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
와츠의 일본 진출을 앞두고 직원들이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동안, 대표인 나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공을 들인 아이템은 단연 한일 양국 간에 진행하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똑똑.
때마침 이번 아이템을 진두지휘할 담당자가 도착했다.
"들어오세요."
대표실 문을 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사내가 들어온다. 얼마 전 도토리 콘서트의 기획을 담당한 심종모 PD였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아, 오늘은 일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할 사람? 누굽니까?"
심종모가 문밖으로 손짓하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대표실로 들어온 여자아이들은 총 12명이었다.
하나 같이 밝게 인사를 하며 들어왔으나, 목소리엔 떨림과 긴장이 묻어 있었다. 몇몇은 아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심 PD님, 이분들은 누구신지?"
"TV플러스에서 제작 중이던 아이돌 육성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입니다. 혹시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간단한 설명 정도는 들었습니다. 화제성이 떨어져서 프로그램을..."
나는 뒷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한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휴... 맞습니다. 1화 촬영까지 마쳤는데 잠정 폐지로 가닥이 잡혔죠. 이 아이들로선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 된 겁니다."
나는 다시 한번 소녀들의 얼굴을 쭉 돌아본다. 모두가 험난한 예선을 뚫고 올라온 정예 멤버라서 그런지, 외모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럼에도 시기를 잘 못 타서 기회조차 얻지 못할 처지라니, 세상이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멤버들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지?"
"이번에 일본 지역과 함께하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 멤버를 같이 넣고 진행하는 겁니다."
12명의 간절한 시선이 느껴진다. 내 한 마디로 자신들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으니, 어찌 절박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대답은 그녀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깨부숴버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이미 화제성을 얻는 데 실패한 아이템을 재활용할 이유가 있습니까? 국내에 널린 게 아이돌 지망생일 텐데요."
"이 아이들의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그리고 기존 촬영분도 있어서 제작 기간이 짧아진다는 장점도 있고요."
이때 울먹거리고 있던 멤버 하나가 불쑥 앞으로 나선다.
"저희 진짜 실력에 자신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
한 명이 나서자 다른 멤버들도 자신감을 얻은 건지, 우르르 나와서 한 마디씩 애원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잠도 줄여가며 필사적으로 연습했어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못 믿으시겠으면 여기서 당장 춤 출수도 있어요. 얘들아, 줄 맞춰봐."
좁은 대표실에서 진짜 춤이라도 출 생각인지 주춤주춤 대열을 맞춰간다.
나는 그녀들을 향해서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춤을 잘 추는 댄서를 뽑고자 하는 게 아니라,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아이돌을 뽑는 겁니다."
"하, 하지만..."
처음 나섰던 멤버가 뭐라 반문하려는 것을 내가 도중에 자르고 들어간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직 무명의 지망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여러분들이 예선 통과자랍시고 등장하면, 그걸 대중이 납득하겠습니까?"
다들 고개를 푹 숙인다. 이젠 울먹이는 게 아니라 아예 펑펑 눈물을 쏟기까지 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었을 거다. 자신들이 해왔던 예선과 촬영, 모든 것은 이미 의미 없는 것이 됐다는 것을.
여기까지 온 이유도 미련이라는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해서겠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할 생각이 있다면 다시 처음부터 예선을 보고 올라오든지, 아니면 대중이 납득할 만한 인지도를 쌓고 오세요. 알겠습니까?"
멤버들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대표실을 떠났다.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라 그런지 어색한 적막이 감돈다. 이제 남은 이는 나와 심종모 PD가 전부다.
탁.
심종모 PD가 구석에 몰래 켜뒀던 캠을 끈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휴... 힘드네요."
"대표님, 연기를 진짜 잘하시던데요? 배우 하셔도 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배우를 하겠습니까."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본래 가냘픈 여자아이들이 단체로 울먹거리면 눈빛이 흔들릴 법도 한데, 대표님은 칼 같이 쳐내시더군요."
그야 최대한 매몰차게 내쳐달라고 부탁을 받았으니, 나는 그것에 맞게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하핫, 어쨌거나 대표님의 열연 덕분에 그림이 더 멋지게 나올 것 같습니다."
"이런 설정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효과가 있죠. 대중이 원하는 건 예쁜 포장지가 아니라 안에 든 스토리입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첫 방송부터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겁니다."
"음..."
심종모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힘겹게 오디션 프로그램 예선을 뚫고 합격 멤버들끼리 의기투합했지만,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사라져버린 상황.
이때 기적처럼 예선부터 뚫고 올라가는 아이돌의 감동 스토리.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의 기획 능력이라면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어쨌거나 심종모는 이미 도토리 콘서트로 실력을 입증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 건은 최대한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맞았다.
* * *
한일 공동 아이돌 오디션의 예선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예선에 동원된 방식은 당연히 와츠의 짧은 영상이다.
참가자가 1분 동안 자유롭게 춤, 노래, 개인기를 찍어서 업로드하면 심사위원들이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방식이었다.
한국 시장은 와츠가 대중화됐기에 큰 문제 없이 예선이 치러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아직 와츠가 출시되지 않은 상황.
이에 우리는 일본 시장에 와츠 베타버전을 한발 빠르게 출시하기로 했다.
"일본 쪽과 연결된 서버부터 점검 부탁드립니다. 앱 다운로드가 시작되면 순간적으로 트래픽이 몰릴 수 있습니다."
"3번 터미널 체크 다시 해주세요!"
"우리 쪽 기기에는 문제없어요! 일본 지사에 연락해서 다시 확인해보라고 하세요!"
출시 당일날이 되자 와츠 개발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비록 베타버전이라도 서비스는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니, 개발팀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점검하고 또 점검을 반복했다.
"대표님! 일본 앱스토어에 와츠 베타앱 올라갔습니다. 이미 다운로드도 가능한 상태랍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공민준 팀장이 내게 달려온다.
나는 반사적으로 벽시계 쪽을 쳐다본다.
현 시각은 10시 30분.
오픈 예정 시간인 12시까지는 1시간 반이 남았다.
"일본 현지 반응은 어떻습니까?"
"와츠 기사나 트윗이 뜨는 족족 우익 성향 네티즌들이 몰려가서 난동을 부리는 터라, 정확한 여론 파악이 어렵습니다."
"아이돌 연습생들이 모인 커뮤니티 쪽을 살피면 되잖습니까."
"그쪽은 제가 쭉 읽어 봤는데 아직은 참여를 주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의외의 결과였다. 이번 와츠 베타버전 런칭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곳이 아이돌 오디션 쪽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습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제 예상엔 앞선 비슷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외국인 참가자를 들러리로 세운 영향인 듯합니다."
곤란하게 됐다. 투표로 한일전을 붙이려면 양측이 대등한 상태로 승부가 이뤄져야 했다. 예를 들면 축구나 야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싸움이라면 관심은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오픈하고 상황을 지켜봅시다."
* * *
야심 차게 출시한 와츠의 일본 베타버전은 첫날부터 다운로드 100만 명을 뚫으며 순항하나 싶었다.
하지만 다운로드 숫자의 절반은 테러를 목적으로 가입한 넷우익이었으니, 덕분에 개발진은 쓰레기 영상을 지우느라 철야 작업을 해야 했다.
의미 없는 영상이나, 태극기를 불태우는 영상을 올리는 놈은 양반이었다. 아예 대놓고 생식기나 혐오 영상을 찍어서 올리는 놈도 비일비재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에도 넷우익의 행패는 계속됐다.
우리가 빠르게 차단처리를 했지만 놈들은 끊임없이 새로 아이디를 가입시켰고, 차단과 재가입의 싸움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 와츠 베타 앱은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신규 가입자 1위와 동시에, 평점 1점이라는 위업을 동시에 달성하게 됐다.
-내가 그 넷우익 개 같은 것들 때문에 탈모가 왔다니까? 절대 가만 안 둬! 어디 두고 봐.
휴대폰 너머에서 박태식의 울분에 찬 절규가 넘어온다.
녀석은 최전방인 일본 지사에서 이번 일을 겪고 있을 테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진정해. 그놈들이랑 싸운다고 열 내면 너만 손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못 참겠어. 이미 변호사도 선임했으니까 전부 신고 때릴 거야. 말리지 마. 나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박태식은 그 뒤에도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욕을 쏟아내기에, 나는 도중에 말을 자르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유효 사용자가 많이 나왔던데? 일반 사용자 영상도 차곡차곡 늘고 있고."
-카메라 효과 팀 덕분에 그나마 선방한 거야. 일본 애들 환장하는 효과는 전부 다 박아줬잖아.
와츠의 카메라 효과 팀은 일본 진출을 앞두고,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와 제휴를 맺고 카메라 효과를 대거 집어넣었다.
밀짚 해적단 스티커, 샤이아인 코스튬과 스카우터 전투력 스티커, 나뭇잎 닌자 인술 스티커 등등.
애니메이션 마니아층이 두꺼운 일본이었기에 반응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선 애니메이션 카메라 효과 때문에 와츠를 설치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할까.
"출시 첫 주에 라이브 사용자 13만 명이면 대박까진 안 돼도 중박은 쳤네."
-내가 그래서 더 안타까운 거야. 넷우익들이 초 치지만 않았어도 일본에서 초대박을 쳤을걸?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냐. 천천히 가입자 늘린다고 생각하고 길게 봐. 그리고 오늘 K팝 아이돌 첫 방송도 있잖아."
-그거... 반응이 시원찮던데.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도토리 콘서트 때는 입만 열면 심종모 PD를 찬양하던 놈이, 이번엔 왜 그리 불안해하냐?"
-그땐 국민적 공감대인 도토리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잘 된 거잖아. 이번은 비호감 수치가 높아도 너무 높아.
사실, 나도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비호감 같은 건 둘째 치더라도, 일본 현지에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의 관심도 자체가 너무 떨어졌다.
'어째서지? 미래엔 분명히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흥행했었을 텐데.'
내가 미래를 안다지만 벌이는 모든 일이 성공할 순 없는 법이다. 반쯤 마음을 내려놓은 채로, K팝 아이돌의 본방송을 기다린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최고의 아이돌 꿈꾼다, K팝 아이돌 스타!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출발은 무난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전형이었다. 기존 촬영분을 재탕한 것이 많았기에, 알던 내용이라 흥미가 더 떨어진다.
하지만 방송 중반부터 심종모 PD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겨울 행인도 없는 거리에서 6시간 동안 콘서트, 나 홀로 사인회, 수산 시장과 노인정 방문 음악회, 홍보용 하프 마라톤 참여, 번지점프 등등.
실패한 아이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여기에 악마의 편집이 더해지고 악역 스폰서까지 등장해서, 보는 사람의 이가 갈릴 정도의 전개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거... 오디션 프로그램 맞아?"
나는 이번 방송이 어떤 파급력을 미칠지 궁금해서 일본 현지의 트윗을 살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된다.
첫 방송에서 비중도 없고 뒤에서 끔찍하게 고생만 하던 멤버 중엔, 일본인 참가자가 무려 3명이나 포함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