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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도토리 콘서트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콘서트가 열리는 경기장에는 5만 명의 관중이 모였으며, KBC 기준 시청률은 평균 28%, 최대 36%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까지만 해도 역대 최대의 흥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지만, 진짜는 KBC의 방송이 끝난 이후였다.
도토리 콘서트의 여운이 남은 팬들은 편집된 미공개 영상을 보기 위해, 일제히 와츠로 몰려들었다.
이때 순간적으로 집계된 접속자가 무려 200만 명.
여기에 대기열이 걸려서 접속을 못 한 인원까지 더하면 26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한 셈이다.
국내 인터넷 플랫폼으로선 역대 최대의 흥행이자, 최대의 기록이었다.
기쁘고도 기쁜 날이었으니 축배를 들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이번 콘서트를 진두지휘한 나와 박태식은 축배 대신, 쓰디쓴 커피잔을 든 채로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녀갔다던 박민교라는 사람이 횡령 진범이라며? 그 사람이 무슨 일로 우리 회사에 찾아온 거야?"
"나도 모르지."
"혹시 네가 가상화폐 사건의 배후라는 걸 알아차린 거 아냐?"
박민교는 가상화폐 지갑이 털려서 눈이 돌아간 상태다.
그런 놈이 범인을 알아냈으면서 젠틀하게 이름까지 까고서 회사로 찾아올까?
"그놈이 내가 배후란 걸 알았다면 회사로 오는 게 아니라, 당장 납치해서 야산으로 끌고 갔을걸."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
"납치 정도면 순한 맛이지. 만약 나를 살려둘 필요가 없었으면 바로 트럭을 몰고 와서 밀어버렸을 거다."
"에이, 설마..."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나도 실제로 당해보기 전엔 트럭으로 밀어 죽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박민교는 내가 아니라 WHTS컴퍼니의 대표를 찾아왔다고 했지? 그럼 의심의 대상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겠네."
"네가 아니면 누굴 찾아왔단 말이야?"
"한국 지사 대표엔 네 이름이 올라가 있잖아."
"나?"
"그래, 너. WHTS컴퍼니 한국지사 대표 박태식."
박태식의 표정이 싹 굳는다. 억지로 웃어 보려는 것 같지만,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트럭 조심해라. 밤에 이상한 택시도 타지 말고."
"장난치지 마. 재미없거든?"
여기서 괜히 겁을 더 줘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잠시 이탈했던 화제를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린다.
"어쨌거나 박민교가 WHTS컴퍼니 쪽을 의심하고 있는 건 확실해."
"계속 회사로 찾아오면 어쩌지?"
"어쩌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응해야지."
박태식은 땅을 꺼트릴 기세로 한숨을 토해낸다. 대응하는 당사자가 자신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너무 부담 갖지 마. 아직 확실한 증거까진 못 잡은 것 같으니까."
"그래도 계속 찌르다 보면 네가 개입했다는 걸 들킬지도 몰라."
박태식의 말이 맞다. 지금까진 필사적으로 도박꾼 연기를 해서 어찌 넘어갔다만, 작정하고 파고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당분간은 해외로 나가 있는 게 어때? 회사엔 저번에 머리 다친 건으로 수술받는다고 둘러대면 되잖아."
"지금 타이밍에 그랬다간 의심만 살걸."
"그거야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상대가 거리를 좁혀온다고 계속 뒤로 물러서다간, 코너에 몰려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뿐이다.
그 전에 내가 먼저 활로를 뚫어야 했다.
만약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 * *
저녁 6시.
오늘도 시간에 딱 맞춰서 출입로에 사원증을 찍고, KN케미컬을 나선다.
평소였다면 곧장 판교로 차를 몰고 갔겠지만, 오늘은 판교가 아니라 본가가 있는 인천으로 방향을 잡는다.
스윽.
운전하는 동안 따라오는 차가 있는지 계속 좌우를 살핀다. 한때 미행이 붙은 적도 있는 만큼, 이젠 주변을 살피는 게 습관이 됐다.
'미행은 없는 것 같은데...'
오늘 근무 시간 동안, 박민교가 찾아올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박민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날 의심하고 있었다면 불러서 떠보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이제 확실해졌어. 박민교는 내가 아니라 도토리 코인을 발행한 WHTS컴퍼니를 의심하고 있다.'
WHTS컴퍼니 본사는 싱가포르로 돼 있었기에 제대로 정보를 얻으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터.
그동안 나도 내 나름의 최선의 준비를 해둘 생각이다.
"어머?"
집에 딱 도착하자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깜짝 놀라신 것 같다.
"아들, 네가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퇴근했으니까 왔죠."
내가 말하고도 궁색한 변명이다. 평소엔 퇴근 후에 판교 사무실로 갔고, 잠도 인근 오피스텔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이 시간에 어디 나가세요? 저녁 드시는 거예요?"
"아니, 나는...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요? 급한 거 아니면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제가 김치찌개 끓여드릴게요."
어머니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서 손을 내젓는다.
"아냐. 지금 바로 가야 해. 미안한데, 밥솥에 밥 있으니까 혼자 챙겨 먹어. 알겠지? 다음엔 꼭 밥 챙겨 줄게. 아들, 진짜 미안해!"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어머니는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서 가버리신다.
"무슨 일이기에 저리 급하게 나가시는 거지?"
잠시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따라갈까도 고민했지만,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나 혼자 뭘 먹냐."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까 김치찌개를 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대충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처럼, 빠르게 달렸다가 걷기를 반복하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달동네의 골목은 미로나 마찬가지다. 갑자기 길이 서너 갈래로 나뉘기도 하고, 가끔은 길이 끊어지는 곳도 있다.
평상시라면 정확하게 출구 쪽으로 나갔겠지만, 오늘은 혹시 모를 미행에 대비해서 골목을 한참 빙빙 돌다가 도로변으로 나간다.
미리 준비해둔 오토바이를 타고 인천항 쪽으로 20분.
한참을 돌고, 돌아서 내가 도착한 곳은 바닷가 인근의 허름한 실내 헬스장이다.
딸랑.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체육관 특유의 땀내가 코를 찔러온다.
내부는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법한 작고 오래된 헬스장의 모습이다.
다만, 안에서 운동 중인 사내들의 덩치와 풍겨오는 기백이 평범한 헬스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들 근육은 그리 큰 편이 아니지만, 무식하게 큰 바벨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일반 헬스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해결사 사무실.
사람 찾기, 뒷조사, 증거 수집 등. 무슨 일이든 의뢰받는 흥신소의 상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상위 버전인 이유는 이곳 멤버들이 경찰 고위 간부, 국정원, 기무사 출신이 많아서 그렇다더라.
쿵!
바벨을 요란스럽게 내려놓은 중년인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쓱 쳐다보고는 말했다.
"운동하러 오셨습니까?"
"개인 PT를 예약했습니다."
"아이쿠.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위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2층은 헬스장이 아니라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내가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땐 이미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위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셨습니까. 의뢰인님."
커다란 근육질 몸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하얀 얼굴의 사내가 나를 맞이한다.
이름은 석훈, 전직 육군 특임대 출신이었다고 한다.
"맡긴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는 얇은 서류봉투를 내게 내민다. 봉투 안에는 서류 몇 장과 사진 수십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은 박민교의 모습이 찍혀 있다.
그가 언제, 어디에 들어갔으며, 뭘 했는지가 전부 사진으로 기록돼있다. 서류는 그 정보를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해둔 것이었다.
"..."
보고서에는 그가 WHTS컴퍼니에 들린 것도 전부 기록돼있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박민교가 명함을 두고 가기 전에도, 여러 번 회사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고 갔다는 점이다.
"그가 회사 안까지 들어왔었습니까?"
"로비 주변과 지하 주차장을 계속 살펴보기만 했을 뿐, 사무실까지 올라가진 않았습니다."
천만다행이다. 만약 재수 없게 사무실에서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앞으로는 그가 회사 근처에 접근할 때마다 연락 주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상대도 정보원을 쓰고 있는 터라... 실시간 감시까지 하려면 전문 인력과 장비를 더 투입해야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석훈은 나를 쳐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낸다.
"의뢰비가 기존의 3배는 들 텐데요."
"필요하다면 3배든, 4배든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 처리만 확실하게 해주시죠."
"접수하겠습니다."
다시 보고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소한 것까지 기록돼있었기에, 요약 보고서를 보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다 박민교의 동선에서 익숙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상길동.
저걸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긴 박태식의 집이 있는 동네였으니까.
'박민교는 박태식을 이번 일의 배후로 알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꼭 박태식이 배후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납치해서 고문으로 입을 열게 하면 그만 아닌가.
"신변 보호 한 명 추가해주십시오. WHTS컴퍼니의 박태식입니다."
"어느 수준으로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최대한 높은 수준으로."
"바로 접수하겠습니다."
석훈이 잠시 자릴 비운 동안,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겼다.
나 때문에 박태식이 위험해졌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의식은 했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나니 눈앞이 깜깜하다.
나는 은혜를 갚을 생각으로 박태식을 일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같이 투자하고, 같이 회사까지 세웠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박민교를 신고해서 법정에 세우는 건 어떨까.'
이미 증거는 차고도 넘치기에 법정에 세우는 것까진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 그가 집행유예로 나왔을 때였다.
그가 지금껏 해온 짓을 생각해보면 보복이 들어올 거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차라리 죽여 버리는 건...'
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맴돈다.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쓰레기 하나 때문에 오염되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 쓰레기가 내 주변 사람을 위협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치울 의무가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돌아온 석훈이 계약서를 가져와서 내민다.
"신변 보호 요청 서류입니다. 잘 읽어 보시고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대상의 신변 보호는 계약된 시간부터 유효합니다."
이미 한 번 봤던 내용인지라, 나는 다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저번에 같이 진행하셨던 의뢰 말입니다. 중국에서 사람 찾아 달라고 하셨던 건요."
백승태 소재 파악 건을 말하는 것 같다.
"해외는 탐색이 안 된다고 거절하셨잖습니까."
"원래는 그게 원칙입니다만, 운 좋게 위치를 찾은 것 같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반가운 소식에, 본능적으로 몸이 앞으로 쏠린다.
"오늘 새벽 4시경에 군산으로 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