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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만 무성했던 소프트포우의 가상화폐 투자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투자자들은 소프트포우가 WHTS컴퍼니의 지분을 사들일 거라고 예상했었으나, 실제 발표된 내용은 그보다 더 큰 파급력을 불러오는 방식이었다.
-소프트포우는 도토리 코인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WHTS컴퍼니에 투자하겠습니다.
이번 발표는 가상화폐 업계는 물론이고 일반 금융 업계에도 큰 충격을 몰고 왔다.
가상화폐를 산 것으로 모자라 그 행위에 '투자'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가상화폐를 투자 상품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식과 동시에 엄청난 돈이 가상화폐 판으로 흘러들어왔고, 가격을 9달러로 고정했던 도토리 코인조차 차트가 불기둥처럼 치솟게 된다.
"모든 거래소에서 도토리 코인 매수세가 강합니다. 어디서 이런 돈이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코인박스는 25달러 지지선 붕괴! 더 올라갑니다!"
"팀장님, 이대론 자정 전에 27달러 선이 넘는 건 상수입니다! 물량을 더 쏟아내야 합니다!"
WHTS컴퍼니 가상화폐 운영팀은 며칠 전부터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이들의 목표는 급등 중인 도토리 코인의 시세를 안정화하는 것.
그러나 운영팀이 무슨 짓을 해도 가격이 잡히긴커녕, 끝도 없는 상승만 반복하고 있었다.
"..."
책임자인 이소영은 별다른 지시 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이젠 정말 쓸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팀장님, 공지라도 다시 올릴까요? 지금은 그게 최선인 것 같은데요."
"지난번 공지 올린 지 얼마나 됐죠?"
"어제저녁에 올렸으니까, 하루하고 4시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휴... 됐어요. 효과 없는 걸 뭐하러 자꾸 올리겠어요."
이들이 말한 공지란, 코인 시세가 과열됐으니 투자에 주의하라는 경고성 공지였다.
본디 개발사에서 경고성 공지를 내면 투자 심리가 위축돼서 가격이 내려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은 공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냈음에도 시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많은 물량을 대체 어디서 매수하고 있는 거죠? 기관? 투자사? 헤지펀드?"
"거래소 쪽 보고서에 따르면, 기관 투자자는 극소수고 90% 이상이 개인이라고 합니다."
개발자인 이소영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코인을 출시했을 때 도토리 코인 1개의 적정가는 1달러였다. 그런데 투자자들은 그걸 9달러도 모자라서 이젠 25달러나 주고 사고 있었다.
"거품일 게 뻔한데 개인이 코인을 사는 이유가 뭘까요. 이러다 가격이 급락하면 어쩌려고요?"
"지금 투자자들 사이에선 아무 코인이나 일단 사두기만 하면 가격이 오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불가능한 걸 알아도 가격이 워낙 가파르게 오르다 보니... 너도나도 빚까지 내서 투자금을 늘린다고 합니다."
이소영은 도토리 코인의 시세 유지 매커니즘이 완벽하다고 여겼었다.
실제로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도토리 코인의 시세는 9달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시장에 돈이 몰린다. → 도토리 코인 가격이 오른다. → 신규 코인을 발행해서 가격을 내린다. → 판매금으로 비트코인을 산다. → 비트코인 담보로 도토리 코인 안정성이 증가한다.
이론상 흠잡을 데 없는 순환구조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은 순환구조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도토리 코인으로 몰려 버렸다.
도토리 코인을 무제한 찍어내자니 나중에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자니 시세는 진정될 기미가 없다.
불과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었는데, 정작 일이 터지고 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대표님은 알고 계셨었어. 규격 외의 쓰나미가 올지도 모른다고 경고까지 하셨잖아.'
이소영은 한동안 밀려오는 자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고를 듣고도 안일한 대응으로 일을 그르쳐 버린, 자기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 *
밤보다 새벽이 더 가까운 시각.
막차가 끊길 것을 걱정해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회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숙식용 오피스텔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조금 돌아서 가는 길을 택한다. 이대로 잠들기엔 이 밤이 너무 아깝다. 그런 내 아쉬운 마음이 발걸음을 편의점으로 이끈다.
"이제 오냐."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에서 시커먼 사내놈이 손을 흔든다. 그곳엔 일본 지사에 있어야 할 박태식이 앉아 있었다.
"뭐야? 너, 한국엔 언제 들어왔어?"
"오랜만에 술 생각이 나서 퇴근하자마자 비행기 타고 넘어왔지. 얼른 앉아."
테이블엔 먹다 남은 맥주와 과자, 땅콩 같은 간단한 주전부리가 널려 있었다. 꽤 오랫동안 여기서 기다린 것 같다.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괜찮은 곳으로 예약이라도 했을 텐데."
"됐네요. 나는 여기서 먹는 게 딱 좋아. 너도 그래서 퇴근하고 편의점에 들른 거 아냐?"
"그렇긴 해."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맥주를 두 캔 사서 나온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그걸 본 박태식이 중얼거린다.
"우리는 여유가 생겨도 먹고 마시는 게 달라지질 않냐."
"같은 게 어때서?"
"아니, 그 있잖냐. 영화나 드라마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는 근사한 바에 가서 와인 같은 걸 마시잖아. 밥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영화니까 그렇지. 현실은 재벌가도 치킨 배달 시켜 먹는다더라."
우린 서로를 보고 픽 웃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시시콜콜한 잡담, 항상 나오던 실 없는 농담, 희미한 옛 추억,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마지막엔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왔어?"
"최근 들어 좀 바빠. 가상화폐가 워낙 말썽이잖아."
"아, 맞다. 가상화폐 팀에 연락할 때마다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난리더라. 특히 소영 씨는 아예 사람이 다 죽어가던데?"
"그래?"
"이 무심한 놈아. 넌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 그것도 몰랐냐? 신경 좀 써줘."
이소영은 회사에서 만날 때마다 평소처럼 밝은 모습이었다. 설마, 내 앞에서만 밝은 척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도토리 코인 시세 폭등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더라. 그런데 이번 폭등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라며?"
"맞아. 올 것이 온 거니까."
"그럼 네가 확실히 케어를 해줘.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사람 골병드는 거 한순간이다."
안 그래도 이소영이 느끼는 부담을 줄여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지금은 사실상 그녀 혼자서 가상화폐 개발, 운영, 관리를 전부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우혁아, 그런데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뭔데?"
"왜 도토리 코인의 가치를 묶어두려는 거야? 다른 회사들은 기를 쓰고 시세를 올리려 들던데."
"예전부터 말했잖아. 도토리 코인은 투자 상품이 아니라 화폐로 쓰이길 원한다고. 가치가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면 그걸 화폐로 쓸 수 있겠냐?"
박태식은 마시던 맥주 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진짜 그것뿐이야?"
"뭐가?"
"아니, 그런 이유만으로는 지금처럼 가격이 오른다고 끙끙대는 게 이해가 안 돼서. 가격이 오르면 오른 가치로 쓰면 그만이잖아? 문제 될 게 있어?"
맞는 말이다. 당장 화폐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금도 시세가 매일 출렁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도토리 코인 가격을 억누르려는 진짜 이유.
그건 바로,
"나중에 찾아올 폭락 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2018년 상반기에 3000만 원까지 치솟았던 비트코인은 순식간에 폭락, 이후에도 약세를 면치 못하며 400만 원까지 추락하게 된다.
만약 도토리 코인이 같은 길을 걷게 된다면 WHTS컴퍼니는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우리가 어떤 경고를 했든 간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거야. 회사 이미지가 시궁창에 박히는 건 확정이고, 소송, 스토킹, 테러, 살해 협박도 들어오겠지."
"에이, 설마..."
"설마가 아니야. 특히 언론에 얼굴이 자주 노출됐던 네가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거다."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아는지 박태식도 마른 침을 꼴딱 삼킨다.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해 보려고 도토리 코인의 가격을 9달러로 유지하면서 이자로 운영할 계획을 세웠던 거야."
"성공했다면 확실히 평가는 좋았겠네."
"맞아. 성공했다면 말이지."
수백 배 폭등과 폭락을 거듭한 시장에서 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코인.
투자 상품의 매력은 못 느낄 수 있겠지만 디지털 '화폐'로선 확실한 포지션을 잡았을 거다.
"하지만 그 계획이 물 건너갔으니 이젠 플랜 B로 방향을 틀어야지."
"플랜 B? 그런 게 있었어?"
"의도치 않게 도토리 코인 가격이 왕창 올라버렸잖아. 그러니 이젠 오른 가격을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없지."
* * *
소프트포우의 투자 소식으로 시작된 가상화폐 시장의 급등세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9일째가 되던 날.
이번 사태의 중심에 있던 WHTS컴퍼니 대표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을 열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WHTS컴퍼니의 대표 대니얼 신입니다. 제가 기자회견을 요청한 이유는 현 가상화폐 시장이 지나치게 과열돼 있음을...
기자회견은 약 10분가량의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됐다.
발언 대부분이 가상화폐 투자를 경고하는 내용이었으며, 여기엔 도토리 코인의 가격을 정상화하겠다는 계획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이... 저 새끼 뭐야? 어디서 붙어먹다 나온 새낀데 주둥이를 나불거려?"
기자회견을 TV로 지켜보던 중년 여인의 입에서 온갖 욕이 쏟아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기자회견은 한껏 달아오른 가상화폐 판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 근본 없는 조동아리 때문에 시세가 10%나 떨어졌잖아!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왜 회견을 하고 지랄이냐고!"
최명자는 욕을 퍼붓고도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옆에서 같이 방송을 보던 사내에게 화살을 돌린다.
"이봐! 나 프로!"
사내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인다. 그는 가상화폐 거래소 비트힛의 대표였던 나민성이었다.
"예, 말씀하시죠."
"저놈이 뭐라고 한 거야? 쓸데없는 소릴 하도 많이 지껄여서 말을 못 알아먹겠네. 나 프로가 요약 좀 해봐."
"별 내용은 없습니다. 앞으로 도토리 코인이 주던 이자를 15.9%까지 올린다는 것과 가격을 정상화하겠다는 게 전붑니다."
"정상화가 뭔데?"
"원래 도토리 코인 시세가 9달러였으니까 거기까지 내리겠다는 뜻 아닐까요?"
9달러까지 내린다는 말에 최명자의 눈이 홱 돌아간다.
"염병하네. 다 팔아. 빨리 도토리 가진 거 다 팔아버려!"
"도토리는 이미 회견 직후에 20%나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 손해 보고 파실 게 아니라 상황을 조금만 지켜보시죠."
"더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 새끼가 9달러까지 내린다잖아!"
"이율을 15.9%까지 올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심하게 폭락하진 않을 겁니다."
설명을 상세하게 해줬음에도 최명자는 막무가내로 소릴 꽥꽥 질러댄다. 그걸 보고 나민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저런 막돼먹은 인간이 대통령을 뒤에서 부리는 실세라니. 이 나라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게 신기하다니까.'
그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최명자가 다시 소릴 지른다.
"나 프로! 아직이야? 내가 빨리 팔라고 했지?"
"거의 다 됐습니다. 주문이 체결되는 동안 시간이 필요해서 5분 정도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짜증이야, 진짜."
그녀는 한참을 툴툴거리다가 다시 TV 화면을 돌아본다.
"그런데 쟤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도토리 코인을 만든 회사 대표랍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내리니 마니 해도 되는 거야? 주식은 그렇게 안 되잖아."
"가상화폐는 법적인 규제가 없어서 업체 마음대로 운영해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데이터 쪼가리 발행해서 돈 벌고, 마음대로 가격도 조정하고, 세상 참 편하게 사는 놈들이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민성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슬며시 운을 띄운다.
"맞습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게 코인의 장점이죠. 그러니... 사모님께서 하나 직접 만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만들 수도 있는 거야?"
"기술적인 부분만 제가 채워드리면 나머진 일사천리입니다."
최명자는 솔깃했는지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걸 본 나민성은 이때다 싶어서 혹할 말을 줄줄이 읊어댄다.
"코인에서 중요한 건 투자자 모집입니다. 그러니 사모님의 인맥과 권력이라면 조 단위의 돈을 끌어모으는 것도 가능합니다."
"조 단위?"
"생각하시는 조가 맞습니다. 1조 원, 2조 원 할 때 조입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두 눈에서 불빛이 반짝거린다.
"어떻게? 빨리 말해봐. 빨리."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사모님이 발행한 가상화폐를 밀어주면 됩니다."
"그게... 쉬울까?"
"가상화폐에다가 창조경제나 4차 산업혁명 같은 그럴싸한 말만 붙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진의를 알아보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국가적인 지원으로 키운 가상화폐.
만약, 이것이 성공만 한다면 그 규모와 파급력은 비트코인을 뛰어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