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
삐빅. 삐빅. 삐빅.
요란한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깬다.
시간은 7시 30분.
매번 6시 전에 일어나던 습관이 반년도 안 돼서 1시간 반이나 늦춰졌다.
그나마 알람이라도 맞춰둬서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거지, 그게 아니면 10시가 넘도록 자고 있었을 거다.
"으음..."
멍한 상태로 커피부터 한 잔 마신다. 어제 잠을 늦게 자서 그런지 오늘은 유독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서 부스스한 내 얼굴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한참이나 상대를 쳐다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쁜가?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아무래도 기쁘진 않나 보다.
슬픈가?
그것 역시 아니다.
죄책감은?
잘 모르겠다. 아마... 없는 것 같다. 조금은 달라진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언제나처럼 맞이하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8시 반이 넘어서야 오피스텔을 나서서 느긋하게 회사로 향한다.
KN케미컬에 명시된 근무 시간은 9시부터지만 다들 8시 전에 출근한다. 빨리 온다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데없는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죽이는 거다.
나도 예전엔 그들과 같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위에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승진을 바라지도 않는다.
"어머, 어머, 아침에 뉴스 보셨어요? 중견기업에 근무하던 임원이 부하 직원에게 살해당했대요."
커피를 한 잔 더 마시려고 탕비실로 가다가 직원들의 수다 떠는소리를 듣게 됐다.
엿듣고 싶진 않았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안 들을 수가 없을 정도다.
"저도 봤어요.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고 하던가."
"잔인해라. 어떤 원한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제가 본 뉴스에선 아직 살아 있다고 하던데요? 심각한 수준의 전신화상이라고..."
"전신화상이면 살기 힘들다고 봐야죠."
그때 유독 목소리가 큰 여인 하나가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그 중견기업의 이니셜이 용인에 있는 K사라고 보도되던데, 혹시 우리 회사는 아니죠?"
"아마 맞을 거예요. 아침부터 기자가 몇 명이나 왔더라고요."
"어머나 세상에."
"소문으론 피해자가 박 전무님이라는 말이 있어요."
"범인은 누굴까요? 박 전무님과 같이 일하는 부하 직원이라고 해봐야 통합관리부 소속의..."
거기까지 대화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끊긴다.
탕비실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란 모양이다.
"왜들 그리 놀라십니까?"
박민교와 같이 일하던 부하 직원.
한 명은 한 달 전에 실종된 백승태였고, 다른 한 명은 나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머신까지 걸어가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뽑았다.
위이이이잉-.
커피머신이 커피를 추출하는 동안, 탕비실에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다.
호록.
나는 방금 추출된 커피를 한 모금 맛보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방금 포털에 속보 떴는데, 도주 중인 범인은 50대 백 모 씨랍니다."
그제야 내게 쏟아지던 불안의 시선들이 살짝 누그러진다. 어디까지나 누그러졌다는 거지 여전히 좋은 반응은 아니다.
그때, 평소 업무적으로 가깝게 지내던 경리부 직원이 물어온다.
"저기... 신 과장님은 뭔가 알고 계신 건가요?"
"뭘 말입니까?"
"이번 사건요. 박 전무님과 백 부장님, 두 분과 가까우셨잖아요. 같은 부서 소속이기도 하고요."
방금까지 경계하던 눈빛들이 호기심으로 바뀌어 쏟아진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방에서 실망한 듯한 반응이 쏟아진다. 이 사람들은 내게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걸까?
내가 뽑은 커피를 들고 탕비실을 떠나기도 전에, 멈췄던 재잘거림이 다시 이어진다.
"사장님은 계속 투병 중이시고, 사실상 회사를 이끌던 전무님도 그렇게 되셨으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유학 가신 사장님 아들이 돌아오려나요."
"경영 같이 머리 아픈 일은 윗분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죠."
"맞아요. 우린 월급만 잘 나오면 그만이죠. 그러니 모르는 척하고, 일만 열심히 하자고요."
저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번 사건으로 전수조사를 하다 보면 곳간이 텅 빈 걸 알게 될 텐데, 그 돈이 자그마치 1800억이다.
일부라도 회수가 되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KN케미컬은 파산 확정이었다.
'내 가상화폐 계좌에 있는 돈을 돌려주면 호흡기는 붙일 수 있겠지만, 내게 그럴 이유가 있을까?'
나는 이 회사를 증오했다. 누명을 씌운 박민교와 백승태는 물론이고 일반 직원들까지 전부 증오했다.
이유 없는 증오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구속됐을 때, 어머니는 나를 대신해서 회사 전 직원에게 증언을 서달라며 부탁하고 다니셨다.
하지만 재판 당일까지도 증인으로 나와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결과, 백승태는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KN케미컬은 횡령금을 회수하지 못해 파산하게 된다.
'이것이 너희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해라.'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에 접어들자, 본격적으로 어제 사건의 속보가 쏟아졌다.
초창기엔 용인의 K사같이 이니셜로 나오던 업체명은 정확히 KN케미컬로 공개됐고, 피해자의 이름, 나이, 직급까지 줄줄이 뉴스를 탔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범죄 사건처럼 여겨졌지만, 이어서 공개된 음성파일 하나가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게 된다.
-집에 숨어있던 백승태 마누라와 딸을 잡았습니다. 이젠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긴. 손가락을 자르든, 눈깔을 뽑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백승태 위치를 알아내.
-알겠습니다.
-너희도 들었지? 손가락과 눈깔. 어느 쪽으로 할래?
-저희는 그이가 어디 있는지 진짜 몰라요! 아침에 전화 한 번 받은 게 끝이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여기서 눈깔을 뽑으면 차 시트가 더러워지니까 손가락부터 하자. 비닐봉다리랑 과도 하나 가져와.
-살려주세요! 꺅! 제발! 제발!
음성파일이 공개된 이후부터 사건은 조직폭력배가 연루된 강력 사건으로 분류됐으며, 서울지방경찰청이 직접 수사에 나서게 된다.
"신우혁 씨 맞으십니까."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경찰관 하나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서울지방경찰청의 이한석 수사관이라고 합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무실에 경찰이 찾아오니 주변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다.
"제가 어떤 협조를 하면 되는 겁니까?"
"박민교 씨와 백승태 씨 사이에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먼저 일어나며 손짓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일단 따라오시죠."
나는 경찰들을 옥상의 흡연장으로 안내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지만 내가 의자와 책상도 가져다 두고, 가림막도 쳐둬서 그나마 있을 만한 곳이 돼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수사관이 물어온다.
"신우혁 씨는 굉장히 침착하시군요. 보통 저희가 찾아오면 당황하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죠."
"그야, 뉴스를 미리 봤으니까요."
"뉴스를 보고 저희가 찾아올 줄 아셨단 말입니까?"
"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더군요."
수사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아예 뒤에 서 있던 경찰관은 녹음기까지 켰다.
"혹시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같은 회사에서 같은 부서로 일하면서 전조 증상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죠."
"주로 어떤...?"
"횡령입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수백억이 넘는 회삿돈이 그들에 의해 빠져나갔을 겁니다."
나는 두 사람의 의심쩍은 행동들을 하나씩 털어놓는다.
차명으로 땅을 사거나, 금괴를 대량으로 매입하고, 미술품을 사 모으는 등, 누가 보더라도 돈세탁의 냄새가 나는 행위였다.
그러다 이야기 막바지쯤에, 미리 준비해뒀던 USB를 꺼내서 그에게 내민다.
"지금껏 제가 수집한 증거가 이 안에 있습니다."
"증거까지 모으셨다니, 철저하시군요."
"그들과 공범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만, 그래도 범죄 사실을 미리 인지하셨다면 신고를 하셨어야죠. 그랬다면 이번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저는 공익보다 제 목숨이 더 소중해서요."
그 말을 듣자마자 조사관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니 이번 정보 제공도 전부 익명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 * *
내가 박민교의 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백승태가 횡령금을 싹 털어가고 별장에 불을 지른 뒤였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백승태가 돈을 들고 도망갔으니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아닌가.
나는 해결사들을 돌려보낸 뒤 홀로 박민교를 기다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온 동해보복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다.
나를 죽인 박민교에겐 죽음을, 횡령 누명을 씌운 백승태에겐 살인 누명을.
* * *
옥상에서 조사관과 이야기를 마친 뒤, 내 자리로 돌아왔더니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평소에 얼굴 보기 힘든 부사장과 임원들, 그리고 총무팀까지 총출동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입을 열자, 임원 하나가 대뜸 목소릴 높인다.
"자네, 방금 그 경찰한테 무슨 소릴 하고 왔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온 건 아니지?"
"쓸데없는 이야기라뇨?"
"그러니까 우리 회사에 이미지라는 게 있잖는가.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단 소리지."
지금까진 나름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풉."
당연히 상대는 발끈해서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금이 웃을 땐가!"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웃긴 상황이라... 웃음이 안 멈추네요."
세상에 곳간이 다 털려서 망하기 직전인 회사가, 도둑부터 잡는 게 아니라 체면부터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 일인가.
그러던 도중, 직원 하나가 허겁지겁 부사장에게 달려온다.
"부, 부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방금 뜬 뉴스를 보십시오!"
"무슨 뉴슨데 그래?"
"이번 사건이 저희 회사의 횡령금을 놓고 다투다가 발생했다는 뉴스입니다."
깜짝 놀란 부사장은 물론이고 임원들까지 휴대폰 화면을 쳐다본다.
"우리 회사에서 횡령이라니? 이거 기사 잘못 나간 거 아냐?"
"기자가 오보를 냈나 봅니다."
"제대로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전 직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태 파악에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박민교가 장부를 조작해뒀다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횡령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여긴 앞으로 더 시끄러워지겠지.'
나는 내 자리에 앉아서 두 가지 서류를 뚝딱 만들어서 출력했다.
한 장은 병가 신청서.
다른 한 장은 사직서.
박민교가 사라진 이상, 내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진 과거를 청산하는 데 집중했다면, 내일부터는 내 새로운 미래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