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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소프트포우 초청 건을 고사한 이후로, 국내외 언론에서 부정적인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이야 예상했던 반응이라지만 국내 언론 쪽은..."
아침 회의가 한창인 WHTS컴퍼니의 다목적 회의실.
회의 핵심 주제는 와츠와 국내외 언론 동향이었다.
회사 전체로 보면 심각한 일이었으나, 가상화폐 개발팀인 이소영에겐 전혀 관심 밖의 사안이었다.
'아, 배고파라. 회의는 언제 끝나려나.'
딴생각에 몰두하던 그녀의 시선이 회의실의 벽시계에서 멈췄다. 저건 회사 초창기에 이소영이 직접 골라서 달아둔 시계였다.
'이 회의실이 WHTS컴퍼니가 처음으로 얻은 임대 사무실이었구나. 참... 그때 사무실에 있던 거라곤 책상과 전화기, 그리고 컴퓨터 몇 대가 전부였었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처음 회사 사무실에 왔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WHTS컴퍼니가 해외투자사라는 말을 듣고 왔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투자사가 아니라 동아리보다 못한 곳이었다.
'그랬던 회사가 이젠 빌딩 3개 층을 통째로 쓸 만큼 성장했어. 겨우 반년 밖에 안 됐는데.'
이소영은 저도 모르게 히쭉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WHTS컴퍼니가 잘 된 덕분에, 매번 귀국하라고 압박하던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 하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쏠렸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사람.
신우혁 대표.
사람을 홀리는 말발로 청사진을 제시하고 다소 무모해 보이는 자신감과 행동력까지 갖춘 사람이다.
이소영은 그를 만나서, WHTS컴퍼니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다시 미국으로 귀국해서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프로그래머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다.
"저희가 경쟁력이 없어서 소프트포우 측에서 참석 취소를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보도가 국내에 돌고 있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정정 보도를 요청함과 동시에..."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이소영의 시선은 줄곧 신우혁을 향해 있었다.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었기에, 안 보는 척,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면서 흘깃흘깃 그를 관찰한다.
'이건 이성적인 끌림과는 달라.'
그녀는 이것이 위대한 리더에 감화되어 존경, 혹은 경외심을 보내는 것과 흡사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번 관찰 중인 신우혁의 표정이 오늘따라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회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다른 생각에 푹 빠진 것이, 마치 혼자서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 중이신 걸까? 혹시 소프트포우의 초청을 거절한 일로 그러시는 건가?'
WHTS컴퍼니가 소프트포우의 초청을 거절한 이유는 외부 투자 없이도 충분하다는 일종의 자신감 표명이었다.
어쨌거나 외부 자본이 들어오면 회사의 운영 방식부터 직원의 처우, 장기적인 계획, 그 외에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이 들어오게 될 테니까.
'이번 결정이 직원들을 걱정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범고래급 투자사인 소프트포우의 돈을 마다한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있었기에 존재하는 회사다. 모든 결정에는 직원이 아니라 그가 중심이 되어야 했다.
"오전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필요하다면 오후에 다시 진행하겠습니다."
이소영은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앞서 나가는 신우혁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본다.
"소영 씨, 무슨 할 말이라도?"
이소영은 당황하지 않으려고 평소처럼 최대한 방긋 웃으며 입을 뗀다.
"회의하는 내내 대표님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혹시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딱히 없습니다."
"없는 분이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계셨던 거예요?"
"제가 어땠길래요?"
이소영은 자신의 두 눈썹을 치켜들어서 방금 신우혁의 표정을 흉내 낸다.
"이렇게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로 앉아 계셨잖아요. 그래서 회의하는 내내 아무도 대표님께 말을 못 걸었다니까요."
"풉."
그의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여기까지만 오면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빨리 말해봐요. 혹시 소프트포우 투자 건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냥 투자받으세요. 아직 안 늦었잖아요. 직원들은 보너스 챙겨주면 괜찮을 거예요."
"진짜 그런 거 아닙니다."
"자꾸 그러기에요? 저더러 혼자 속에 담아두지 말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어요!"
이소영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을 눈빛에 실어서 보냈다.
다행히 그런 텔레파시가 전해진 건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얕게 숨을 토해낸다.
"제 개인적인 일인데, 소영 씨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서울 변두리 쪽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번쩍번쩍한 유흥가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구역이 나온다.
내가 차를 세운 곳은 유흥가 근처에 있는 모텔촌 앞이다.
끼익.
주차장 입구부터 블라인드가 처져 있어서 은밀한 분위기가 풍긴다.
내가 차를 안쪽으로 몰고 들어가려 하자 조수석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쏟아진다.
"대표님,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모텔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몰래 들어가야 하니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해주셔야 합니다."
"예? 예? 예?"
이소영은 당황한 건지 대답을 세 번이나 연달아서 내뱉는다.
"도와달라더니 갑자기 이런 곳이라뇨."
"놀랐습니까?"
"당연하죠! 한국의 모텔은 그... 그렇고 그런 곳이라고 들었는데, 여긴 마음의... 아무튼, 저는, 저, 저는 이런 곳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조금 놀릴 생각으로 아무 말 없이 데려왔는데, 여기서 더 놀렸다간 울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얼른 진짜 이유를 꺼냈다.
"여기서 저희 어머니가 일하십니다."
"예?"
이번은 대답이 한 번만 나왔다. 대신 입이 쩍 벌어져서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이 됐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 추측으론 여기서 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모텔 운영이면 많이 힘드시겠어요."
"운영이 아니라 청소 일을 하십니다."
이소영의 대답은 없었으나 눈빛만으로도 의미가 전달된다. 돈 많은 자식이 있는데 어째서 어머니가 고생스러운 일을 하냐는 뜻이었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쉬셔하는 데, 저도 왜 자꾸 모텔에 나와서 일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 그래서 직접 모텔까지 찾아오신 거네요. 집에 모셔 가시려고요."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집에 모셔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 봤자 백이면 백, 또 몰래 모텔로 출근하실 분입니다."
"그럼 어쩌시려고요?"
"돈이 있어도 출근해야만 하는 이유. 그걸 알아내는 게 목적입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온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위장하고 차를 나섰다.
모텔 방문객 중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많았기에, 이런 차림이라도 크게 의심받진 않을 거다.
"지금 시간대면 딱 객실 청소를 다닐 때입니다. 꼭대기 층부터 확인하면서 내려오도록 하죠."
우리가 탄 승강기가 6층에서 멈춘다.
승강기 문이 열리는 순간, 입구에 웬 사내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인다.
'누구더라?'
뒤늦게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모텔 주인이었다.
"손님, 어디 가십니까? 6층은 공사 중입니다."
"방을 찾고 있는데... 카운터가 비어 있어서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올라오셨나 보네요. 혹시 자고 가십니까? 아니면 대실?"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자 모텔 주인은 다 안다는 듯, 흠흠 거리며 헛기침 소릴 낸다.
"하핫. 원래 대실만 하려다가 자고 가는 법이지요. 마침 두 분이 쓰기 딱 좋은 방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모텔 주인은 우리를 5층의 안쪽 방으로 안내해줬다.
방은 입구의 조명부터 핑크빛이었다. 그리고 안쪽 침대도 핑크빛 하트, 천장에 걸린 유리도 하트, 심지어 욕조까지 하트 모양이었다.
"..."
우린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조명 때문인지 이소영의 얼굴이 홍조가 띤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뭔 일이 생기기 전에, 빨리 섹스하라고 외치는 듯한 이 핑크빛 조명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삑.
조명을 하얀색으로 바꾸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하트 침대와 하트 거울, 하트 욕조는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조명 하나 바꾼 것으로 분위기가 훨씬 건전한 느낌이 든다.
이소영도 가만히 있으려니 어색했는지, 일어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조용하니까 좀 그러네요. TV라도 틀어둘까요?"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앗. 찾았다."
리모컨을 쥐려는 이소영의 손을 내가 붙잡는다.
"헛!"
깜짝 놀란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소영 씨, 여기서 TV 틀면 큰일 납니다."
"어째서죠?"
"알고 싶습니까?"
이소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나 싶더니 리모컨에 달린 빨간 버튼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빨간 버튼엔 [성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 켜는 게 낫겠죠?"
그녀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격렬하게 고갤 끄덕거린다.
그 뒤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잠시 쉬고 있던 차에,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김 씨 아줌마. 이 시간까지 정리 안 끝내고 뭐 했어요?"
방금 우리를 안내해줬던 모텔 주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의 대화 상대는 어머니였다.
"오늘은 치울 방이 많아서 오래 걸렸어요."
"할 일이 많으면 눈치껏 빨리빨리 좀 하시지.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어쩌려나 몰라."
"미안해요."
"맨날 미안하다고 하면 다 끝나요?"
"진짜 미안해요. 앞으로 빨리 끝낼게요."
"하... 참. 그만두고 나간 사람이 하도 사정사정해서 다시 받아 줬더니, 이젠 자기 멋대로 구만."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서 모텔 사장 앞으로 다가간다.
"말 다 했습니까?"
놀란 모텔 사장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그러다 뒤늦게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팔짱을 끼고서 콧방귀를 낀다.
"김 씨 아줌마 아들? 맞지?"
"그래서요?"
"하, 이 새낀 뭐 백수야? 또 대낮부터 와서 지랄이네."
욕을 듣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옆에서 이소영이 붙잡지 않았으면 모텔 주인 놈의 면상을 후려갈겼을 거다.
"혁아,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뒤늦게 어머니가 나를 보고 다가오신다.
원래 계획은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어머니를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이딴 곳에서 있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
"집에 가요."
"아, 아니. 잠깐만. 나는..."
"빨리 가요! 여기서 뭐 하러 푸대접을 받고 일하시는 거예요? 대체 이유가 뭐냐고요!"
어머니는 말없이 고갤 푹 숙이셨다.
왜 이렇게 미련하신지, 왜 이렇게 답답하신지, 이유라도 알면 좋으련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모텔 사장은 뒤에서 쌍욕을 해댄다.
"야이 새끼야! 내가 너희 쌍것들 다 신고할 거야! 영업 방해죄, 계약 불이행, 손해 배상, 뭐든 다 엮어서 인생 종 치게 해줄 테니까 각오해! 알겠어?"
* * *
어머니는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동안, 단 한 번에 입을 열지 않으셨다.
다시 모텔로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놓긴 했는데, 이미 전적이 있다 보니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지금껏 불편하게 동행했던 이소영이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대표님, 어제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요. 모텔에 불을 지르든 어쩌든 해서, 아예 못 가게 만들어야죠."
"예?"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다는 겁니다."
이소영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이어간다.
"혹시 어머니께서 언제부터 이 청소일을 하셨었나요?"
"모텔 일을 하기 전엔 작은 호텔에서 일하셨으니까, 못해도 20년 가까이 하셨을 겁니다."
"평생 청소 일만 하셨으면 일을 쉬는 쪽이 더 힘드셨던 게 아닐까요?"
어쩌면 저 말이 정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선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지만 말이다.
"차라리 어머님의 다른 근무처를 알아봐 주시는 건 어떤가요?"
"다른 곳의 처우가 여기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잘 찾아보면 어딘가엔 믿을 만한 고용주가 있지 않을까요?"
믿을 만한 고용주?
저 말을 듣자마자 아이디어가 딱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고용주는 가족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유일한 가족인 내가 고용주가 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까의 모텔 주인 놈이 펄쩍펄쩍 뛸만한 선물도 같이 주면 더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