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52화 (52/174)

< 52 >

백승태는 눈앞이 깜깜하다는 말을 절감했다.

집은 불에 홀랑 타서 재만 남았고, 가족들은 생사조차 모르는 데다가, 뒤에는 박민교가 보낸 똘마니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일단은 집에서 최대한 멀어지기로 했다.

도로가 아니라 아파트 뒤로 이어진 산을 탔다. 일부러 등산로가 아니라 길이 없는 수풀로 무작정 이동했다.

"헉... 헉..."

도중에 길을 잃어서 거의 서너 시간을 넘게 걸은 것 같다.

간신히 산을 빠져나온 뒤에는 인근 지하철역을 찾는다. 역에는 항상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으니 그걸 쓸 생각이었다.

철컥.

다행스럽게도 지하철역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백승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딸아이의 전화번호였다.

통화 연결음이 가는 동안 머릿속에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화재에 휘말려서 다치진 않았을까. 아니면 박민교가 살해한 뒤에 불을 질렀다면? 설마 그랬을까. 그놈이라면 그랬을지도.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초조하게 통화음을 기다리길 20초 정도 지났을 무렵.

-여보세요.

딸의 목소릴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예은아 아빠다."

-아빠? 어... 잠깐만. 엄마 바꿔 줄게. 엄마. 아빠래. 빨리 받아봐. 빨리. 빨리.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성난 황소 같은 목소리가 돌아온다.

-이 웬수야. 어디서 처박혀 있다가 이제 전활 하는 거야? 어디 간다면 간다, 이야기라도 하고 가야 할 것 아냐!

"여보, 잠시만 진정해봐."

-진정?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우리가 당신 때문에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나 해? 집에는 계속 깡패 같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당신을 찾고, 밤만 되면 이상한 전화가 계속 오고...

이후에 잠시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본격적인 대성통곡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사를 네 번이나 했는데, 그랬는데, 우리가 전에 살던 집에 불이 났어. 아직 짐도 다 안 뺀 집에 불이 났다고! 너무 무서워.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당신이 제발 어떻게 좀 해봐.

"그럼... 우리 해외로 나가서 살까?"

-해외에 나가면 그 사람들이 못 쫓아올 거 같아?

무조건 쫓아 올거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공안에게 쫓기지 않았던가.

그러니 해외에 나가서도 지금처럼 숨어서 사는 수밖에 없으리라.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녀서 이런 거지?

"내가 미안해."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사람한테 가서 싹싹 빌어. 잘못했다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박민교는 빌어봤자 용서해줄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 사과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내가... 해결해 볼 게. 그러니까 누가 오더라도...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있어. 알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여보? 여보?

백승태는 통화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

그는 공중전화에 머리를 기댄 채, 눈물을 흘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 *

-치직... 타겟A가 머물던 창고에서 다수의 차량 움직임이 포착됨.

-차들의 방향은 남쪽.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

-도청 결과가 나왔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구다. 그곳에 있는 타겟B 가족의 신병 확보를 위해 움직이는 중.

내가 추가로 고용한 해결사들이 각지에서 정보를 보내준다.

여기서 다른 정보는 곁다리였고, 핵심은 박민교의 실시간 위치와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였다.

운전석에 앉아서 같이 정보를 듣고 있던 석훈이 입을 뗀다.

"상대는 백승태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위치를 알아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경찰을 불러서 최대한 방해해주세요. 백승태가 계속 도망 다녀야 우리가 움직이기 편해집니다."

"알겠습니다."

석훈이 전용 수신기로 지시를 내리고 있던 차에, 통신기에서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고에서 나온 차가 한 대 더 있음. 개조된 냉동 탑차로 보이며, 차 번호 88도 1661. 조회 바람.

-대포 차량입니다.

-탑승자는 성인 남성 한 명. 타겟A일 가능성이 있음.

여기서 타겟A는 박민교를 뜻했다. 놈이 경호원도 없이 홀로 움직이는 이유가 뭘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답은 바로 나왔으니까.

'십중팔구 달러나 금괴로 바꿔둔 횡령금을 찾으러 가는 거겠지. 사람을 못 믿으니 혼자 가는 거고.'

다른 차가 아니라 냉동 탑차를 끌고 움직인다는 점도 확신을 더 해줬다.

운 좋게도 박민교의 이동 방향이 우리가 있는 북부 지역이었기에, 목적지만 미리 알아낸다면 먼저 도착할 수 있어 보였다.

"박민교 차를 확보할 수 있습니까?"

"그가 타고 있는 탑차를 말씀하시는지."

"아뇨. 평소에 타고 다니던 법인차요. 거기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를 확인해보면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요?"

석훈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잠시 후, 기다리고 있던 네비게이션 목적지가 메일로 도착했다.

회사, 골프장, 집, 회사, 골프장, 술집, 집, 골프장, 호텔...

네비게이션 목적지는 골프장과 술집, 호텔 밖에 없었다. 가끔 김포 공항이 찍혀있긴 했지만 그것도 골프를 치러 제주도나 동남아를 간 것 같다.

그러다 딱 한 곳의 동 떨어진 목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파주?"

"파주?"

리스트를 보던 우리는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침 박민교가 향하는 고속도로의 이름이 평택파주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이미 석훈은 지도 앱을 켜서 그 근처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논밭밖에 없는 허허벌판이다.

우린 동시에 서로의 눈을 마주친다.

"제대로 찾은 것 같군요."

* * *

박민교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고속도로였는데, 한참 전부터 앞에서 사고라도 났는지 좀처럼 차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앞에서 뭘 하고 자빠졌어? 사고가 났으면 빨리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이런... 염병."

답답한 마음에 라디오를 켰다. 마침 고속도로 정체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택파주고속도로를 운행 중이던 25t 탱크로리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으나, 탱크로리에 적재된 액화질소가 폭발할 것을 우려해 교통을 전면 통제 중에 있으며...

일 년에 몇 차례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사고가 딱 오늘 발생할 줄이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망할... 이게 다 삼재 때문이야. 삼재."

마음 같아서는 차를 버리고 걸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별장까지 몸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실어 나를 차가 같이 필요했기에 도로가 뚫리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차가 거북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고 지역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진 정확히 1시간 40분이 걸렸다.

그래도 도로가 뚫렸으니 이젠 목적지인 파주 별장까지는 30분이면 도착이었다.

그가 다시 속력을 좀 내나 싶던 차에, 터널에서부터 다시 차가 줄줄이 밀리기 시작한다.

빵! 빵빵! 빵!

빠아아아아앙!

터널 중간 지점쯤에서 차 2대가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접촉사고가 난 듯했다.

접촉사고면 사진만 찍고 갈 것이지, 운전자들끼리 싸움이 나서는 경찰까지 출동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나마 이번엔 경찰이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줬기에, 10분 만에 다시 도로가 뚫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또 뭐냐고!"

탱크로리 화재, 터널 접촉사고, 이번엔 덤프트럭이 옆으로 넘어져서 도로 한쪽 차선이 아예 막혀버렸다.

이쯤 되자 박민교도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에 하나만 겪어도 황당할 사고가 연달에 세 번이나 났다면?

'뭔가 이상해. 아무리 삼재라고 해도 이런 사고가 줄줄이 생기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는 갓길로 차를 빼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도중에 앞을 막는 차는 클락션을 연달아 울려서 쫓아냈고, 장애물이 있으면 차가 찌그러지든 말든 뚫고 갔다.

"빨리. 빨리. 빨리. 비켜!"

별장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커진다.

너무 늦게 도착했다. 아니, 너무 늦게 도착하도록 만들었다?

만약,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든 거라면 별장은 이미...

"아니야, 그럴 일은 없어."

억지로 불안함 마음을 털어내고 가속페달을 더 깊게 밟는다.

그러다 별장 쪽 하늘에 붉은빛이 맴도는 걸 발견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타닥. 타닥...

별장이 불타고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내 돈! 내 돈! 내 돈!"

박민교는 광인처럼 불난 별장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진입 시도는 입구에서 현장 지휘 중인 소방관에 의해서 저지되고 만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놔 이 새끼야! 들어갈 거야! 아니면 빨리 불을 끄던가! 뭐 하고 있어? 꺼! 끄라고!"

그가 소방관들에게 악다구니를 써보지만 소용없다는 건 박민교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치익.

터덜터덜 뒤로 물러난 박민교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담뱃불을 붙인다.

그제야 머리가 멀쩡히 사고를 할 수 있게 됐고, 흥분했던 몸뚱이도 평소처럼 안정을 되찾는다.

'어차피 지상엔 그림 몇 개가 걸려 있는 게 전부잖아. 현금과 금괴는 전부 별장 지하에 넣어뒀으니까 불만 끄면 살릴 수 있어.'

초조하게 계속 불을 보고 있었더니 요의가 찾아온다. 지금껏 몇 시간을 차에서 갇혀 지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화장실이 있을 리 없으니 적당한 수풀에서 일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수풀 쪽으로 걸어가던 차에, 난데없이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린다.

부아아아앙-!

소리가 들린 곳은 뒤쪽.

오토바이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박민교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피하기엔 오토바이가 달려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퍽!

눈앞이 번쩍이며 몸이 붕 뜬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쏟아진다.

바로 이어서 땅에 떨어질 때 두 번째 충격이 머리를 울린다.

쿵.

흐릿한 시야 너머로 헬멧을 쓴 오토바이 운전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인다.

"으, 으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박민교는 도와 달라는 뜻으로 힘을 짜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토바이 운전자는 도와주긴커녕 그의 손을 발로 짓밟아 버린다.

"끄으으으윽!"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박민교의 하반신으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진다.

처음엔 물인줄 알았지만 풍겨오는 냄새가 달랐다.

이건 휘발유 냄새였다.

"안 돼!"

박민교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그가 다음으로 한 일은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비는 것이었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박민교가 살아생전에 이토록 처절하게 빌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필사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치익.

라이터 불을 보는 순간, 박민교의 눈앞에서 주마등이 펼쳐졌다.

기억도 흐릿한 코흘리개 시절 기억에서부터 학창 시절, 결혼식, 두 번의 이혼, 그리고 별장의 화재.

마지막으로 슬로모션처럼 날아오는 라이터까지.

화르르릇.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떠나는 오토바이가 보인다.

박민교의 주마등은 그 뒷모습에 검은 커튼이 내려오며 끝을 맞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