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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 차게 진행했던 도토리 콘서트는 제작진 미팅을 앞두고 올 스톱 상태가 됐다.
사유는 예능 국장의 반대.
보수적인 방송 업계에서 상사의 지시는 절대적이다. 도토리 콘서트 제작은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한쪽으론 방송국 임원들에게 접근해서 로비를 진행했고, 다른 한쪽으론 인터넷 여론전을 펼쳤다.
-싸이클럽 메인에 서프라이즈 콘서트 커밍 순 떠 있는데 무슨 뜻이죠?
-무조건 도전 팀에서 싸이클럽 감성의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대요.
-이번은 가요제가 아니고 콘서트라서 완전 초대형 프로젝트가 될 거라더라. 벌써 가수 섭외 들어갔다는 썰도 돌고 있음.
불씨를 살짝 지폈을 뿐인데, 파급력이 원체 큰 건인지라 소문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이미 무조건 도전 게시판엔 언제 방송하냐는 게시글이 하루 만에 수천 개씩 올라왔고, 트윗, 페북 같은 SNS, 심지어 언론사에서도 소문을 기사화해서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방송사 측에선 사실무근이라는 입장문을 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여론은 고로 속의 시뻘건 쇳물처럼 달아오른 뒤였기에, 오히려 서프라이즈 방송 같은 헛소문만 더 커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분명히 말이 안 나오게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나고 있잖아!"
KBC 임원 회의실에는 아침부터 고성이 쏟아진다.
사장인 주철민이 이렇게 격분한 이유는 KBC의 간판 예능에서 도토리 콘서트 제작이 확정이라는 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저 콘서튼지 나발인지는 안 한다고 했다며?"
분노한 주철민의 시선을 마주한 예능 국장이 바짝 머리를 조아린다.
"저번 주에 보고드린 것처럼 도토리 콘서트는 요청 당일에 바로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는데 기사는 왜 자꾸 기어 나오는 거야? 이번이 몇 번째인 줄 알아?"
"저희는 거절했지만, 업체 측에서 단독으로 콘서트를 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추측성 기사가 계속 나오는 것 같습니다."
도토리 콘서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이지만, 주철민에게는 제 목이 걸린 일이었다.
가상화폐와 관련된 보도나 영상, 광고를 절대 받지 말 것.
무려 청와대 비서실에서 다이렉트로 내려온 공문이었다.
정부 측 낙하산으로 KBC 사장 자릴 차지한 주철민으로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여론을 잠재워야 했다.
"사장님, 차라리 방송을 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예능 국장이 최대한 조심히 의견을 냈으나 조심한다고 먹힐 제안이 아니었다.
"미쳤어? 나 모가지 날아가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응?"
"오해 십니다. 저는 이대로 있다간 오히려 역풍이 세게 들어올까 봐 걱정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역풍이라니?"
"이번 건은 이미 인터넷상에선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가 막는 바람에 제작이 불발 났다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문이 나면 나는 거지. 뭐 달라질 게 있겠어? 겨우 예능 방송 하나 가지고."
다른 프로그램이었으면 '겨우 예능 방송'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도토리 콘서트에 엮인 무조건 도전은 절대 평범한 예능 방송이 아니었다.
"사장님, 무조건 도전은 방영 10년 차에 팬층까지 두터운 프로그램입니다. 저번 아이돌 가요제 때 시청률이 25%나 나온 걸 아시잖습니까."
요즘은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방송을 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기에, 시청률 25%면 사실상 시청률 40%를 넘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기가 많은 것과 역풍이 무슨 상관이야?"
"무조건 도전의 주 시청자층은 20대부터 40대까지입니다. 그 연령대는 반정부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그들을 자극했다가 대규모 시위라도 벌어지는 날엔..."
이미 KBC엔 정부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주철민의 퇴임 시위가 빗발치고 있었다.
만약 이번 사태로 시위가 벌어지고, 그들이 퇴임 시위에 합세라도 하는 날엔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리라.
"안 되지. 그건 절대 안 돼."
주철민은 그 광경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표정이 싹 굳어간다.
이때 예능 국장이 얼른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 억지로 틀어막다가 터지게 하지 말고, 적당히 열어둬서 김을 빼는 게 옳다고 봅니다."
"어떻게?"
"메인 에피소드를 따로 진행하면서 도토리 콘서트는 보조 에피소드로 짧게 다루는 겁니다. 방영분이 기대에 못 미치면 자연히 관심도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주철민이 책상을 '탁!'치고서 소리쳤다.
"옳거니. 요즘 젊은것들에겐 딱 맞는 계획이군. 냄비처럼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어버릴 테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이미 여론을 되돌릴 수 없게 된 이상, 이것보다 나은 방책은 없었다.
게다가 과열된 현 상황을 VIP 측도 알고 있을 테니, 나중에 말이 나오더라도 이게 최선이었다는 변명거리도 될 수 있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실행시켜."
* * *
싸이클럽 개발실엔 오랜만에 훈풍이 불고 있었다.
기존에 대박을 친 와츠가 있긴 했으나 싸이클럽으론 유입이 뜸했다면, 이번 도토리 콘서트는 제작 발표도 전에 사용자가 대거 몰려들었다.
그 결과 싸이클럽 일일 접속자는 5배나 늘었으며, 미니홈피와 음악 판매 수익은 30배가 폭증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싸이클럽 분위기가 좋으니 개발팀의 수장인 공민준도 얼굴이 확 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더 바빠도 됩니다. 이게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요. 하하하핫."
나는 악수를 하고서 개발실 안을 전체적으로 쭉 둘러본다.
기존의 싸이클럽 개발실은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얼마 전 윙클 팀이 합류하면서부터 빽빽한 모습이 됐다.
"사무실이 비좁아 보이는군요. 조만간 큰 사무실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람끼리 부대끼는 맛이 있어야 팀웍도 좋아지잖습니까."
"이번에 도토리 콘서트가 잘 풀리면 팀 규모가 커질 텐데, 그땐 사람을 더 뽑아야 할 것 아닙니까."
"에이, 그거야 잘 됐을 때 일 아닙니까."
공민준은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지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가상화폐 개발팀과 연계를 생각하면 언젠간 옮겨야 합니다. 저도 양쪽 사무실을 오가기 힘들기도 하고요."
"새 사무실로 옮기면 저희야 좋죠. 언제부터 준비할까요?"
"이번 콘서트 건을 마무리 짓고 여유가 생기면 옮기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사무실 이전 이야기를 끝내고 안쪽에 있는 파티션 너머로 걸음을 옮긴다.
자리의 주인, 박태식은 부재 중이었다.
"박 이사는 어디 갔습니까?"
"이사님은 도토리 콘서트 제작 회의하러 나가셨습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방송국에 갔다는 말은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녁 7신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전활 하려던 차에, 공 팀장이 말을 덧붙인다.
"이사님이 일을 어찌나 열정적으로 하시는지, 제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돕니다. 그러니 좋은 결과가 나온 거겠지만요."
"좋은 결과라뇨?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이번 일은 아니고요. 싸이클럽 재개장 했을 때 일일 사용자가 쭉 유지된 건 아시죠?"
"노래를 들으려고 싸이를 켜 놔서 접속자가 유지됐다고 들었습니다."
"그거 전부 이사님이 직접 선곡한 플레이 리스트입니다."
듣는 순간 기가 막혀서 헛웃음부터 나온다.
"스트리밍으로 나오던 노래가 랜덤이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일일이 선곡한 거였습니까?"
"그냥 선곡만 한 게 아니라 사용자 나이에 맞게, 요일, 날씨, 기념일마다 한 땀씩 노래를 다 짜서 넣은 겁니다. 예전 라디오 DJ들이 했던 것처럼요."
"그거 엄청 번거로울 텐데요."
"저도 처음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결과는 대호평이라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박태식은 학창시절부터 싸이클럽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지금도 진심인 놈이니 이런 발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분이 이번 도토리 콘서트 기획에 참여한다고 하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물 만난 고기겠군요."
"하핫. 딱 맞는 비유 십니다."
껄껄거리던 공 팀장은 갑자기 옛 생각이 나는지 박태식의 빈 자리를 보며 중얼거린다.
"처음 이사님이 싸이클럽을 담당한다고 했을 땐 걱정이 많았습니다. 업계 경력이 아예 없는 분이다 보니..."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이 일해보니까 대표님이 왜 이사님을 택했는지 알겠더군요."
박태식 같은 케이스에 쓰이는 인터넷 용어가 있다.
덕업일체.
취미에 몰입한 오타쿠를 일컫는 '덕'자를 써서, 일과 취미가 하나가 됐다는 뜻이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잘해줄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어쨌거나 결과가 좋게 나왔으면 된 거다.
공 팀장과 대화를 끝내고 바로 박태식에게 전화를 건다.
뭘 하고 있는지, 녀석은 연결음이 열 번도 넘게 흘러간 후에야 전화를 받는다.
-어, 우혁아. 무슨 일이야.
"뭐하나 싶어서 연락해봤다. 아직도 방송국이냐?"
-답이 안 나와서 아침부터 계속 회의만 반복하는 중이야.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다. 일이 안 풀려서 회의가 길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길래 온종일 회의를 해?"
-아주아주 중요한 사안이지.
"그러니까 뭐냐고."
-이번 콘서트에 누굴 섭외할 것이냐로 다들 의견이 달라서 말이지.
내용을 듣고 나니 회의를 왜 이리 오래 했는지 알 것 같다.
흔히들 싸이클럽 감성의 노래라는 말을 쓰지만, 의외로 싸이클럽은 전성기가 긴 편이다.
2003년부터 시작해서 2010년까지.
대략 8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행했던 노래도, 가수도 다양했으니. 거기서 몇 곡만 딱 골라내기란 쉽지 않다.
"출연진이 돌아다니면서 가수들 한 명씩 섭외하는 거 아니었어?"
-그거 다 연출이야. 연출. 미리 제작 전에 전부 섭외하고 진행하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휴, 의견도 갈리는 데다가 밖에서도 난리를 쳐대니 죽겠다.
"밖에서라니?"
-네가 직접 들어봐. 지금 어떤 상황인지.
휴대폰 너머로 창문을 여는 듯한 '드르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서 고함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심PD님 우리 오빠들 꼭 나오게 해주세요! 이번 기회 놓치면 영영 완전체로 못 나올 거예요! 제발요!
-눈꽃이 제 인생 노랩니다! 빼면 안 됩니다!
-국종이 형이 부르는 발라드를 꼭 라이브로 다시 듣고 싶습니다!
-워너비! 오직 워너비!
다시 문 닫는 소리와 함께 박태식 목소리가 돌아온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 알겠지?
"설마 팬들이 와서 저러고 있는 거야?"
-그래. 어디서 정보가 새 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부터 돌아가면서 진을 치고 있다더라.
학생 팬이 아니라 삼촌, 이모 팬들이 방송국 앞에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하니, 픽하고 웃음이 터졌다.
-야, 웃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곡 선정을 잘못했다간 폭동이라도 날 기세라니까.
"그럼 팬들에게 맡겨."
-뭘 맡겨?
"인터넷으로 원하는 곡 투표시키면 되잖아. 와츠 가입자 한 명당 한 표, 짧은 영상 응원은 가점 준다고 하면 영상 업로드 숫자도 확 뛰겠네."
평범한 상품을 내걸고 영상 업로드를 독려해봤자 별 효과가 없지만, 여기에 팬심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의 10년 만에 무대에 서는 가수도 있는 만큼, 곡을 원하는 팬들이 많을 것이고 경쟁도 장난이 아닐 거다.
"발표전에 서버 준비부터 해둬. 영상 업로드 경쟁이 붙으면 서버가 뻗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