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
깊은 새벽 시간대의 새카만 바다 위.
코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조명도 없이 운행 중인 고기잡이배가 있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운행하는 배라면 필시 어딘가 구린 곳이 있는 법이다. 실제로 이 웨이하이에서 출발한 고깃배에는 밀수품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짝퉁 명품, 담배, 약품, 개중엔 수입이 금지된 희귀 동물도 있었는데, 그 동물 우리 옆에 쪼그려 있는 사내 역시 밀수품의 범주에 들어갔다.
"웁... 우웁!"
백승태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뱃멀미로 울렁거리는데, 물고기 썩은 냄새와 동물 누린내까지 더해지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꽉 물고서 견뎌냈다. 지금껏 겪어온 고생을 생각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조금만 더 참자. 곧 한국에 갈 수 있어.'
백승태의 행색은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중국 선전에서부터 웨이하이까지, 장장 2000km나 되는 거리를 거슬러 왔으니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리라.
물론 정상적인 비행기나 기차를 탔으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공안까지 그를 쫓고 있었기에 택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끼익.
서해를 떠돌던 고깃배는 오래된 어촌에 정박했다.
뱃사람들은 배가 멈춤과 동시에 분주히 밀수품을 실어 나른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그러는 동안 누구도 백승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진짜 자신이 짐짝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눈치껏 배에서 내리려던 차에, 선장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쪽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쇼."
"한국에 도착한 거 아닙니까?"
"맞긴 한데,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기다리란 말이오."
밀항에 절차가 있다고? 이게 뭔 개소리란 말인가.
백승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어서 선장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다른 곳으론 가지도 않고, 계속 배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마치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백승태는 성큼성큼 배의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멀미 때문에 도저히 여긴 못 있겠습니다. 일단 내립시다."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그러네."
"혹시 저 사람들을 기다린 겁니까?"
선장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백승태는 품에서 스프레이를 꺼낸다.
치이이익!
상대의 눈에 스프레이가 명중했다. 이건 일반 호신용 스프레이가 아니라, 야생 곰을 제압할 때 쓰는 베어스프레이였다.
"끄아아악! 뭐야, 씨팔!"
짝퉁 시장에서 사온 놈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효과는 확실했다.
"혀, 형님?"
선장의 비명이 터져 나오자 짐을 옮기던 부하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다가온다.
백승태는 그들과 대치하지 않고 허우적거리는 선장을 걷어 차서 바다에 빠트려 버렸다.
"뭐 하고 있어! 빨리 형님부터 구해!"
선장이 누굴 기다린다면 보나 마나 박민교가 보낸 똘마니일 터.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도로변까지 나갔더니 마침 택시가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박민교는 몸을 날려서 택시를 세운다.
"평택으로 빨리 가주십쇼. 요금은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지금 집으로 가는 건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숨겨둔 돈을 가져 나와야 이후에 뭐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끼이이익.
요금 두 배라는 마법의 주문에 걸린 택시는 평소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40분 만에 주파했다.
새벽 시간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였다.
백승태는 택시비 30만 원을 던져 주고는 곧장 아파트 단지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헉... 헉... 썩을."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뛰었다. 숨이 차올라서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으나 뛰고 또 뛰었다.
박민교가 사람을 보내기 전에, 먼저 돈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착한 집의 상태는 멀쩡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왜?"
아파트의 한 층 전체가 불타서 시커멓게 그을음이 져 있었다.
그것도 수천 세대가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정확히 그의 집이 있던 4층만 딱 불탄 상태였다.
"박민교, 이 개새끼가."
* * *
중국에서 연락이 끊겼던 백승태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오늘 새벽에 들어왔단다.
나는 그의 입국을 누구 보다 기다려왔다만 마냥 좋아할 소식은 아니었다. 그가 입국했다는 걸 우리가 알 정도면, 박민교의 귀에도 정보가 들어갔다고 봐야 했다.
"백승태는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잡혔습니까?"
"저희도 추적하던 대상이 아닌지라 세세한 정보까지 파악하는 것은 힘듭니다. 다만, 박민교 측 움직임이 활발한 걸 보면 잡히지 않았다는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승태가 멀쩡히 한국 땅을 돌아다니는 이상, WHTS컴퍼니에 향했던 박민교의 모든 어그로가 백승태에게 몰릴 테니까.
'백승태가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해.'
여기서 정석적인 대응은 백승태의 도피를 도와주면서 박민교를 살살 말려 죽이는 것.
허나, 연락처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준단 말인가.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했다면 백승태가 먼저 연락을 해왔을 거다.
'연락을 아직 안 했다는 것은, 백승태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꽤 오랫동안 장고하고 있었는지 마주 앉은 석훈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승태의 위치를 추적할까요?"
"추적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겁니까?"
"저희가 먼저 찾아내긴 어렵습니다. 그러니 박민교 측의 통화를 도청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너무 수동적인 작전이다. 저래서야 우리가 먼저 백승태의 신병을 확보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백승태가 갈만한 곳에 우리가 먼저 가 있을 수만 있다면...
'백승태가 갈 만한 곳이 어딜까? 집은 그 꼴이 됐으니 아닐 테고. 가족이 있는 친척 집? 아니면 시골의 본가 쪽?'
내가 백승태라면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 곳으론 절대 가지 않을 거다. 박민교가 보낸 깡패들이 우르르 따라올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현시점에서 갈만한 곳은 딱 한곳밖에 없었다.
"석훈 씨, 지금 당장 사람을 쓴다면 몇 명이나 모을 수 있습니까?"
"외부에 용역을 끌어오면 2, 300명은 거뜬히 동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힘만 쓰는 용역이 필요한 게 아니라, 석훈 씨 같은 이 방면의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합니다."
석훈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그런지 군소리 없이 원하는 답을 내놓는다.
"스케줄이 없는 해결사라면 일곱 명 정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일곱 분 모두와 계약하겠습니다. 전원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박민교와 백승태의 움직임을 감시해 주십시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해결사는 용병처럼 개인 계약이었기에, 7명을 추가로 계약하면 의뢰비도 7명분을 더 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게 과잉 대응이라는 건 알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게 남는 것은 극단적인 카드밖에 없어.'
극단적인 카드란 내가 직접 나서서 박민교를 처리하는 것.
그런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가든 간에, 가능한 모든 자원을 끌어다 써야 했다.
* * *
"뭣이라! 놓쳤다고?"
박민교의 목소리가 창고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그의 앞에 오와 열을 맞춰서 도열한 범수파의 조직원들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갤 푹 숙인다.
"이 멍청한 것들! 이 밥버러지 같은 것들! 내가 이러려고 너희 조직에 돈을 대주는 줄 알아?"
박민교는 가장 앞 열에 서 있던 스킨 헤드 사내를 걷어 차서 넘어트린다.
놀라서 주변에 있던 조직원들이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스킨 헤드는 괜찮다는 듯 도움을 물리고 다시 앞으로 나선다.
"전무님께는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타겟이 도망친 뒤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늦게 알려줬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야?"
"정확한 상황을 알려드린 것 뿐입니다."
박민교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 그러셨어요? 도망갔다고 보고하면 그냥 끝이네? 그지?"
"..."
"히야. 요즘은 깡패짓이 애들 장난이네? 도망갔다는 말을 그냥 싸질러도 되고 말이야. 나 때는 그딴 소리 지껄이면 혀가 뽑혔을 텐데."
박민교는 그 뒤에도 주변 물건을 걷어 차거나 욕설을 지껄이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길 오 분 정도가 지나자 제풀에 지쳤는지 벽에 기댄채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후..."
박민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으니 그제야 돌아버리기 직전이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담배를 연달아 세 번을 깊게 빤 뒤에 입을 뗀다.
"지금은 위치 파악 되고?"
"평택에 있는 자택에 들린 것까진 확인됐습니다만, 그 이후의 행적은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염병하고 있네. 중국도 아니고, 좁아 터진 대한민국 땅 덩어리에서 사람 하나 잡아오는 게 그리 어려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꼭 잡아 오겠습니다."
"그 시간을 못 주니까 지금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 아냐! 이 답답한 새끼들아!"
백승태는 박민교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건너와서 입을 나불거리기라도 한다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몰랐다.
'이젠 인정사정 봐줄 때가 아니야. 최대한 빨리 잡아야 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결심을 굳힌 박민교는 반쯤 태운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아들이고는 바닥에 집어 던진다.
"백승태 마누라랑 자식 새끼가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 있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당장 잡아와. 마누라, 자식, 친척, 누구라도 좋으니까 백승태를 아는 년놈이면 전부."
단순무식한 짓이지만 그만큼 빠르고 확실하게 결과가 나오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부 한 곳에 몰아 넣고 족치다보면 누군가 백승태가 있는 곳을 불거나, 아니면 백승태가 먼저 연락이 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범수파에서도 이번 일의 무게감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 없이 지시를 받아들인다.
조직원들이 빠져나가고 조용해진 창고 안.
홀로 남은 박민교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끝까지 뻑뻑 피워댄다.
"씁, 올해가 삼재라더니,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범수파 조직원들이 백승태를 쫓고 그 일가족을 잡아 오는 동안, 박민교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둔 냉동 탑차에 올라탄다.
털털털털털.
조직에서 쓰던 차라서 그런지 엔진에선 이상한 소리가 났고, 시트에선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빨리. 빨리."
박민교는 경기도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 있는 별장엔 지금껏 박민교가 횡령한 돈을 세탁해서 마련한 현금과 금괴, 보석, 미술품이 숨겨져 있었다.
'내 심부름을 여러번 다녀온 백승태라면 별장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 챘을 지도 몰라.'
당연히 보안 장치는 이중 삼중으로 해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별장으로 향하게 했다.
딱 백승태가 잡힐 때까지만 차에 실어둘 생각이었다.
평소였다면 박민교의 행동이 나쁜 판단이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절대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이미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