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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를 거쳐, 약 17시간 만에 베네수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의 첫인상은 썩 나쁘지 않았다.
내가 접한 신문 속의 베네수엘라는 전 국민의 97%가 빈곤층이 된 나라였는데, 직접 와서 본 베네수엘라는 평범한 개발도상국의 모습이었다.
'아직은 베네수엘라 경제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건가?'
공항의 풍경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다. 원래 독재국가들은 나라의 기둥이 썩어가도 대문은 금으로 치장하는 법이니까.
내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제시가 중얼거린다.
"공항이 너무 초라해 보여."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우혁은 예전 베네수엘라가 어땠는지 몰라서 그래. 내가 어릴 적엔 이쪽 통로부터 입국 심사대까지 사람이 꽉 찼었어."
그녀는 휑한 공항을 둘러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모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양손엔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이젠 승객보다 마약을 단속하는 경찰이 더 많아졌네."
베네수엘라는 한때 세계 GDP 순위 4위에 오를 만큼 잘 살았던 나라였다.
그런 나라의 생활 수준이 한순간에 천장에서 바닥까지 떨어졌으니 현지인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더 슬픈 건 이 나라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여력이 없다는 거야."
"석유 가격이 오르면 좀 나아지겠지."
"다들 그런 희망으로 버티고 있지만 헛된 망상일 뿐이야."
그녀는 공항의 어두컴컴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을 가리킨다.
"저쪽 주택가에 불이 다 꺼진 거 보여? 저건 전기가 모자라서 강제로 정전시킨 거야. 기름이 넘치는 나라에서 전기가 모자란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석유 채취가 잘 안 된다는 뜻인가?"
"맞아. 지금의 베네수엘라엔 석유를 퍼 올릴 능력이 없어. 기술자가 해외로 다 도망가 버렸거든. 시추 기계를 돌릴 연료도 없는 곳에서 그들이 뭘 하겠어?"
"..."
"국민은 썩은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굶고 있는데 정부에선 대책이랍시고 주 2일제 근무를 시행 한 대. 이 나라엔 희망이 없어. 이대론 파멸을 맞이할 뿐이야."
제시는 베네수엘라의 현실과 미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검증되지도 않은 가상화폐 결제 서비스 도입을 서둘러 달라고 했던 거겠지.
* * *
공항 입구에는 우릴 맞이하러 온 사내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운전사. 나머지 둘은 경호원이다.
제시가 말하길, 베네수엘라 치안이 아직 무너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조건 경호원을 끼고 다니는 게 좋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자동차 도로를 따라 한참을 이동한 뒤에야 수도인 카라카스 시내가 나왔다.
높은 산지에 낡은 저층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딱 한국의 80년대 달동네를 떠오르게 했다.
정전 때문에 사방이 컴컴해서 어딜 갈 수도 없었기에, 우린 곧장 제시의 집으로 이동했다.
"다 도착했어. 저기가 우리 집이야."
놀랍게도 제시의 집은 운동장만 한 정원이 딸린 저택이었다.
한국으로 유학을 올 정도면 부잣집 딸일 줄은 알았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큰 저택에서 살았을 줄이야.
"오! 제시카!"
우리가 저택 입구에 다가가자 대문 안에서 덩치가 곰 같은 사내가 걸어 나온다.
사내는 활짝 웃으며 제시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뒤에 따라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싹 굳는다.
"Mierda!"
흥분해서 스페인어로 떠들어대는 데,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제시는 곰 사내의 허벅지를 힘껏 걷어차서 조용히 만든 뒤에야 나를 저택 안으로 데려갔다.
"방금 누구였어?"
"둘째 오빠. 바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녀는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옆에 딸린 작은 건물로 나를 데려간다. 저택과 비교하면 작다는 거지, 내가 안내받은 곳도 한국의 어지간한 단독주택보다 컸다.
짐을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누군가 방 앞으로 찾아왔다.
제시와 그녀를 쏙 빼닮은 사내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제시의 넷째 오빠인 시몬 로메로라고 합니다."
이번엔 영어로 말을 걸어줬기에 나도 답을 해줄 수 있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WHTS컴퍼니의 대니얼 신입니다."
"제시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상화폐라는 아주 멋진 것을 운영 중이시더군요."
"가상화폐를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암호화폐잖습니까. 저는 그 기술이 베네수엘라를 수렁에서 건져줄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옆에 앉은 제시를 흘깃 쳐다보자, 그녀가 부연 설명을 해준다.
"베네수엘라에 가상화폐 서비스를 써보자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시몬 오빠야."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을 이어간다.
"제가 가상화폐에 대해 알게 됐을 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실물이 없어서 국경을 넘나드는데 제약이 없는 화폐라니! 이것이 바로 미래의 화폐 아니겠습니까."
"가상화폐를 높게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베네수엘라를 구할 열쇠라는 표현은 너무 과한 게 아닌지."
"절대 과하지 않습니다. 가상화폐, 그중 도토리 코인은 베네수엘라에 딱 맞는 화폐입니다."
그는 지갑을 열어서 지폐를 잔뜩 꺼낸다. 베네수엘라의 화폐인 볼리바르 한 묶음, 그리고 100달러짜리 한 장이었다.
"작년엔 100달러를 바꾸려면 1000볼리바르면 충분했습니다만, 그러나 올해부턴 4000볼리바르가 필요해졌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이 가상화폐가 맞을까요?"
"인플레이션은 문제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는 100달러 지폐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든다.
"이미 베네수엘라 내에서 달러를 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베네수엘라인은 주변국으로 나가서 일하거나, 범죄, 혹은 매춘으로 돈을 법니다."
찌익.
그는 100달러 지폐의 끝부분을 찢어낸다.
"벌어온 돈을 송금하면 은행에서 수수료 명목으로 10%를 뗍니다. 그리고,"
찌익.
남겨진 달러 귀퉁이를 더 찢는다.
"달러를 볼리바르로 교환하는데 다시 한번 수수료가 부과됩니다. 깜짝할 새에 16%에 달하는 돈이 사라졌습니다."
"심각하군요."
"더 큰 문제는 사방에 달러와 볼리바르의 위폐가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시몬은 100달러 지폐의 남은 부분을 갈가리 찢더니 안에서 서너 겹으로 갈라지는 조각을 보여준다.
그가 찢은 100달러 지폐가 방금 언급한 위조지폐였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시장에선 화폐보다 물물교환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지요."
인플레이션 대응과 수수료, 그리고 위폐.
가상화폐는 이 세 가지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특히 화폐의 위조는 아예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몬 씨가 어떤 의도로 가상화폐 도입을 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실생활에 가상화폐가 도입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집안의 힘이라면 석 달 안에 가상화폐 결제를 보급할 수 있습니다."
저택의 크기로 짐작건대 제시 집안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석 달 안에 국가적으로 새로운 화폐 체계를 보급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상대는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덧붙인다.
"제가 너무 서두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일까요."
"마두로 정권이 연말에 무리한 리디노미네이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그 전에 가상화폐 서비스 보급을 끝낼 생각입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단위 축소를 뜻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 100대1의 리디노미네이션이 된다고 가정하면 1만 원 지폐가 100원이 되는 식이었다.
"리디노미네이션 비율이 얼마기에 그리 서두르십니까?"
"10만 대1입니다."
"허..."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가치가 떨어져서 단위가 너무 올랐을 때 택하는 정책이다.
즉, 10만 대 1의 리디노미네이션을 강행한다는 뜻은,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그만큼 많은 돈을 찍어내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 * *
베네수엘라의 경제 파탄은 유가 시세 하락이 원인이지만, 그 위기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정치였다.
셰일 가스로 인해 유가가 폭락하고 국가 경제가 흔들리는 동안, 베네수엘라 정부는 긴축이 아니라 시장에 돈을 더 푸는 선택을 한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으나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돈을 살포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엔 돈이 넘쳐나서 월급으로 분유 한 통을 간신히 살 수 있게 됐고, 쌀 한 포대를 사려면 석 달 치 월급을 내야 했다.
더 황당한 것은 시장 상황이 이 꼴인데도 현 정권은 돈을 더 풀 계획을 세웠다는 거다.
"뭐? 고액권을 20배나 더 찍어내고 있다고?"
베네수엘라의 야당 의원, 에드윈 로메로는 보고서를 받아보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시장에 돈을 더 풀어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지만 보고서를 가져온 보좌관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정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돈 푸는 걸 멈추는 순간 정권을 빼앗길 테니까요."
"젠장... 그래서 더 열 받는 거야."
베네수엘라 국민은 석유 사업의 호황기 때부터 쭉 국가 보조금을 받아 왔다. 무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말이다.
그러니 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 휴짓조각이 되고 있음에도, 국가 보조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정권의 보조금 살포를 막자니 다가올 총선에서 표가 떨어질 테고, 그렇다고 보조금 살포를 그대로 두면 나라가 걸레짝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야당 내에서조차 보조금 살포 지지와 반대로 의견이 갈려서 내부분열이 나고 있었으니.
이래서야 다가오는 총선도 참패는 확정이었다.
바로 그때, 에드윈의 머릿속에 생각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잠깐만, 그... 사이버 화폐라고 했었나?"
"넷째 도련님이 제안하신 가상화폐 도입 건 말입니까?"
"그래. 가상화폐. 그걸 쓰면 인플레이션 대비도 되고 해외 송금도 저렴하게 가능하다며?"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입으론 부정적인 의견을 낸다.
"가상화폐는 장점이 확실하나, 단점 역시 명확합니다."
"무슨 단점이 있지?"
"발행 주체가 국가가 아닌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기업에서 가상화폐를 무제한으로 찍어내도 저흰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문제도 아니야. 이미 정권에서 현금을 무제한 찍어내는 중이잖아?"
맞는 말이었기에 보좌관도 별다른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선거는 지고, 나라 경제도 파탄이야. 그러니 도박수라도 걸어보는 수밖에."
에드윈은 결정을 한 번 내렸다 하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보좌관도 그걸 알았기에 더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도입 준비는 넷째가 하겠다고 했으니, 일임시키면 될 거 같고... 다른 특이사항은 없지?"
"가상화폐 발행 기업 측에서 내건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향후 저희가 정권을 잡게 되면, 석유개발사업의 우선권을 배분해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