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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화폐의 주 무대가 현실이라면 가상화폐의 주 무대는 인터넷이다.
가상화폐 투자는 100% 인터넷을 통해서 이뤄지며, 정보 역시 TV나 신문이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가 주축을 이룬다.
가상화폐의 특성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 여론 오염은 실물화폐나 주식보다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사태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갔다.
"우혁, 소영, 어쩐 일이세요."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얼마 전 신설된 보안팀의 수장인 넬라였다.
나는 이소영이 수집해온 서류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여기 댓글을 쓴 아이디들의 아이피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아이피?"
서류를 받은 넬라는 곧장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기다림 없이 바로 나왔다.
"이건 호주에 멜버른에서 접속한 아이피예요. 그리고 다음 아이디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싱가포르, 워싱턴, 도쿄... 전부 해외 아이피네요."
"신기하군요. 분명히 국내 사이트에서 댓글을 긁어 왔는데 전부 해외 접속 아이피라니요."
"아마 VPN을 썼겠죠?"
VPN은 단말기와 서버 사이의 통신을 암호화하는 기술이다.
본래 VPN의 목적은 가상의 사설망을 만드는 것이지만, 실상은 인터넷 우회나, 검열 회피, 접속 지역을 숨길 때 사용하고 있었다.
"추적할 방법은 있습니까?"
"VPN 업체들이 정보를 제공해주면 가능해요. 하지만 수사 기관의 요청이 아니면 힘들다고 보면 돼요."
"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이소영이 대화에 끼어든다.
"잠깐만요. VPN을 한두 명만 쓴 것도 아니고 한 페이지에 절반이 쓰고 있다면... 이 악플들이 조직적으로 작성됐다는 뜻이잖아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너무하네요. 우리가 대체 뭘 잘못 했다고 이런 짓을..."
이소영은 화가 치미는지 꽉 말아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댄다.
그때 넬라가 말을 살짝 덧붙인다.
"아니면 VPN 업체를 해킹해서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방법도 있어."
"괜찮아. 정식으로 고소하고 법적 처벌을 받게 할 거야. 수사 기관의 요청이 있으면 VPN 업체가 정보를 준다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지, 업체가 무조건 고객 정보를 넘겨주진 않아."
"그래도 할 거야. 지금껏 이 악플 때문에 나랑 팀원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꼭 죗값을 치르게 하겠어!"
이소영은 잔뜩 달아오른 기관차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그녀의 양쪽 뺨은 열기에 의해 홍조가 피어있었다.
"소영 씨, 일단 진정하시죠."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저희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요!"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저는 악플러 처벌을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법적 처벌이라는 방법이 마음에 안 들 뿐이죠."
그녀는 의외라고 생각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본다.
"잘 생각해보세요. 악플러 수사에 들어갔다 해도 증거를 모으고, 해외에 있는 VPN 업체에 협조를 받아서, 다시 신원 파악까지 하려면 얼마가 걸릴까요?"
"서너 달 정도...?"
"짧아야 서너 달이죠. 길면 일 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동안에도 악플러 조직은 계속 악플을 달고 다닐 텐데요?"
"..."
"그리고 악플러를 잡았다 칩시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벌금형일 텐데, 소영 씨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이소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그것도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아주 격하게.
"그러니 저는 고소는 고소대로 진행하고, 다른 방면으로도 같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요?"
"악플러 조직이 악플을 다는 이유. 그걸 먼저 알아내고 차단하는 겁니다."
악플러가 개인이라면 심심해서 악플을 달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건처럼 조직적으로 악플을 쏟아냈다면 필시 다른 노림수가 있을 거다.
"도토리 코인을 죽이면 누가 이득을 볼지부터 생각해봅시다."
"경쟁사? 아니다, 도토리 코인은 경쟁사라고 할만한 곳이 없잖아요. 가격이 내려간다고 반사 이익을 보는 업체도 없고요."
"그렇다면 시세 차익을 노렸겠군요."
주식 시장에서 특정 세력이 허위 정보로 작전을 거는 것처럼, 코인 시장에서도 시세 차익을 노리는 작전 세력이 존재했다.
"가격을 내리는데 어떻게 시세 차익을 보나요? 저점 매수라도 하는 거예요?"
"해외 거래소에는 코인 공매도가 가능합니다. 코인 가격이 내려갈수록 수익이 나는 방식이죠."
"진짜... 거래소는 공매도 같은 걸 왜 만든 거예요?"
"수수료가 일반 거래보다 훨씬 높거든요."
씩씩거리는 이소영을 뒤로하고 휴대폰을 꺼내든다.
통화 대상은 미국의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피버의 제인이다.
-여보세요.
"제인,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라기엔 저번 주에도 통화하지 않았던가요?
"제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죠."
-누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 그만하고, 용건부터 말해봐요. 이번엔 무슨 일로 연락한 거예요?
나는 웃으며 휴대폰을 반대편 손으로 바꿔 쥔다.
"코인피버에서 도토리 코인 공매도 상품 팔고 있죠?"
-그런데요.
"최근 한 달간의 거래 내역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하... 대니얼. 매번 이렇게 난처한 부탁만 할 거예요? 가상화폐는 익명성이 생명이라고요.
"저도 압니다. 그러니 상세 내역을 달라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고 싶다고 한 겁니다."
이것마저도 쉽지 않은지 한동안 돌아오는 답이 없다. 가끔 들려오는 한숨 소리가 아니면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을 거다.
-정확히 뭘 확인하면 되는데요.
"공매도 상품이 거래된 내역만 있으면 됩니다. 아이디까지 나올 필요는 없고요."
-그 정도는 가능해요. 대신에 우리가 정보를 넘겼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당연히 그래 드려야죠."
통화를 마치고 1분도 채 안 돼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에는 ****K**A 같은 식으로 아이디가 가려진 일자별 공매도 거래 내역이 들어 있었다.
"소영 씨, 인터넷상에 악플이 어느 순간부터 확 늘어났다고 했었죠?"
"맞아요. 저번 주 월요일부터였을 거예요."
"월요일이라..."
악플이 늘어난 시기와 공매도 거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
두 시기는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었다.
* * *
도토리 코인을 향한 악성 게시물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기존엔 악성 게시물이 가상화폐 커뮤니티에만 올라왔다면, 이젠 유머 커뮤니티까지 퍼져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잘한다. 잘해. 내가 이래서 인터넷 찌질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니까."
나민성은 인터넷에 올라온 도토리 코인 비방글을 하나하나 살피며 웃음을 터트렸다.
초창기엔 그가 바이럴 업체를 써가며 힘들게 한 땀 한 땀 작업을 쳐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이 알아서 욕설과 비방이 재생성되고 있었다.
저들의 활약 덕분에 도토리 코인의 시세는 2달러 초반대까지 내려왔다.
이대로 시세가 1.8달러 선까지 내려간다면 나민성은 30억에 달하는 수익을 얻게 된다.
'나는 돈과 복수를 얻고, 인터넷 찌질이들은 분노를 배출할 욕 받이를 얻고. 이게 바로 윈-윈이라는 거지.'
다른 가상화폐라면 국내 인터넷 여론 조작만 했다고 폭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토리 코인은 달랐다. 한국의 SNS에 도입한다는 취지로 개발됐으며, 소유자도 한국에 가장 많이 몰려 있었다.
그렇기에 한국 커뮤니티 몇 곳만 집중적으로 폭격해버리면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
"쉽다. 쉬워. 왜 이렇게 쉽냐."
나민성은 콧노래를 부르며 계속 커뮤니티를 돌아본다.
그러다 도토리 코인과 관련된 게시글이 눈에 들어오면 비난 댓글을 쭉쭉 써재꼈다. 이젠 직접 작업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악플을 다는 행위 자체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그에게 도토리 코인 정보 게시글 하나가 포착됐다.
[오늘 저녁 6시에 도토리 코인 개발사에서 온라인 기자회견을 한 대요.]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상대가 드디어 움직였다.
"멍청한 것들, 이제 와서 해명해봤자 너무 늦었어. 그놈들은 욕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거든."
나민성은 인터넷 찌질이들의 특성을 잘 알았다.
해명을 하든, 사과를 하든, 악플러들은 한 번 타겟으로 찍히면 말꼬리를 잡고 끊임없이 악플을 쏟아낼 뿐이다.
시간이 흘러, 기자회견이 예정된 6시가 되자 인터넷 실시간 중계 방이 열렸다.
워낙 인터넷에서 관심도가 높은 이슈였기에중계 방엔 순식간에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지금부터 도토리 코인 개발사인 WHTS컴퍼니의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발언을 시작으로 카메라가 단상을 비춘다.
단상에 올라선 이는 놀랍게도 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의 젊은 여성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도토리 코인의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이소영이라고 합니다.
채팅창엔 이소영의 외모에 관한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대부분이 얼굴이나 다리, 가슴, 엉덩이 같은 신체 부위를 언급하는 성희롱적인 메시지였다.
-저는 인터넷에 퍼진 도토리 코인의 허위, 비방글에 관한 대응을 말씀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희 WHTS컴퍼니는 인터넷에 퍼진 모든 허위 게시글과 악성 댓글의 처벌을 법무법인에 의뢰한 상태이며, 빠르면 이달 말까지 처리를 마칠 계획입니다.
법무법인이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실시간 채팅창에 올라오던 성희롱 메시지가 싹 사라진다.
-그리고 조사 결과 중에 알아낸 중대한 사실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악성 댓글 사건의 배후에는 시세 조작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토리 코인을 대량으로 공매도하고, 악성 루머를 퍼트려서 이득을 취해왔습니다.
이번엔 채팅창에 도토리 코인 투자자들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어쩐지 최근에 여론이 이상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증거가 확실히 있냐는 메시지도 올라온다.
-저희는 이번 기자회견에 앞서, 모든 증거 수집과 법적인 절차를 마쳤습니다.
-앞으로 더는 작전 세력의 농간을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기자회견이 끝났다.
채팅창 반응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었다. 강경 대응이 시원하다는 의견과 아무리 악플러라도 고소까지는 하는 건 너무 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고소 건은 곁다리일 뿐. 이번 인터넷 기자회견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세력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뭐? 좌시하지 않겠어? 너희가 좌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런다고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선전 포고의 당사자인 나민성은 기자회견을 보고 코웃음부터 쳤다.
그는 악플을 달 때 단순히 VPN만 쓴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익명을 보장하는 특수 브라우저를 같이 썼다. 그렇기에 FBI 급이 나서지 않는 이상, 절대 추적당할 일은 없었다.
지잉-. 지잉-. 지잉-.
때마침 휴대폰이 울린다. 나민성은 여유롭게 턱 끝으로 전화를 받았다.
-형님, 방금 기자회견 보셨습니까?
"어. 봤다. 얼굴도 반반하고 가슴도 빵빵한 것이 먹음직스럽게 생겼더라."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잖습니까.
나민성은 한참이나 쿡쿡거리며 웃다가 말을 잇는다.
"이미 안 걸리게 잘 처리해놨으니까 계획대로만 진행 시켜."
-진짜 괜찮은 겁니까?
"사내새끼가 쫄지 좀 마라. 난 이미 공매도에 전 재산 몰빵했다."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요. 이젠 여론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내가 다시 댓글 작업 치면 지들이 막을 방법은 있고? 인터넷 여론 싸움은 공격하는 쪽이 갑이야. 갑. 알겠어?"
인터넷에 허위 비방글을 퍼트리긴 쉽지만, 다시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민성은 누구보다 그런 인터넷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