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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출장은 2박 3일의 다소 촉박한 일정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업무 대부분은 이미 현지 변호사가 처리해둔 상태였고, 우리가 할 일은 위임장 서명과 간단한 인터뷰, 그리고 은행에 가서 계좌를 트는 게 전부였다.
덕분에 나는 휴가를 나온 것처럼 편안하게 홍콩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느긋한 나와 달리, 동행한 백승태는 따로 할 일이 있었기에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다.
시간만 나면 어딘가로 사라지기 일쑤였고, 밤에는 몰래 호텔을 나갔다가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기도 했다.
바삐 돌아다니는 백승태의 눈에는 독기가 피어있었다. 동시에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조급함도 느껴졌다.
홍콩을 다녀온 이후엔 내가 바빠질 차례였다.
나는 귀국과 동시에 집도 들리지 않고 바로 한국대학교 인근의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옆에는 공용 주차장이 딸려 있는데, 그곳의 한 귀퉁이에는 버려진 것처럼 낡은 캠핑용 트레일러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똑똑.
트레일러 문을 두드리고 5초 정도를 기다리자 안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화랑. 화랑."
나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 입을 연다.
"담배. 담배."
그제야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레일러 문이 열린다. 안에서 얼마 전 이소영에게 소개받은 넬라가 얼굴을 빼꼼 내민다.
"들어 와요."
트레일러 안은 밖에서 볼 때와 완전 딴판이었다.
인테리어부터 하얀색 타일과 갈색 벽지로 깔끔하게 발라뒀고, 내부 크기도 서울의 어지간한 원룸보다는 나아 보인다.
"저기... 넬라? 여기 올 때마다 방금의 암구호를 꼭 해야 하는 겁니까?"
"꼭 해주세요."
"왜죠. 이유라도 알고 싶은데요."
"한국 드라마. 거기서 에이전트들, 이런 암호 교환이 나와요. 저, 완전 빠졌어요."
그녀가 한국에 와서 지내는 이유가 한국 드라마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진심이었을 줄이야.
바로 그때, 트레일러 안쪽에서 여자 3명이 우르르 걸어 나와서 나를 둘러싼다.
넬라와 비슷한 느낌의 인도계가 하나, 남미 느낌의 여인이 둘이다.
"우혁이죠? 저는 제시예요."
"신기해. 신기해. 진짜 그 사람이 왔어."
"혹시 암구호 써봤어요?"
그녀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간다.
"그야... 저도 군대를 다녀왔으니 당연히 써봤죠."
"그래서 어땠어요?"
"뭐가 어땠냔 말입니까?"
"암구호 쓸 때 느낌! 어땠는지 알고 싶어요. 막 긴장되고 그랬어요? 적군일까 봐 무서워요?"
미안하지만 나는 군 생활을 탄약고 근무와 함께했기에 경계근무에서 긴장이나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반쯤은 졸면서 근무를 섰던 탓에 적군보다는 순찰 간부가 올까 봐 더 걱정이었지.
사실을 말해주고 그녀들의 판타지를 박살 내려던 차에, 안쪽 방에서 이소영이 걸어 나온다.
그녀는 다급하게 두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어서 신호를 보낸다.
'대체 무슨 소릴 했길래 저러는 거야.'
할 수 없이 MSG를 팍팍 뿌린 군 생활 에피소드를 늘어놨다.
내 이야기에서 나는 미확인 생물체에 맞서 본부를 방어하는 특급 사수였고 (실제론 고라니나 멧돼지), 동해 NLL을 침범한 북한 군함을 추적하는 해양특수전대 병사였다. (실제론 버려진 어선과 나무토막)
"와! 대박! 대박! 소영 말이 사실이었어!"
"우혁은 정말 우수한 군인이었네요."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요!"
동시에 여자 넷이서 꺅꺅거려대니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나는 소란을 틈타서 슬그머니 이소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같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거기서 제가 아는 척을 좀 했다가 그만..."
"저를 팔아넘긴 거로군요."
"죄송해요. 나중에 제가 밥 한 끼 쏠게요. 그러니까 이번에만 애들한테 맞춰주세요."
"받고 커피까지."
"콜."
나는 그 이후에도 군대 에피소드를 몇 가지 더 꺼내놨다.
특히 전역 전에 정식 군인으로 남아 달라고 상부에서 몇 차례나 요청받았다는 이야기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뭐, 거짓말은 아니다. 전문 하사로 말뚝 박으라는 제안이 왔던 건 사실이니까.
"자, 군대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젠 업무적인 대화를 해보죠."
"저는 군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세상에, 군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 하는 여자가 있다니.
"그건 나중에 시간이 남을 때 계속해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넬라는 아쉬움을 잔뜩 드러내며 나를 트레일러 안쪽 방으로 데려갔다.
트레일러 안쪽은 컴퓨터와 각종 기계장치가 잔뜩 쌓인 공간이었다. 딱 봐도 평범한 곳은 아니다. 아마도 여기가 그녀들의 메인 작업장인 듯했다.
"여기 화면에 보이는 게 1차 타겟의 디바이스예요. 이미 우리가 모든 제어권을 따놨어요."
"잠깐만요. 1차 타겟이면... 벌써 백승태 휴대폰을 털었단 말입니까?"
넬라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때 줬던 충전기. 그거랑 연결된 휴대폰은 모두 우리가 제어할 수 있어요."
홍콩으로 출국 전, 넬라는 휴대폰 충전기를 하나 주면서 백승태 휴대폰에 연결해 달라고 했다.
나는 충전기로 통화 내역이나 도청 정도를 생각했는데, 아예 제어 권한을 빼 올 줄이야. 진짜 세상이 무섭구나 싶다.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넬라는 현란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설명을 이어간다.
"여기 1차 타겟이 돌아다니면서 근처의 다른 휴대폰을 순차적으로 감염시킬 거예요."
지도상으로 보이는 곳은 KN케미컬 본사 사무실이었다.
"신기하군요. 어떻게 근처에 있기만 해도 감염되는 거죠?"
"무선 공유기의 보안 취약점을 이용하는 거예요. 한국 공유기, 비밀번호 제대로 설정 안 돼 있어요."
당장 우리 집 공유기만 해도 몇 년째 기본 비밀번호를 쓰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삐빅! 삐빅!
모니터에 표시되는 감염 휴대폰이 점점 늘어간다.
백승태가 감염시킨 공유기가 다른 휴대폰을 감염시키고, 그 휴대폰이 또 다른 공유기를 감염시킨다.
이것이 바로 감염의 연쇄.
이런 페이스라면 KN케미컬 전체를 감염시키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듯했다.
계속 모니터를 보던 도중, 감염자 휴대폰 하나가 붉은색으로 깜빡깜빡 점멸하는 게 보인다.
"저건 뭔데 빨간색입니까?"
"1차 타겟 휴대폰에 저장돼 있던 임원 번호예요. 2차 타겟일 수도 있으니 반응하게 만들었어요."
임원급이면 백승태가 있던 사무실 위층에 있을 텐데, 벌써 거기까지 감염이 퍼졌단 말인가.
거기서 30분 정도를 더 기다렸더니 붉게 깜빡거리는 휴대폰의 숫자가 4대까지 늘어났다.
넬라는 거기서 하나를 골라낸 뒤, 강제로 휴대폰 전면 카메라를 켠다.
"이 사람 맞나요?"
화면 속 주인공은 박민교였다.
그는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코를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맞습니다. 저놈이 범인입니다."
내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모니터에 가득 표시되던 감염 휴대폰이 싹 제거된다.
이제 회사에 남은 감염폰은 딱 두 대였다.
박민교와 백승태.
이제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이쪽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됐다.
* * *
박민교의 홍콩 법인은 국내 업체와 정식 계약을 맺고 원자재를 수입했다.
말이 원자재지 진짜 물건이 실린 컨테이너는 한두 개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짜 컨테이너였다.
홍콩 법인은 그럼에도 물건을 받았다고 대금을 송금했으며, 그 돈은 전부 박민교의 지갑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확신이 없었는지 오더 액수가 3, 4억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한방에 70억 원짜리 오더가 홍콩 법인에 들어오게 된다.
"백 부장님 어디 나가셨습니까? 오늘 내내 안 보이시는 것 같네요."
사무실 직원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
백승태가 원래 제 마음대로 싸돌아다니긴 했지만 지금처럼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드물었다.
'분명히 정상출근 했다고 돼 있는데, 아침부터 퇴근 직전까지 코빼기도 안 보일 수가 있나?'
혹시 외근이라도 나갔나 싶어서 관리팀에도 확인해봤으나 외근 신청 기록 자체가 없었다.
존재감이 안 좋은 쪽으로 워낙 강렬한 인간인지라 회사에 있었으면 직원들이 모를 수 없을 텐데...
순간 싸늘한 느낌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설마?"
나는 백승태에게 전화를 걸면서 옥상까지 뛰어 올라갔다.
백승태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옥상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을 바꿔서 이번엔 넬라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방금 자다 깬 듯한 넬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1차 타겟 위치 확인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제가 기숙사라서.
"긴급 상황입니다. 한시가 급해요."
-재촉한다고 빨리 되는 게 아니에요. 노트북 켜고 있으니까, 기다려요.
물건을 정리하는 듯한 부산스러운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그러다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신호는 인천공항 인근에서 마지막으로 끊어졌어요. 비행기를 탔나 봐요.
"그게 언제쯤입니까?"
-대략... 오전 11시경이에요.
11시면 회사에 출근 기록만 남기고 바로 공항으로 뛰었다는 뜻이 된다.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갔구나.'
이번에 처리할 70억 원은 러시아의 익명 가상화폐 거래소에 예치돼 있다.
그러니 백승태는 그 70억 원을 자신의 가짜 계좌로 송금받고, 바로 해외로 튈 생각일 거다.
"2차 타겟이 가짜 계좌로 송금하기 전에 우리가 중간에서 가로채야 합니다."
-한 번 손을 쓰면 상대가 해킹했다는 걸 알아챌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다. 박민교가 쥐고 있는 돈이 못 해도 천억은 될 텐데, 겨우 70억 원만 챙기고 들키는 것은 수지타산이 안 맞다.
그렇다고 백승태가 이대로 먹고 도망가게 둘 수도 없는 일이고.
'하필이면 애매하게 70억 원이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
고민만 깊어지는 가운데 넬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면 비밀번호를 여러 번 잘못 입력해서 거래소 아이디를 정지시키는 건 어떤가요?
나쁘지 않은 차선책이다. 하지만 이미 백승태가 움직인 이상, 박민교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게 변수였다.
최악의 경우 가상화폐 돈세탁을 포기하고 돈을 꼭꼭 숨겨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타겟 계좌에 있는 돈을 전부 빼버립시다."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아는 건 러시아 거래소 아이디와 비밀번호뿐. 나머지 돈을 찾으려면 비트코인 지갑의 정보를 알아내야 해요.
박민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휴대폰으로 비트코인 계좌를 열어보지 않았다.
해킹을 염두에 둔 건지, 아니면 원래 조심성이 많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의 비트코인 계좌 비밀번호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타겟이 비트코인을 쓰게 만들면 된다는 거군요."
-그렇긴 한데... 방법이 있나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죠. 비트코인을 단기간에 폭락시키면 됩니다."
그냥 폭락 수준이 아니라 아예 반의반 토막으로 대폭락시켜버린다면?
그땐 박민교가 아니라 박민교 할애비가 와도 비트코인을 팔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