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
"으... 머리야."
눈을 뜨기도 전에 인상부터 찌푸려진다. 어제 너무 무리하게 술을 퍼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다.
어젯밤, 나는 싸이클럽 개발진과 친목 도모도 할 겸 밥을 먹으러 갔었다.
처음엔 간단히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술이 몇 번 돌다 보니 이야기가 깊어졌고, 나중엔 대책 없이 술을 들이붓고 말았다.
'그나마 오늘이 휴일이라서 다행이지, 이러고 출근까지 해야 했으면 정말 끔찍했겠군.'
뒤늦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낡은 장판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자던 곳은 용인의 오피스텔이 아니라 인천의 본가였다.
방 하나에 좁은 주방이 전부인 허름한 옛집.
벽지는 누렇고, 천장은 습기로 얼룩덜룩, 장판도 오래돼서 쩍쩍 달라붙는다.
빨리 새집으로 이사시켜 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끝끝내 반대하셔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다.
"이런 집이 뭐가 좋다고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바로 그때, 옆에서 웬 사내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냐?"
소리가 들린 뒤쪽으로 고갤 홱 돌리자, 거기엔 박태식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 집엔 오래전부터 쌓아왔던 추억이 녹아 있잖아. 어머님도 그래서 떠나는 걸 주저하시는 거겠지."
"추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난에 찌들어서 지긋지긋하기만 했구만."
"뭐,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니까."
박태식은 냉장고 문을 열더니, 유리병에 담긴 보리차를 꺼내준다.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저놈이 집주인인 줄 알았을 거다.
"어머니는?"
"9시쯤에 나가셨어.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너 좀 챙겨주라고 하시더라."
어머니가 끓여 주는 해장국을 기대했었는데 김이 팍 샌다.
할 수 없이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서 찬장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자꾸 시선이 느껴진다.
"왜 자꾸 쳐다봐? 내 뒤통수에 뭐라도 묻었어?"
"언제 가나 싶어서."
"가다니? 어딜?"
"당연히 회사지. 평일에 바빠서 시간을 못 내면 주말이라도 빡세게 일해야 할 거 아니냐."
저놈이 나를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 났나 보다.
"나 방금 일어났거든?"
"그럼 일단 씻어. 잠도 깨고, 몸도 씻고, 일거양득이네. 그리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면서 회의도 하면 되겠다."
"야, 야, 잠깐만. 밀지 좀 마라."
내가 저항해도 박태식은 막무가내로 나를 화장실로 밀어 넣는다.
"얼른 씻고 나와. 그동안 나는 차 끌고 올 테니까."
"아니, 뭐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당장 처리 안 하면 큰일 나는 일이라도 있어?"
밖으로 나가려던 박태식이 문 앞에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본다.
"어제 말했잖아. 싸이클럽 제대로 키워보자고. 나 진심이다."
* * *
나와 박태식은 집 근처 해장국 가게에 들렀다.
박태식은 간단히 토스트를 먹으며 아침 겸, 점심 겸, 회의까지 같이하자고 했지만, 내가 끝까지 반대해서 해장국 집으로 끌고 왔다.
테이블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콩나물국밥이 올라온다.
벌써 점심때가 다 돼서 그런지 뱃속에서 빨리 국밥을 넣어 달라고 난리를 친다.
"어제도 말했지만, 싸이클럽의 일일 접속자 숫자는 꽤 준수한 편이야. 문제는 접속자들이 노래를 듣거나 사진만 구경하지, 그 외에 활동을 전혀 안 한다는 게..."
국밥이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이 다 까질 것 같다.
우선은 날달걀을 투하하고 추가로 깍두기까지 서너 점 집어넣어서 온도를 낮춘다.
"내 생각엔 비용이 들더라도 마케팅에 힘을 꽉 줘보는 것도 괜찮다고 보거든. 예를 들어 유명 셀럽을 다수 섭외해서 미니홈피를 꾸며 보라고 한다든지."
이제 한 숟갈을 크게 밥그릇에 덜고서, 후후 불어 먹으면.... 와! 뜨거운 국물과 콩나물, 밥의 예술적인 조화.
나는 걸인처럼 나머지 국밥을 밥그릇에 옮겨 담았다.
"야! 신우혁! 내 말 듣고 있냐?"
"듣고 있어. 유명한 애들 구해다가 글 쓰게 한다며."
"글이 아니라 미니홈피를 직접 꾸며 보게 하는 거야. 요즘 애들은 미니홈피를 잘 모르니까 셀럽들이 쓰게 해서 홍보하는 거지."
나는 밥그릇에 옮겼던 국밥을 전부 흡입한 뒤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그거 안 돼."
박태식의 표정이 냉장고에서 몇 개월간 방치된 묵은지처럼 변한다.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다가 대뜸 안 된다고 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나는 녀석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주기로 했다.
"예전에 네이보에서도 SNS 하나 만들었던 거 기억해?"
"네이보에서 그런 걸 했었나? 전혀 모르겠는데."
"투데이ME라는 이름으로 서비스했었어. 트윗이랑 페북이 한창 잘 나가니까 비슷한 느낌으로 만든 거지."
박태식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당시에 탑 티어 아이돌인 지디나 소시 같은 연예인들을 대거 섭외해서 투데이ME에 글을 쓰게 했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긴. 네가 이름도 못 들어봤을 정도면 뻔한 거 아니겠냐."
"아니, 망한 건 알겠는데 연예인들 섭외한 건? 효과가 아예 없었던 거야?"
"효과는 좋았어. 한땐 서버가 못 버텨서 난리도 아니었었지."
나중에 나온 말이지만, 투데이ME가 서비스 내내 모으고 모은 가입자보다 연예인을 따라서 가입한 팬이 더 많았다고 한다.
"홍보 효과가 좋으면 성공한 거잖아. 그런데 너는 왜 안 된다고 한 거야?"
"그건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야. 생각해봐. 신규 회원 대부분이 연예인 팬으로 구성돼 있으면 기존의 일반 회원들은 어떻게 될 거 같아?"
"소외감을 느껴서 떠나겠구나."
"맞아. 그러다 연예인 계약이 끝나면 팬들마저도 우수수 빠지고 SNS는 텅 비어버리는 거지."
애초에 SNS는 본인이 좋아서 글을 남기는 일기장 같은 곳이다.
그걸 계약 때문에 쓰라고 하면 연예인도 홍보용으로만 쓸 뿐, 진심으로 글을 남기지 않는다.
"연예인 마케팅을 하려면 연예인이 스스로 원해서 글을 쓰게 만들어야 해."
"말이 쉽지. 까놓고 말해서 사용자도 없는 싸이에 와서 자의로 글을 쓸 연예인이 누가 있겠어."
나도 동의한다. 현 싸이의 상태는 '영업 중' 간판만 걸어둔 폐업 직전의 오래된 국밥집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의 싸이클럽으로는 마케팅비를 퍼부어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어.'
국밥을 떠먹으며 찬찬히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트윗과 페북 이후에 성공한 SNS들이 어떤 식으로 서비스됐고, 어떻게 성공을 거머쥐었는지를.
* * *
아침부터 급하다고 난리를 치던 박태식은 해장국을 먹은 이후부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연예인 홍보 카드가 안 통한다는 게 충격이었나 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빨리 타."
나는 직접 차를 몰아서 강남역 인근의 오피스텔 단지로 향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여기 회사 방향 아니잖아?"
"싸이클럽을 흥하게 만들어 줄 곳으로 간다."
"뭐?"
방금까지 의기소침해져 있던 녀석의 눈이 말똥 해진다.
"내가 말했잖아. 연예인 마케팅을 하려면 연예인이 스스로 원해서 글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고."
때마침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을 내뱉는다.
나는 오피스텔 주차장 깊숙이 차를 밀어 넣었다.
"그러려면 우리 서비스에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게 먼저야."
"여기서 뭘 만들기에..."
"일단 따라와. 일일이 설명하기 힘드니까."
우리가 도착한 빌딩은 소규모 사무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였다.
입주한 업체는 주로 스타트업 위주였는데, 나는 거기서 5층에 있는 [윙클]이라는 업체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토요일이지만 사무실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다.
흔한 IT 스타트업의 풍경이다.
"실례합니다. 사장님 계십니까."
내 목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그중 나이가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일어선다.
"제가 사장인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는 WHTS컴퍼니의 대표인 대니얼 신입니다."
"아, 예... 저는 윙클의 김준표입니다."
애매했던 사장의 표정이 명함을 보고 확 밝아진다. 내 명함에는 투자 기업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름이 아니라 귀사의 앱을 보고 관심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일단 앉으시죠."
우릴 앉혀두고 사장이 직접 커피를 타는 동안, 박태식이 내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댄다.
"야, 신우혁.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말해줘야 할 것 아냐."
나는 대답 대신에 박태식 휴대폰에다가 이 회사의 앱을 깔아줬다.
윙클.
간단히 설명하자면 카메라 앱을 만드는 스타트업이다.
일반 카메라 앱과 다른 점이라면 스티커 사진처럼 배경을 꾸미거나, 사진에 움직이는 효과를 추가할 수 있어서 10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싸이 앱에 사진 효과를 추가하려고?"
"그럴 생각이다."
"이거 하나 추가한다고 없던 인기가 생길까? 나는 별 영향이 없지 싶은데."
박태식이 앱을 쭉 훑어보는 동안 김준표 사장이 돌아온다.
양손에 커피를 하나씩 들고서.
"저희 사무실엔 아메리카노밖에 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메리카노 좋아합니다."
"아, 다행이네요. 하하하."
내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는 동안 질문이 이어진다.
"그런데 WHTS컴퍼니면 해외 쪽 투자사입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최근에 도토리 코인이랑 싸이클럽을 인수했는데, 못 들어보셨습니까?"
"아하!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다 했더니 유명한 그 회사였군요."
"저희가 어떤 쪽으로 유명하던가요?"
김준표는 어색하게 웃고 만다. 한때 도토리 코인이 사기라는 뉴스가 엄청 나돌았으니, 좋은 쪽으로 유명하진 않으리라.
"외부에서 어떤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는 진지하게 싸이클럽을 키우고자 인수를 진행했습니다. 이미 추가 자금도 확보해둔 상태죠."
"가상화폐로 대박을 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못해도 수십 억의 수익이 났을 거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거기서 단위가 하나 더 올라가야 얼추 비슷하겠군요."
놀란 김준표의 허리가 쭉 펴진다. 이 정도로 크게 성공한 줄은 몰랐나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는 싸이클럽에 귀사의 카메라 앱을 탑재하고 싶습니다."
"제휴를 맺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지분투자 식으로 진행하고 싶은데, 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김준표는 잽싸게 일어나서 내 손을 붙잡는다. 마치, 구원의 동아줄이라도 움켜쥐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이후에도 투자와 기술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나머지 사안은 월요일에 이어서 하기로 하고 사무실을 떠난다.
건물을 나와서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박태식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건 아닌데, 아까도 말했지만 사진에 스티커 넣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어서. 그리고 확인해보니까 비슷한 앱이 여기 말고도 많던데?"
"맞아. 앱스토어에 비슷한 앱은 많지."
"그럼 굳이 여길 왜 온 거야?"
"내가 쭉 둘러봤는데 여기가 그나마 영상에도 뭔가를 꾸밀 수 있는 스티커가 많더라고."
스티커 퀄리티가 좋다고 할 순 없지만, 투자에 따라서 충분히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그걸로 뭘 하려고 그래?"
"싸이를 영상 특화 SNS로 밀어보려고."
박태식은 좀처럼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지 한참이나 '음...' 하는 소리를 내다가 입을 연다.
"신선하긴 한데, 그걸로 인기를 끌 수 있을까?"
"될 거야. 믿어 봐."
2015년엔 아직 생소한 서비스지만, 머지않아 틱톡에 이어 페북과 유투브까지 뛰어드는 것이 짧은 영상 서비스다.
나는 이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서 싸이클럽을 되살려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