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72화 (7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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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정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남아메리카의 인구 3천만 명 규모의 나라다.

유명한 것은 단연 석유로, 한땐 국가 전체 GDP의 1/3을 석유 수출에 의존했을 정도다.

그러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방만한 경영을 이어가다가 셰일 가스가 석유 가격을 끌어내리면서 재앙이 시작됐다.

석유 수출에만 의존했던 나라의 경제는 한순간에 무너졌고, 이어서 정치, 행정, 치안 등. 국가의 모든 분야에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내가 남미 쪽엔 관심이 없어서 아는 정보가 몇 없지만, 앞으로 베네수엘라가 더 심각한 막장 국가가 되는 건 확실해.'

아주 흐릿하지만, 예전 신문에서 10,000,000,000%라는 숫자를 봤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뭐가 10,000,000,000%냐고? 베네수엘라에 닥칠 인플레이션 수치가 무려 10,000,000,000%라는 뜻이다.

단위가 너무 커서 감이 안 잡힌다. 인플레이션이 10%라도 힘겨워지는데, 10,000,000,000%의 인플레이션을 겪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끔찍하군."

나는 한참이나 침대에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다. 바로 옆엔 제시가 하얀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젯밤 그녀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가상화폐 결제 서비스를 베네수엘라에 해달라고 했었지. 그것도 한시가 급하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개발 중인 가상화폐 결제 서비스는 단순한 결제, 송금, 환전 서비스다.

이것만으로 베네수엘라가 살아날 방법은 없을 텐데, 어째서 제시는 급하게 베네수엘라부터 서비스를 열어 달라고 한 걸까?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베네수엘라엔 곧 10,000,000,000%의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올 테니, 그 전에 현금을 몽땅 도토리 코인으로 바꿔두면 피해를 최소화할 순 있을 거다.

'그나저나 참 기특하다니까. 어떻게 그런 요청을 할 생각을 했을까?'

나는 제시에게 원하는 걸 솔직하게 요구하라고 했다.

만약 그녀가 특별 보너스나 오피스텔, 아파트 같은 보상을 원했어도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을 거다.

지금껏 WHTS컴퍼니를 운영하면서 그녀의 여론 관리 기술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개인의 이득이 아니라 모국의 안정을 먼저 생각할 줄이야.

스윽.

잠든 제시의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조용히 옷을 챙겨 입는다.

마음 같아선 호텔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휴대폰에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가 내 등을 떠민다.

'태식이가 한국에 있었을 땐 그래도 널널했는데, 혼자서 일을 다 쳐내려니까 죽을 맛이야.'

앞으로 해외 진출까지 진행되면 더 바빠지면 바빠졌지, 편해질 일은 없을 거다.

빨리 옆에서 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든지 해야겠다.

* * *

소프트포우의 1000억 달러 펀드 조성이 발표되자 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언론과 금융계는 연일 1000억 달러가 어디에 투자될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고, 테크 업계는 몸값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며 장밋빛 전망을 그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소프트포우 측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1000억 달러의 펀드에 돈을 댄 투자자들이 신정의 회장의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신 회장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희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1000억 달러 펀드를 공개하다니요."

"이번 일은 신 회장님이 경솔하셨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미리 공개한 건 그렇다고 칩시다. 어차피 연내에 펀드를 공개할 예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첫 타자가 듣도 보도 못한 가상화폐발행 업체냔 말입니다!"

투자자들이 목소릴 높이자 상석에 앉은 신정의 회장의 안색이 굳어진다. 반대가 있으리란 예상은 했다만, 이 정도로 격렬히 반대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러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내가 책상을 툭하고 두드린다.

"저도 이번 투자 결정은 의아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1000억 달러 펀드에서 400억 달러를 투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였다.

"WHTS컴퍼니? 그 업체가 유망해서 투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헌데, 지분 투자가 아니라 가상화폐를 사들인다? 저는 지금껏 그런 투자 방식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모하메드는 투자자들의 대표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직접 나선 이상, 제아무리 신정의 회장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순 없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결정이었어."

"그 가치를 저희도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설명은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WHTS컴퍼니와 도토리 코인, 그리고 개발 중인 신개념 결제 서비스. 여기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단 말이지?"

신정의 회장의 말처럼 투자를 발표한 당일에 모든 정보는 공개했다.

하지만 가상화폐라는 것이 워낙 생소하기도 했고, 개념을 이해했어도 어떤 가치가 있는지 측정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WHTS컴퍼니가 개발한 것은 결제 서비스에 가상화폐를 결합해서 전송 속도를 높인 기술이 맞습니까?"

"그건 부수적인 거고, 진짜는 송금 수수료야."

100만 엔을 미국으로 보낼 때, 기존의 은행 송금 방식으론 약 2만 엔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가상화폐 전송 방식을 쓰면 수수료는 100분의 1인 200엔으로 줄게 된다.

"개인 송금에는 몇만 엔을 아끼는 정도겠지만, 매번 수백만 엔을 송금하는 기업 간의 거래에선 혁신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어."

"제가 받은 보고서에는 사용 대상이 개인으로 지정돼 있었습니다만."

"그건 고놈이 너무 멀리 봐서 그런 거고. 이 기술은 기업에만 풀려도 충분히 돈값을 할 게야."

신정의 회장이 열심히 설명했음에도 투자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미지근했다. 이에 참다못한 신정의 회장이 으름장을 놓는다.

"자네들이 투자하기 싫으면 내가 단독으로 투자를 진행할 터이니 그리들 알게."

지금 와서 소프트포우 단독 투자로 방향을 틀면, 1000억 달러 펀드는 사실상 해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투자자들도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기에 사우디 측이 대표로 신정의 회장에게 중재안을 내놓게 된다.

"가상화폐가 아니라 WHTS컴퍼니의 지분에 투자하시죠. 그렇다면 저희도 두말없이 회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상대가 내놓을 생각이 없는 걸 어쩌겠나."

"몸값을 더 쳐주시죠. 아니면 투자를 철회한다고 압박해볼 수도 있고요."

"소용없는 짓일세. 고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걸?"

이후에도 투자자들의 설득이 이어졌으나 신정의 회장은 완고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로가 평행선 같은 의견만 내놓을 뿐, 좀처럼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은 양측 모두 한발씩 물러서는 결과를 내놓는다.

"펀드의 정식 출범까진 아직 석 달이란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WHTS컴퍼니가 무슨 결과물을 내놓는지 지켜보고 결정하도록 하죠."

* * *

"아오! 뜬금없이 뭔 투자 연기야? 인터뷰만 들어보면 내일 당장이라도 투자해줄 것처럼 굴더니."

소프트포우의 투자 연기 소식이 전해진 뒤, 박태식은 첫 회의부터 나를 붙잡고 울분을 토해댔다.

일본 지사에서는 이미 신규 페이 서비스의 모든 준비를 끝내 뒀는데, 갑자기 올 스톱이 되게 생겼으니 아쉬워서 저러는 것이다.

"소프트포우 쪽에서는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더라."

"미안하면 다야? 그쪽에서 발을 빼는 분위기니까 우리랑 제휴 맺은 업체들도 전부 보류 때려버렸잖아."

새로운 결제 서비스, 와츠 페이는 본디 온라인 전용 송금 서비스로 개발됐다.

그러나 개발 중 온라인만이 아니라 오프라인 페이 서비스까지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이 낫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에 맞게 전략을 수정해서 현지 오프라인 업체와 함께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프트포우에서 투자를 미루면서 계획 자체가 어그러져 버렸다.

"우리가 단독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하면 힘들까?"

"할 수는 있겠지만 정착까진 쉽지 않을 거야. 특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일본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편의점은? 거기도 전부 보류야?"

"편의점은 경쟁이 치열해서 그런지 아직 한 곳에서만 보류 요청이 왔어."

"그럼 편의점이라도 확실히 잡아 봐."

일본은 1인 가구가 많다 보니 편의점 이용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러니 편의점에서만 결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어도 많은 사용자를 모을 수 있을 거다.

"편의점만 쓸 수 있는 결제 서비스를 사람들이 쓰려고 할까?"

"안 써도 돼. 중요한 건 오프라인에서도 우리 서비스를 쓸 수 있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주는 거야."

와츠 페이의 핵심은 가상화폐인 도토리 코인의 오프라인 결제였다.

지금까지의 가상화폐는 '투자 상품'이었지만 오프라인 결제가 활성화되는 순간부터 진짜 '화폐'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무슨 차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투자 상품은 말 그대로 상품일 뿐이지만 화폐는 국가에서 보증하는 일종의 어음이다.'

즉, 도토리 코인이라는 어음을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WHTS컴퍼니는 실물 화폐를 찍는 국가와 맞먹는 권력을 갖게 된다.

"정 안 되면 기존에 와츠처럼 보상을 퍼주고 가입자를 늘릴 수밖에."

"소셜 채굴?"

"비슷한 방식으로 가야지. 중요한 건 가입자 확보니까."

도토리 코인 투자자들의 돈으로 도토리 코인을 홍보하는 전략.

우리는 이미 소셜 채굴로 와츠를 성공시킨 전례가 있었기에, 같은 전략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 * *

회의를 마친 뒤, 나는 서둘러 차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와츠 페이의 또 다른 서비스 지역인 베네수엘라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혁! 여기야! 여기!"

공항엔 제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는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다가온다.

그리고는 잽싸게 내가 끌고 온 캐리어를 낚아챈다.

"내가 들어도 돼."

"아니야. 이번 여행은 내가 가이드잖아. 손님은 편하게 몸만 오면 오케이야."

제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으로 V자를 그린다.

"음... 초 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아직 베네수엘라에 페이 서비스 개시를 확정한 건 아니야. 가서 상황을 보고 최종 결정을 하는 거지."

"알아. 그래도 신경 써준 것만으로도 나는 고맙게 생각해."

내가 베네수엘라에 가는 이유는 그녀가 부탁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실험정신이 더 강했다.

10,000,000,000%의 인플레이션이 올 나라에 자국 통화 대신 가상화폐를 쓰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미 비슷한 예시가 가까운 미래에 존재했다.

같은 남미의 엘살바도르는 자국 통화의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자 대안으로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지정했다.

결과는 비트코인의 널뛰는 시세 덕분에 국가 경제가 엉망이 돼 버렸지만.

'만약 가상화폐의 시세를 인위적으로 우상향시킬 수 있다면, 가상화폐를 통화로 쓰는 국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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