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
나와 신정의 회장이 탄 자동차는 제주도를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동안 우리의 담화 주제는 이번 투자 건을 넘어, 그보다 더 먼 미래로 향해 있었다.
"이번 투자 건이 성사되면 자네는 10억 달러 가치의 회사 오너가 되는 거라네. 자네처럼 젊은 친구에겐 엄청난 성공이지."
그는 모르겠지만 WHTS컴퍼니의 보유 자산은 진즉에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그 자산을 전부 가상화폐나 다른 현금성 자산으로 바꿔둬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물론 그런 말을 해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래서 자넨 이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야 당연히... 회사를 더 키워야겠죠?"
"얼마나 더? 한국의 재벌가처럼? 아니면 나처럼?"
그저 회사를 성장시키겠다고 앞만 보고 달려왔을 뿐, 명확한 목표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네를 보면 내 젊을 때가 떠올라. 돈을 벌고, 벌고, 또 버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었지."
그는 옛 생각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야. 돈을 어디에 쓸지도 생각 않고 벌기만 하다니. 이 얼마나 미련스럽단 말인가."
"돈은 벌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쓰긴 쉬운 것 아닙니까. 그러니 버는 것만 생각하신 거겠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헛헛헛.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게나. 자넨 그 많은 돈을 어디 쓸 생각인가?"
소비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명품이나 자동차, 요트 같은 사치품과 부동산 매입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재산 10억 달러가 넘는 자산가에게 그런 소비는 너무 소소한 것들이었다.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건 어떨까? 미래에 대성할 회사를 미리 사들이면... 아니야 이건 돈을 쓰는 행위보다는 돈을 더 벌기 위한 투자에 가깝잖아.'
이상했다. 분명히 돈을 쓰기가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떠올리려니 어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까?
* * *
WHTS컴퍼니의 보안팀은 얼마 전 대대적인 인력충원에 들어갔다.
기존엔 팀장인 넬라를 포함한 4명에서 모든 업무를 보고 있었다면, 이젠 평사원만 30명에 달하는 대규모 팀을 이루게 됐다.
보안팀의 인원을 대폭 충원한 이유는 전부 소셜 채굴의 모니터링을 위해서였다.
소셜 채굴로 인해 와츠의 가입자가 폭증하고, 도토리 코인의 채굴량이 늘어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덩달아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도 많아지게 됐다.
"팀장님, 3일 전부터 인도 지역에서 비슷한 패턴의 가입자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시면..."
얼마 전 입사한 신입 직원이 열심히 사태를 보고 중이다. 그러나 팀장인 넬라는 모니터에 둔 시선을 떼지 않는다.
"팀장님?"
넬라가 고개를 살짝 튼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모니터에 가 있었다.
"몇 명이나 나왔다고요?"
"오늘만 21만 명이고, 그제부터 발생한 비슷한 패턴을 합하면 55만 명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이번 손님은 욕심이 많네요."
넬라는 그제야 보고서를 받아서 휙휙 페이지를 넘겨본다.
"가입자 휴대폰 정보는 전부 진짜가 맞던가요?"
"정보가 조작된 흔적은 없었습니다."
"조작이 아니면 타인 휴대폰을 해킹해서 가입시켰겠네요."
이들은 와츠의 신규 가입자에게 주는 도토리 코인을 노린 해커다.
주로 휴대폰 가입 처에서 개인정보를 빼돌린 뒤, 대량의 신규 가입자를 만드는 수법을 썼다.
"수십만 개의 계정을 동시에 가입시켰으면 필시 관리가 안 될 거예요. 그러니 출금을 유예 시키고 천천히 확인해보세요."
"알겠습니다."
와츠 신규 가입자는 가입 후 열흘 동안 코인 출금이 제한된다.
이 기간에 별일이 없으면 도토리 코인을 출금해서 현금화 할 수 있지만, 만약 부정한 행위가 의심되면 적게는 1개월에서 많게는 6개월까지 출금을 유예 시키며 방어하곤 했다.
"정말 끈질긴 사람들이에요. 계속 막혀도 포기할 생각을 않는다니까요."
넬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시선을 다시 대형 모니터 쪽으로 돌린다.
모니터에선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이곳, 제주 공항에서 소프트포우의 신정의 회장과 WHTS컴퍼니의 대니얼 신 대표가 극비리에 만났다는 소식이... 앗!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다시 공항으로 들어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들어오던 세단이 공항 앞에 멈춰선다. 입구엔 이미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뒷좌석 문이 열리며 먼저 신우혁 대표가 내려선다.
"대표님! 신정의 회장님과 어떤 이유로 만나셨습니까?"
"세간이 퍼진 루머가 사실입니까?"
"도토리 코인에 추가 투자가 이뤄지는지만 말씀해주십시오!"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고 달려든다. 질문과 함께 플래시까지 사방에서 쏟아지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차에서 내린 신우혁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가까운 마이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몸싸움이나 소릴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마이크를 쥐고 물러나라는 손짓만 한 번 했을 뿐인데 성난 소 떼처럼 몰려들던 기자들이 순한 양처럼 질서를 지키며 뒤로 물러선다.
"아..."
모니터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넬라는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 저러니까 여자들이 뻑이 가지."
넬라는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본다. 어느새 옆 부서의 제시가 와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시? 언제 왔어? 아니, 그보다 방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영화에서 배웠어. 느낌 있지?"
"그런 말은 쓰면 안 되는 거야."
"그치만 넬라의 지금 표정에 딱 맞는 표현이었는걸."
넬라는 다시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돌렸다.
그 잠깐 대화하는 사이에 신우혁 손에 들려 있던 마이크는 신정의 회장에게 넘어가 있었다.
-저희 소프트포우는 미래 산업을 육성할 100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할 예정입니다.
발표와 동시에 현장에서 당황한 듯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1000억 달러면 한화 110조에 달하는 돈이다. 그 초대형 펀드를 이렇게 기습적으로 발표해버렸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1000억 달러 펀드의 첫 투자처를 공개할까 합니다.
신정의 회장은 옆에 서 있는 신우혁을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바로 WHTS컴퍼니의 신개념 화폐인 도토리 코인입니다.
화면으로 발표를 지켜보고 있던 두 여인의 입이 떡 벌어진다.
1000억 달러를 전부 투자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대형 펀드를 출범하며 첫 투자처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넬라야. 이젠 우리 회사가 진짜 국제무대에서 데뷔한 거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
"우혁은 진짜 대단해. 매번 나를 놀랍게 만든다니까."
넬라가 아무 말이 없자, 제시는 옆자리에 앉아서 장난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 는다.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야?"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해. 하지만 그는 여러 편법을 써서 이 자리까지 온 거잖아."
"편법?"
제시는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손가락을 치켜든다.
"그 편법이 설마 인터넷 여론 관리를 말하는 건 아니지?"
"편법 맞잖아. 그건 엄연히 여론 조작이야."
"언론사에서 대기업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주거나, 대기업에 불리한 기사를 지워버리는 건 괜찮고?"
"나는 대기업의 방식이 옳다고 한 적 없어. 단지..."
넬라가 말꼬리를 살짝 흐리자, 제시가 바로 치고 들어온다.
"상대는 총과 대포를 쓰고 있어. 그런데 너는 그에 맞서서 얼기설기 만든 새총을 들었다고 비난하고 있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 최소한 법은 지키면서 싸우자는 거지."
"그 법을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그 법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건 맞아?"
저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신우혁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횡령과 배임에 관대한 나라입니다. 유죄 판결을 받고도 46%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전부 집행유예로 풀려났죠.
-여기서 500억 원 이상을 횡령한 범인은 몇 명이나 구속됐을까요?
-정답은 0%입니다. 500억 원 이상의 횡령범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가진 자에겐 관대하고 빈자에겐 한없이 가혹하다.
그렇다면 이 법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가? 그건 아닐 거다. 하지만 반대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 역시 정답은 아니다.
넬라가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제시의 말이 이어진다.
"나는 우혁이 꽉 막힌 사람이 아니어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 있게 됐으니까."
"너..."
제시는 의자를 끌어서 넬라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바짝 붙어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어쩌면 네가 원하는 것도 그가 이뤄줄 수 있을지 몰라."
* * *
새벽이 더 가까운 늦은 밤.
매번 늦게 출근하는 게 일상이지만 신정의 회장과 만난 이후부터는 일이 더 많아졌다.
내부 업무만 해도 바빠서 미칠 지경인데 외부 인터뷰도 해야 하고, 오늘은 정부에서 4차 산업혁명 행사에 초청해서 거기도 다녀오는 길이다.
"지쳤어..."
터덜터덜 회사를 걸어 나가는 동안 저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덤으로 배도 고프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느라 저녁도 제대로 안 먹었구나.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사갈 생각으로 편의점에 들어가려던 차에, 때마침 휴대폰이 울어댄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발신자는 제시였다. 메시지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든다. 저녁에 보안팀 직원들과 한잔하기로 했었는데, 일에 치이다 보니 깜빡해 버렸다.
'꼭 가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말없이 늦었으니 가주는 게 낫겠지. 겸사겸사 배도 채우고.'
택시를 잡아타고 한달음에 약속 장소로 향했다.
회식 장소는 퓨전 바 스타일의 술집이었다. 칸막이로 테이블이 가려져 있어서 조용히 술을 마시기 좋은 구조다.
[어디야?]
[8번 방]
문자에 찍힌 8번 방으로 찾아갔더니 제시가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우리 캡틴, 왜 이렇게 늦었어."
"다른 사람들은?"
"없어. 빨리 여기 앉아. 빨리빨리."
혀가 완전히 꼬인 걸 보니 제법 마신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손짓한 옆자리가 아니라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술잔을 내민다.
"내가 너무 늦었나 보네."
"늦었지. 그래도 괜찮아. 우리 캡틴이잖아."
나는 받은 술을 홀짝거리며 테이블을 살핀다. 이상하게 다른 자리에는 사람이 앉았던 흔적이 없었다.
"혹시 혼자 마시러 온 거야?"
"맞아. 헤..."
제시는 히쭉히쭉 웃으며 내 옆으로 자릴 옮긴다.
진한 향수 냄새가 확 풍긴다.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가슴골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개방적이다.
"이런 미녀를 기다리게 하고 말이야. 정말 나빴어."
그녀는 옆에 바짝 들러붙으며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라준다. 그러면서 은근히 가슴을 내 팔에 밀착시켜왔다.
평소에도 그녀가 스스럼없이 다가오긴 했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노골적이다.
나는 술만 받고서 그녀를 살짝 옆으로 밀어낸다.
"우리 삼촌이 내게 말하길, 남자는 항상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지."
"그게 뭔데?"
"첫째는 여자."
제시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둘째는?"
"가슴 큰 여자.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삼촌이 신신당부까지 하셨어."
"어째서?"
"외숙모가 가슴이 크셨거든."
이번에는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린다.
"그게 뭐야."
제시는 깔깔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제시,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라니? 난 그런 거 없어. 진짜야."
"그래? 그럼 일어난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제시가 급하게 나를 막아선다.
"잠깐만. 이러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
"아까 말 안 했던 세 번째가 이유 없이 다가오는 여자야."
"..."
나는 제시 쪽으로 돌아서 앉은 뒤, 그녀의 손을 잡고서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시, 이건 너답지 않아. 내게 뭔가를 원하면 솔직하게 요구해. 너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나 싶더니, 꾹 참고서 입을 뗀다.
"가상화폐를 쓰는 새로운 결제 서비스... 곧 개시한다고 했지?"
"맞아. 한국과 일본 시장부터 시작할 거야."
"그거... 내 고향에도 같이 진행해주면 안 될까?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정말 한시가 급해서 그래. 제발 부탁이야."
"고향? 거기가 어딘데?"
눈가를 훔쳐낸 그녀가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달싹인다.
"베네수엘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