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
백승태는 새벽에 회사로 나와서 사원증만 찍은 뒤,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최대한 출국 사실이 늦게 알려져야 했다.
그래야 가짜 계좌에 입금될 돈을 빼돌리고 해외로 도망갈 때까지의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승태의 잔꾀는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 하나 같이 부질없는 짓이었다.
"백승태, 이 새끼야. 네가 아무리 발악해봐야 내 손바닥 안이야."
박민교는 백승태가 회사를 나설 때부터 실시간으로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미행을 붙여뒀고, 그로 인해 홍콩에서 어딜 다녔으며,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도 몽땅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 70억 원짜리 오더도 백승태에게 던진 미끼였다.
KN케미컬 횡령 2인조.
주범은 가짜 법인으로 회삿돈을 챙겨서 해외로 도피, 공범은 국내에서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구속.
이것이 박민교가 짜둔 시나리오였고, 지금까지는 그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 실장, 그런데 백승태가 홍콩이 아니라 선전으로 갔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30분 이내에 선전 바오안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왜 하필 선전일까? 홍콩으로 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혹시 공항에 우리 측 사람을 배치했다는 걸 알아챘나?"
"그럴 리 없습니다. 함정임을 눈치챘다면 출국 시도 자체를 안 했을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하다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홍콩에서 대기 중이던 팀을 선전 공항으로 보냈습니다. 서두른다면 입국 수속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잘 처리해. 괜히 놓치면 피곤해지니까."
"알겠습니다."
박민교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고갤 홱 옆으로 돌린다.
"아, 그리고 저번에 신우혁이 미행 붙이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열흘 넘게 관찰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매일 퇴근하면 판교의 성인 오락실에 들러서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입니다."
저 말을 들으니 예전 라스베이거스 출장 때 놈의 모습이 떠올랐다.
호텔 입구 슬롯머신에 칩을 가득 쌓아놓고 폐인처럼 레버를 당기던 모습.
그 꼴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저절로 '쯧쯧' 거리며 혀 차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계속 감시할까요?"
"그놈은 됐고, 백승태가 한국에서 다른 헛짓거리 해둔 게 있는지나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박민교는 제 할 말만 내뱉은 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는 실시간 가상화폐 시세가 떠 있었다.
처음엔 가상화폐를 돈세탁용으로만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세가 쭉쭉 오르는 재미를 한 번 본 이후로는 골프에 소홀해질 정도로 가상화폐에 푹 빠지고 말았다.
박민교가 휴대폰만 보고 있자, 나준석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중에 다시 보고 드리러 오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앉아 봐."
나준석은 엉덩이만 들썩거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나 실장도 한때 가상화폐 투자 좀 했다며?"
"그렇습니다."
"돈은 좀 벌었어?"
"13년도 후반기까지는 제법 큰 돈을 만졌습니다만, 작년에 거래소 해킹 사건이 터지면서 손실을 크게 봤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거래소 해킹 사건은 가상화폐 투자자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비트코인 시세가 1/10까지 폭락할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니까.
"그땐 가상화폐가 망한다고 난리가 났었다며?"
"저도 그 당시엔 가상화폐 시장이 끝나는 줄만 알았습니다."
"쯧쯧쯧,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하거늘."
"어떤 숲을 말씀하시는지..."
"가상화폐라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봐야한단 소리야. 내가 장담하는데 가상화폐 시장은 절대 안 망해. 이건 태생이 망할 수가 없는 구조거든."
박민교는 잔뜩 거들먹거리며 휴대폰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나처럼 돈세탁하려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업의 불법적인 로비나, 재산 상속에도 가상화폐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가상화폐의 용처를 아는 사람이 적어서 그렇지. 이게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 가치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야."
"작년에 1000달러 근처까지 오른 적이 있었으니 2000달러까지는 노려봄직 하다고 봅니다."
"그쯤은 우습지. 나는 진짜 거물들이 이 판에 들어오면 1만 달러까지도 뛸 수 있다고 봐."
나준석은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실제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박민교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라면 가상화폐를 적극적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후후후."
박민교의 두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만약 그의 예상대로 비트코인이 1만 달러까지 뛰게 된다면, 국내에 내로라하는 재벌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리라.
* * *
좁은 캠핑 트레일러 안.
팔꿈치가 닿을 정도의 좁은 실내와 짙은 화장품 냄새, 거기에 몇몇은 적극적으로 들러붙으며 추파를 보내기도 한다.
나도 남자인지라 평소였다면 그녀들의 요구에 응해서 같이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승부를 앞둔 전시 상황.
이번 일에 내 인생이 걸린 만큼, 나는 최대한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들을 불러 모았다.
"앞서 말했지만, 저는 비트코인의 가격을 폭락시킬 생각입니다."
내가 분위기를 잡은 덕분인지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들던 그녀들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경청한다.
"제가 생각한 첫 번째 작전은 비트코인 매물을 무식하게 쏟아내는 겁니다. 아직은 가상화폐 시장이 크지 않기에, 단기간에 충격만 줘도 시세는 폭락할 수 있습니다."
그때 넬라가 손을 살짝 들고서 말했다.
"우리 쪽 비트코인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정확한 수치는 알려드릴 수 없지만 단기간에 30% 정도는 끌어 내릴 여력이 됩니다."
"30%... 그정도 충격을 주려면 못 해도 비트코인 5만 개는 던져야 해요."
나는 가능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잠시 조용했던 실내가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비트코인이 5만 개나 있는 거야?"
"대박! 우혁, 부자였어.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아들 같은 건가?"
"재벌이 아니라 회사 대표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면 외계인일 수도..."
"도민준?"
"꺅!"
분위기가 산으로 가려는 것을 넬라가 소릴 질러서 가까스로 진정시킨다.
"조용! 잡담은 나중에 해. 우선 우혁 말을 먼저 들어봐요."
그녀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온다. 이 틈에 어서 말하라는 뜻인 것 같다.
"두 번째 작전은 SNS에 루머와 가짜 뉴스를 대량으로 풀어서 판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순간적인 시세 폭락. 정보 폭탄 연계. 굉장히 정석적인 공략이에요."
"가장 효과적이기에 정석이라고 불리는 거죠."
가상화폐처럼 비주류 자산의 정보는 뉴스에서 잘 다뤄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필연적으로 SNS 같은 불확실한 정보 창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알기론 여기 계신 분 중에 네트워크 여론 조작 전문가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시가 옆으로 들러붙는다.
"날 찾았어?"
"그... 어떤 식으로 여론 작업을 하는지 알고 싶군요."
"내가 만든 봇이 관리하는 트윗 계정만 5천 개야. 걔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하루에 30만 건의 메시지를 뿌릴 수 있어."
"스팸 메시지 같은 방식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제시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린다.
"스팸 봇 같은 저급 프로그램과 비교하지 말아줄래?"
"그럼 뭐가 다르죠?"
"내 애기들은 각 분야에 맞는 사용자를 모방해서 팔로우들과 소통 해. 그러다 메시지가 필요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행동을 시작하지."
평소엔 일반인 흉내를 내다가 여론 작업이 필요할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내는 특수한 봇인 것 같다.
"봇이 활동하는 분야에 가상화폐도 있을까요?"
"가상화폐는 아니지만 메인 섹터 중 하나가 IT 관련이야."
"좋네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넬라가 대화에 끼어든다.
"루머로 끌어내린 시세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복구될 거예요. 그동안 상대가 가상화폐 계좌를 열어보지 않으면 어떡해요?"
"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야죠."
나는 비트코인 소유자가 가장 두려워할 만한 루머를 퍼트릴 생각이다.
과연 박민교는 끔찍한 대폭락과 악성 루머를 겪은 뒤에도 '존버'에 성공할 수 있을까?
* * *
KN케미컬의 비공식 퇴근 시간인 밤 9시가 찾아왔다. 사무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직원들이 퇴근하는 소리로 일대가 소란스러워진다.
그러는 동안에도 끝까지 불이 환하게 켜진 사무실이 있었다.
바로 박민교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이유가 뭐야?"
박민교는 아까부터 휴대폰을 쳐다보며,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이해가 안 되잖아. 비트코인 가격이 왜 자꾸 내려가냔 말이다!"
그는 비트코인에 투자한 이후, 단 한 번도 시세 하락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떨어지게 둔 적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시세가 떨어질 때마다 그가 추가매수로 가격을 억지로 끌어올렸으니까.
이번에도 가격이 훅 빠지기에 별걱정 없이 추가매수로 가격 방어를 시도했다.
한 번의 출렁거림만 막아내면 그다음은 다시 기존 가격보다 더 시세가 올라가는 현상을 몇 차례나 경험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 하락은 달랐다.
-10%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20%를 넘어, 이젠 ?30%선까지 그래프가 처박고 있었다.
칙-.
박민교는 떨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인다. 담배에 의존해서라도 마음을 진정시켜볼 생각이었다.
"젠장할, 떨어지는 이유라도 알면 좀 덜 답답할 텐데."
담배를 태우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가격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이러다간 ?40%까지 내려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흔들리지 마. 비트코인은 검은돈 운용에 있어서 최고의 수단이다. 뒷세계에 알려지기만 하면 가치는 무조건 오를 거야.'
박민교는 아예 휴대폰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눈을 감았다. 억지로 잠이라도 자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수십억씩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철컥.
그는 벌떡 일어나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가상화폐에 빠삭한 나 실장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예, 전무님. 무슨 일이십니까.
박민교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를 짜낸다.
"별건 아니고, 비트코인 시세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말이야."
-봤습니다. 상당히 떨어졌더군요.
"혹시 원인이 뭔지 파악됐나?"
나준석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대답을 내놓는다.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 때문인 듯합니다.
"무슨 루머?"
-전무님도 아시다시피 현 비트코인이 초창기에 만들어져서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일단 거래 속도부터 굉장히 느리고요.
"그래서?"
-그런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큰손들이 모여서 기존 비트코인의 하드포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박민교는 소리를 '꽥!' 질렀다.
"야이 씨! 하드포크가 뭔데? 쉽게 좀 설명해봐! 쉽게!"
-한 마디로 비트코인이 구 비트코인과 신 비트코인, 두 종류로 쪼개진다는 뜻입니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박민교는 머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트코인이 2개로 쪼개지면 가치가 반토막 날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몽땅 팔아야 해. 지금 당장.'
박민교는 바로 전화를 끊고 가상화폐 지갑부터 불러왔다.
그의 지갑에는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둔 비트코인 14만 개가 저장돼 있었다.
"빨리. 빨리. 빨리."
지갑 비트코인을 현금화하려면 먼저 거래소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비트코인 특성상 전송에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
"망할!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박민교가 발을 동동 구르는 동안 다시 인터폰이 울린다. 그는 신경질 적으로 전화기를 낚아챘다.
-전무님, 아까 말씀드린 하드포크 말입니다. 정보가 하루 아침에 쫙 풀린 것이 수상해서 다시 알아봤더니... 일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혹시 정보가 허위 정보란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소문에서 언급된 큰손들은 하드포크를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박민교는 휴대폰을 흘깃 쳐다본다. 이미 지갑의 비트코인은 거래소로 전송이 한창이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
"후... 일단 알겠다."
전화를 끊은 박민교는 전송 취소 버튼을 터치했다.
당연히 비트코인 전송이 취소될 줄 알았건만 그의 앞에는 이상한 메시지가 떠오른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취소가 됐으면 됐고, 아니면 아닌 거지 잘못된 접근은 뭐란 말인가.
다시 취소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이거, 왜 이래?"
박민교는 할 수 없이 지갑 앱을 완전히 종료했다가 다시 켠다.
하지만 이번엔 아예 지갑 앱에 접속조차 안되고 아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접속을 몇 차례나 다시 시도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의 메시지가 뜬다.
이쯤되자 박민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겠지. 설마. 단순한 오류일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언제부턴지 휴대폰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해킹'이라는 단어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애써 무시하며 터치를 반복한다.
"오류잖아. 오류 맞지? 빨리 풀려. 풀려. 풀려. 풀려. 좀 풀려, 제발!"
그러다 노트북에 가상화폐 지갑을 백업 시켜뒀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급히 노트북을 전원을 켠다.
그러나 그곳에도 반전은 없었다.
[잘못된 접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