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
"..."
머리가 먹먹하다. 몸뚱이는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다.
요즘 몸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사실상 회사를 두 곳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주변을 둘러봐도 그 흔한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안력을 돋워서 더 먼 곳까지 살펴보자 그제야 꾸물렁거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완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니.
'애초에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기는 게 아니었나?'
의문을 품으면서도 내 다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림자까지 서너 걸음 정도 남았을 때, 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 아니, 비명을 질렀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자의 정체는 백승태 부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우혁, 이 덜떨어진 새끼! 너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이 됐어! 너만... 너만 조용히 있었으면 나는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 나더러 또 횡령 누명을 뒤집어쓰라고? 내가 왜? 누구 좋으라고?
중지를 치켜들자 백승태를 닮은 그림자는 잠시 희미해졌다가 신경질적인 인상의 중년인으로 탈바꿈했다.
이번은 그림자는 박민교의 모습이었다.
-내 계획은 완벽했을 텐데, 어째서... 어째서...
박민교를 닮은 그림자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휴대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코인 시세라도 보는 건가.'
다시 그림자가 희미해졌다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번은 싸이클럽의 전 대표였던 정지승이다.
-싸이온만 완성되면 싸이클럽은 부활할 수 있었어. 싸이클럽을 내 손으로 되살리기 직전이었단 말이다. 그때 네가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웃기지 마라. 내가 거둬서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린 거다.
그러지 않았다면 싸이클럽은 실패만 반복하다가, 종국엔 서비스가 종료된 채로 이름만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꼴이 된다.
'자꾸 이런 인간들이 나타나는 걸 보면, 내가 개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그림자가 또 변했다. 이젠 적응이 돼서 그런지 누구 그림자가 나오든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제가 정말 오랜 시간 공들여서 작업한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대표님은 들어 보셨나요?
이번 그림자는 의외로 이소영이었다. 그녀는 평소의 웃는 모습이 아니라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님블 코인이라고... 제 인생의 역작이에요. 하지만 그 프로젝트는 이제 빛을 보지 못 하게 됐어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 몫을 대표님이 다 가져가신 거죠?
원망이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를 후벼 파고 들어온다.
나는 더 세게, 필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발가락 끝에서부터 힘을 짜내서 소릴 질렀다.
"와악!"
폐부에서 맴돌던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시야가 확 트인다.
"콜록. 콜록. 콜록. 컥... 컥."
순간적으로 호흡을 급하게 내쉬어서 그런지 한참이나 꺽꺽거리며 숨을 골라야 했다.
"갑자기 왜 그래? 가위라도 눌렸어?"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석엔 박태식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모든 게 다 꿈이었다. 내 뇌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 낸 꿈.
사실 이런 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잊을 만하면 비슷한 꿈을 꾸곤 했는데, 이번은 꽤 묵직한 놈이 들어온 거 같다.
끼익.
박태식은 차를 도로변에다 세워두고 내 상태를 살핀다.
"야, 신우혁. 진짜 괜찮은 거 맞아?"
"호들갑 떨지 말고 차 출발시켜. 그냥... 악몽을 꿨을 뿐이야."
"인마, 네 상태를 봐. 내가 호들갑을 안 떨게 생겼냐?"
이마를 훔쳤더니 땀이 흥건하다. 시트에 닿아 있던 등판 쪽은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축축했다.
"병원이라도 가보자. 여기서 10분이면 도착할 거야."
"그 정도는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쉬면 괜찮아질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박태식은 다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저 진지한 표정을 보니, 내 상태가 심각하다 싶으면 억지로 병원까지 끌고 갈 생각인 것 같다.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전혀 안 괜찮아 보이거든요? 고집부리지 말고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 봐.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정도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는가.
그나마 박태식이 WHTS컴퍼니의 관리과 외부 활동을 전담해주고 있어서 이렇게라도 버틴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진즉에 관리 부족으로 회사가 터져 나갔을 거다.
"우혁아, 이럴 게 아니라 그냥 신고해 버리면 안 되냐?"
"뭘 신고해?"
"너희 회사 횡령 건 말이야. 이미 회사 곳간은 다 비어 있을 텐데, 지금 신고 때려서 잡아넣으면 되잖아."
"안 돼. 전에도 말했지만, 한국에서 횡령 범죄는 법정에 세워봤자 무조건 집행 유예야."
이건 억측이 아니라, 범행 액수가 커질수록 집행 유예 선고가 많아진다는 통계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럼 어쩔 생각이야?"
"아예 거지꼴이 될 때까지 탈탈 털어먹은 뒤에 잡아넣어야지. 그렇게 되면 뒷배들이 손을 뗄 거고, 법정에서도 정상적인 형량이 나올 테니까."
박민교의 횡령 계좌는 내가 두 차례에 걸쳐서 털어먹었지만, 그가 세탁을 끝낸 현찰과 금괴, 미술품은 아직 어디로 빼돌렸는지 오리무중이다.
그나마 알만한 사람이라면 백승태가 유일했는데, 그는 밀입국 브로커를 연결해준 뒤로 연락이 아예 끊겨 버렸다.
'백승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박민교도 가만히 있진 못해. 틀림없이 현물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들 거다.'
현물은 계좌나 가상 지갑과 달리, 움직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때를 잘만 노리면, 박민교의 마지막 남은 골수까지 다 긁어낼 수 있을 것이다.
* * *
KBC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무조건 도전'은 어느덧 방영 10년 차를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히 10년을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인기를 유지하면서 10년을 방영했으니 무조건 도전은 국민 예능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도전 제작진에겐 그 10년이란 세월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신선한 아이디어 좀 없어? 기존에 썼던 놈들 말고, 좀 신박한 아이디어를 짜내 봐."
무조건 도전 제작진이 모인 회의실엔 고요가 깔려 있다. 떠드는 이는 아까부터 머릴 쥐어뜯는 사내 하나가 전부였다.
"애들아, 제발.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아이디어만 내봐. 디테일은 내가 다 채울 수 있어. 그러니까 기브 미 아이디어!"
고래고래 소릴 지르는 이는 무모한 도전의 메인 PD인 심종모다.
그의 자학쇼는 매번 기획 회의 때마다 반복되는 일인지라 이젠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아니, 기획을 완성해야 녹화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고. 또 휴방할 거야? 아니잖아."
그러다 얼마 전에 입사한 막내 작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심 PD님, 이번에 국내 투어를 했으니까 연계 에피소드로 해외 투어를 해보시는 건 어떤지..."
막내 작가 옆에 앉은 다른 이들이 고갤 절레절레 흔든다. 이후에 이어질 레퍼토리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해외? 그래, 해외 좋지. 산 좋고, 물 좋은 해외. 그런데 말이야. 비행기에 타는 순간, 제작비가 몇 배나 뛰는 건 알지?"
"아..."
"방송도 수지타산이 맞아야 진행이 되거든? 제작비가 땅 파면 나오는 건 아니잖아. 뭐, 시청률이라도 잘 나오면 모르겠지만."
심종모는 구석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대본팀을 돌아본다.
"이번 국내 투어 에피소드, 시청률 얼마나 나왔지?"
"평균 12% 나왔습니다."
"12%면 우리 평균도 안 되잖아. 그런 성적 먹겠다고 제작비를 몇 배나 태운다? 이건 내가 밀어붙여도 위에서 컷이야. 컷."
"죄송합니다."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그냥 우리 상황이 거지 같아서 푸념한 거야. 하... 씨, 타사는 지원 빵빵하게 해주던데 우린 이게 뭐냐. 옘병할."
이후에도 심종모는 아이디어를 내라고 팀원들을 쥐어짠다. 그러나 10년이나 방영한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어디 쉽게 나오겠는가.
의미 없이 시간만 흐르고, 결국은 매번 하던 데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올해에 시청률 제일 많이 나온 에피소드가 뭐야?"
"올 초에 방송한 일요일은 가수다 에피소드 막방이 25%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고속도로 가요제도 22%였고요."
"가요제 말고 다른 에피소드는 없어?"
"그 외에 에피소드에서는 20%를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가요제 에피소드는 했다 하면 대박을 치지만, 올해 벌써 두 번이나 써먹은 탓에 또 꺼내기 부담스러운 카드였다.
심종모의 입에서 한숨이 정확히 세 번째 나오고 있을 때, 누군가 의견을 낸다.
"가요제 한 번 더 가시죠."
모두의 시선이 용감한 발언자에게 휙 돌아간다.
"올해만 두 번을 했는데 또 하자고?"
"못 할 게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시청률이 잘 나온다는 건, 시청자들이 원한다는 거 아닙니까?"
논리적으론 맞는 말이지만 종합 예능을 표방한 무조건 도전에는 맞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당연히 기존 포맷을 그대로 따라가면 욕먹겠죠. 그러니 변주를 살짝만 주는 겁니다."
"어떻게?"
"요즘 싸이클럽 노래 듣는 사람이 그렇게 많답니다. 싸이를 안 해도 노래만 틀어두려고 접속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기존의 초청 가요제는 90년대 말의 노래가 주축이었다.
하지만 싸이클럽 노래는 2000년대 말.
시기가 확연히 다르니 타겟도 달라질 테고, 그에 맞춰서 포맷도 바뀔 테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제가 그쪽 담당자랑 얼마 전에 통화했는데요. 이번에 콘서튼지 뭔지를 크게 기획하고 있답니다."
"콘서트? 얼마나 큰데?"
"그쪽이 가상화폐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으니까, 못 해도 십억은 안 쓰겠습니까?"
이미 콘서트까지 기획 중이라면 거기에 멤버들이 얼굴만 비춰도 에피소드를 뚝딱 뽑아낼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 천치였다.
"그쪽 관계자랑 미팅 일정 잡아봐. 가능하면 콘서트 기획을 처음부터 같이 진행하는 식으로 하자고 꼬셔."
심종모는 제 할 말만 쏟아낸 뒤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국장실에."
이번 에피소드가 타사와 협업하는 방식인 만큼, 형식적이지만 미리 허가는 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 가요제를 하겠다고?"
예능 국장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미 두 차례의 가요제로 제작비를 엄청나게 써댔으니 당연했다.
심종모는 그가 뭐라 말을 덧붙이기 전에 잽싸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이번엔 제작비가 거의 안 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이미 업체가 준비 중인 콘서트에 저희가 조인하는 방식이 될 거라서요."
"야, 심종모. 네가 저번에도 제작비 얼마 안 든다고 했지? 그런데 얼마 썼어?"
"에이, 국장님. 이번은 진짭니다. 잘만 말하면 그쪽에서 우리 제작비까지 내줄지도 모릅니다."
"업체가 어디길래 그래? 물주라도 잡았어?"
"국장님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싸이클럽이라고, 요즘 도토리 코인으로 잘 나가고 있는 회삽니다."
순간적으로 국장의 표정이 빈 깡통처럼 일그러진다.
"거기랑은 안 돼."
"어째섭니까?"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국장이 더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으나, 심종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국장님, 이번처럼 제작을 꽁으로 먹을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잘만 굴리면 5회 분량은 그냥 뽑습니다."
"종모야. 내가 너한테 괜히 안 된다고 하겠어?"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심종모가 고집을 피우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을 내놓는다.
"윗분들이 거길 주시하고 있어."
"정치권입니까?"
국장은 고갤 끄덕이면서 손가락을 위로 치켜든다. 정치권에서도 가장 위쪽, 그건 청와대를 뜻했다.
"알았으면 이번 건은 얌전히 포기해. 그것들이랑 엮여서 윗분들 눈에 나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