는 눈치였다.
상점 안은 평범한 마트였다. 한국 마트와 다른 점이라면 진열대에 물건이 거의 없다는 것.
"여기선 정부에서 지정한 가격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팔아. 그래서 굉장히 저렴하지만... 보다시피 줄이 길고, 1인당 살 수 있는 양이 제한돼 있어."
"구매 제한이라 전부 설탕만 사는 건가?"
"설탕이 비싸서 그래. 나가서 물물교환으로 바꾸기도 좋고."
그때였다. 매장 안쪽에서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놔! 내가 먼저 왔어!"
"무슨 소리야? 내가 한참 전에 왔는데! 빨리 이거 못 놔?"
두 여인이 분유 한 통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처음엔 분유통만 뺏으려고 하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머리채를 쥐고 흔들기까지 한다.
그러다 덩치가 더 큰 여인이 분유를 차지하자 뺏긴 여인이 주저앉아서 오열하기 시작한다.
"저 분유가 없으면 안 돼... 제발요. 부탁이에요. 아이가 굶고 있어요. 열흘 째 설탕물만 먹이고 있어요."
"나도 분유가 필요해. 다른 상점을 찾아봐."
"이미, 이미 열 곳을 넘게 돌아다녔어요. 제발 조금만 나눠주세요."
스페인어로 대화가 오갔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못 사서 서글프게 우는 여인을 보고 있으려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것을 제시가 막아선다.
"우혁,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래도..."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제시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이곳은 그녀의 모국이다. 나보다 더 안타까울 것이다. 나보다 더 슬플 것이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가자. 아직 보여줄 곳이 많아."
* * *
제시는 이후에도 무장 군인이 지키는 은행, 전기가 끊긴 병원, 기름이 없어서 버려진 자동차가 가득한 주유소를 보여줬다.
"저기... 제시? 내게 이런 곳들만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이런 곳들만이라니?"
"일부러 안 좋은 곳만 보여주고 있잖아."
"다른 곳을 갔어도 비슷했을걸? 외국인들이 머무는 호텔 구역은 그나마 낫겠지만, 그런 곳을 보려고 나온 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시장을 중심으로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말은 지금껏 봐왔던 모든 것들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일상적 풍경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사람이 살 수 있지? 나 같으면 다른 나라로 이민이라도 갔을 텐데."
"이미 남자들은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갔어.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중이고."
"송금 수수료를 줄여주는 가상화폐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맞아. 그래서 넷째 오빠는 가상화폐가 베네수엘라를 구할 열쇠라고 믿고 있어."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입에 발린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직접 실상을 보고 나니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오빠의 생각에 동의 못 해."
"왜?"
"베네수엘라를 구할 열쇠는 가상화폐가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얼굴을 가리킨다.
"나?"
"응. 진짜 열쇠는 우혁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잘 생각해봐. 가상화폐를 쓰더라도 일시적인 방책일 뿐이잖아. 경제가 회복되려면 베네수엘라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야 되는 거야."
"석유를 펑펑 뽑아내던 그때로?"
제시는 머리가 날릴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맞아. 그래서 내가 오빠를 졸라서 석유개발사업권을 주자고 했어. 아니면 안 데려온다고 으름장을 놨더니 순순히 항복하더라고."
어쩐지 외부인인 내게 너무 큰 당근을 준다고 했더니, 제시가 꾸민 짓이었나.
"내 어딜 봐서 그런 큰 권한을 주려는 거야?"
"우혁을 믿으니까 그랬지."
"나는 슈퍼맨처럼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런 문제는 더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겨야지."
"그 잘난 전문가에게 맡겨서 베네수엘라가 이 꼴이 됐는걸."
제시는 양팔을 쭉 늘려서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는 앞에 쪼그려 앉아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내가 살면서 천재라고 불린 사람은 여럿 봤거든? 우리 넷째 오빠가 그렇고, 소영과 넬라도 정말 똑똑해. 그런데 우혁은 그들이 없는 걸 가지고 있어."
"뭘 말하려는 거야?"
"한국에선 이걸 뭐라고 하더라... 아, 맞아. 혜안이라고 했지?"
혜안.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안목 따위가 아니라 진짜 보고 온 것들을 그대로 써먹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정보가 없는 베네수엘라에선 큰 도움이 안 될 거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판을 벌여뒀는데 내뺄 순 없잖아.'
내가 가진 기억을 잘 더듬어 보자. 어쩌면 여기서 베네수엘라를 수렁에서 건질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 * *
얼마 전부터 베네수엘라 은행은 특이한 기계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와츠 페이 ATM.
말 그대로 와츠 페이에 연동해서 현금을 인출하는 기계였다.
기존 ATM과 차이점이 있다면 계좌를 일반 계좌가 아니라, 도토리 코인과 연동된 가상화폐 계좌를 쓴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이 낯선 기기를 쓰기 꺼려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야당 지지자를 중심으로 좋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이젠 ATM에 줄을 서서 돈을 인출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됐다.
가상화폐 송금 방식으로 수수료가 대폭 절감됐기에, 국민들은 와츠 페이를 열렬히 환호했다.
하지만 와츠 페이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쪽도 있었으니.
바로 송금 수수료와 환전 수수료로 달러를 챙기고 있던 베네수엘라 정부였다.
"저번 달 대비 송금 수수료로 거둬들인 세금이 16%나 감소했습니다. 이게 다 가상화폐로 송금하는 사람이 늘어난 탓입니다."
"가상화폐 송금은 이미 국회에서 수수료 부과 법안이 진행 중인 거 아닙니까?"
"야당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야당에서 반대한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습니다. 세금이 안 걷히면 우린 파산입니다!"
대통령 집무실에선 장관들이 가상화폐 송금을 놓고 회의에 한창이다.
이미 30분도 넘게 같은 주제로 떠들고 있지만, 좀처럼 이야기가 진전될 기미가 없다.
야당의 반대도 반대지만, 모두가 얼마 안 남은 총선을 의식하느라 법안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집무실에 한 사내가 나타난다.
"뭔데 회의를 하루 종일 하고 있어?"
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맥 마두로였다.
"가상화폐 규제를 어떻게 할지가 결정이 안 나서..."
"가상화폐? 그게 뭔데?"
"실물이 없는 사이버 화폐입니다. 은행을 통하지 않고 송금해서 수수료가 거의 안 든다고 합니다."
"아니, 은행을 안 통하면 세금은?"
"그래서 송금 수수료로 걷히는 세금이 16%나 감소했습니다."
그제야 대통령은 상황 파악이 됐는지 책상을 쿵쿵 두드린다.
"안 될 말이지! 감히 세금을 안 내려고 들어? 가상화폔지 뭔지 싹 금지시켜버려!"
"그러기엔 가상화폐 송금 서비스를 쓰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칫 잘 못하다간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겨우 수수료 몇 푼 낸다고 폭동? 웃기지 말라고 해. 그리고 그거 쓰는 놈은 야당 지지하는 것들이라며?"
"그렇습니다."
"잘됐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식들에겐 세금을 꼭 걷어야지."
이후에 장관들이 수수료 부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으나, 대통령은 기존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다 필요 없고. 앞으로 이 나라에서 가상화폐는 금지다.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