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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32화 (3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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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태의 시선으로 본 신우혁은 어리숙하고도 어리숙해서 이용해먹기 딱 좋은 얼빠진 놈이었다.

특출난 능력도 없는 놈이, 눈치도 없고, 뒷배도 없으며, 가난한 데다가 허영심까지 많았다.

그렇기에 횡령죄를 뒤집어쓸 대상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수차례 해외 출장을 나가는 동안, 녀석은 단 한 번도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순탄했다. 돈은 돈대로 작업 중이고, 신우혁을 범인으로 몰아넣을 증거도 완벽했다.

이젠 일이 마무리되고 약조된 돈을 받아서 해외로 뜰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었던 '그 사건' 한방으로 지금껏 세워둔 모든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박민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떠났다.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발버둥질이 필요할 때였다.

"우리가 먼저 박민교를 치자."

신우혁은 언제나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백승태를 쳐다본다. 그러다 한참이나 시간을 끌다가 입을 뗀다.

"저... 부장님, 이게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이해가 안 돼?"

"전무님이 제게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정말 어리숙한 놈이다. 아예 이상하다는 낌새도 못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니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과장 승진이라는 당근 하나에 헤벌쭉했던 거겠지.

"네가 지금껏 줄창 해외 출장을 나갔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나가서 하는 일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건 부장님을 도우려고..."

"멍청하긴! 그건 비자금을 만들어 올 때마다 그 자리에 널 세워두기 위해서였어. 그래야 네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이쯤 말해줬으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신우혁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가 그 자리에 따라갔다고 어떻게 죄인이 됩니까? 너무 억지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인의 시선에선 그렇겠지. 하지만 박민교는 달라. 놈은 정치인은 물론이고 검찰의 높으신 분들과도 전부 연이 닿아있어."

"제아무리 검찰이라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희생양이 하나 있다면 덮어씌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녀석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표정이 싹 굳었다.

"저, 저... 제가 살 방법이 있습니까?"

"박민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한국에서 발붙이고는 못 살아. 한탕 거하게 챙겨서 해외로 뜨는 수밖에."

백승태는 일부러 담배 연기를 뿜어가며 뜸을 들이다가 말을 잇는다.

"홍콩에 만든다는 해외 법인 있지? 박민교는 거길 비자금 허브로 만들 생각이다. 사방에 뿌려뒀던 검은돈이 다 거기로 모여들겠지."

"우리가 그곳을 관리하게 되는 겁니까?"

"관리는 개뿔. 우리는 설립 당시에 이름만 올리는 바지사장이야. 허위 장부를 만들고, 선적량 누락으로 돈을 빼먹고, 그러다 회사를 터트리고 도망가면 어떻게 되겠어?"

"책임을 우리가 다 덮어쓰겠군요."

"그것만 덮어써도 최소 징역 10년. 국내에서 벌인 더러운 짓까지 더해지면 못해도 15년은 확정이다."

"징역 10년..."

신우혁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우면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두렵기도 하겠지.

"그런 꼴을 당하기 싫으면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말입니까?"

"홍콩 법인으로 들어가는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면 돼. 우리가 서류만 미리 조작해두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

거의 다 넘어왔다. 이럴 때 마지막으로 당근을 툭 던져주면 게임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비자금 규모가 2, 300억은 될 테니까, 네 몫으로도 100억은 떨어질 거다."

"헛! 100억요?"

"그래, 그 돈이면 동남아에서 젊은 계집 서넛을 끼고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어. 그게 싫으면 캐나다 같은 곳으로 가도 되는 거고."

백승태는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일으킨다.

"어쩔 거야? 같이 할 생각 있어?"

신우혁은 질문을 내뱉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리숙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이야. 백승태는 속으로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구명보트인 줄 알고 올라탄 모양인데, 미안해서 어쩌냐. 나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는데.'

* * *

아침부터 박민교와 백승태, 연이어 2라운드를 뛰었더니 뒷골이 저린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리고 백승태가 내게 접근한 진짜 의도가 뭔지를 전부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어쨌거나 박민교와 백승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은 확실해. 그게 아니라면 백승태가 갑자기 미쳐서 급발진할 이유가 없잖아.'

원인은 라스베이거스 폐건물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 거다.

쌍욕도 모자라서 서로 멱살을 붙잡고 똥칠까지 해댔으니, 평생을 금수저로 살아온 박민교로선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 당시엔 골려 먹을 생각으로 했던 일인데, 어쩌다 보니 반간계를 쓴 셈이 됐네.'

탕비실에 들러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뽑아 든 뒤, 다시 사무실로 향한다.

그새 사무실은 직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신 대리님, 굿모닝."

"반갑습니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아침 인사가 오간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나는 사무실 직원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다.

부서가 다르다 보니 업무적으로 부딪힐 일이 없기도 했고, 부조금을 몇 번 빵빵하게 넣어줬더니 그 뒤론 쭉 이런 상태다.

물론 서른 명이 넘는 사무실 직원 모두와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다. 유독 몇 명만은 내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이야, 신 대리는 여유가 넘치네? 늦었는데도 느긋하게 커피나 뽑아 마시고 말이야."

방금 언급한 그 멤버 중 한 명인 하승찬 대리가 나타났다.

아무튼, 양반은 못 될 놈이다.

"저기 제 가방요."

"가방이 뭐?"

"제 자리에 가방 있다고요. 안 보이십니까?"

하승찬은 내 의자에 놓인 가방을 보더니 미간을 찡그린다.

"뭐? 가방만 던져 놓으면 땡이야?"

"사원증도 찍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후... 답답해라. 회사에 와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면, 미리 업무 준비를 해놔야 할 것 아냐. 커피나 뽑아 마실 게 아니라."

이 인간이 하는 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정작 하나하나 따져보면 대부분 헛소리였다.

"과장님은 밖에서 담배 피우고 오신 것 같은데, 커피나 담배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나는 회의하고 온 거야. 회의."

"회의를 요가 선생님과 하고 오셨나 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직원들이 '풉!' 하고 웃음 참는 소리가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하승찬은 얼마 전, 회사 근처 요가센터 선생에게 들이댔다가 차였던 전적이 있었다.

"아 참. 요가 그만두고 얼마 전부터 헬스 다닌다고 하셨죠? 제가 깜빡했네요."

"이... 이게, 어디서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했더니 네가 퍼트리고 다녔구나?"

"이상한 소문이 아니라 그 요가 선생님이 페북에 직접 올린 내용입니다. K모 업체의 과장님이 부담스럽게 들이댄다고요. 참고로 회사 남자 중에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은..."

"어허! 조용, 조용히 해!"

하승찬은 급히 펄쩍펄쩍 뛰며 내 말을 끊는다.

그래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K모 업체 과장이 하승찬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말이다.

"야, 신 대리. 아침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나 해댈 거야?"

"그게 이상한 소리였습니까?"

"업무에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평소였다면 이쯤이면 물러났을 텐데, 오늘은 아픈 곳을 찔려서 그런지 헛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나도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짜증이 났던 터라 더 세게 쪼아주기로 했다.

"하승찬 과장님,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제게 반말하지 마시고, 존댓말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같은 직급이면 존댓말 정도는 기본 매너 아닙니까?"

"같은 직급?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과장이라도 달았다는 거야?"

순간적으로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쫙 퍼졌다.

하승찬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도 믿기 힘들다는 분위기다. 내가 올해로 입사한 지 겨우 4년 차였으니 못 믿는 게 당연했다.

"소식이 많이 늦으시네요."

"어, 어디서 헛소리를..."

"안 믿기면 회사 인트라넷이라도 확인해보시죠."

이미 눈치 빠른 직원 몇몇이 인트라넷 확인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와! 진짜네?' 같은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제가 과장님 후배였으면 말을 터도 되겠지만 우리가 또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

"아니다. 그냥 말을 안 걸어주시는 쪽이 낫겠네요. 과장님도 그게 편하시죠?"

하승찬은 입을 굳게 다물고서 제 자리로 도망가 버린다.

과장을 달았다고 자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원해서 얻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저런 귀찮은 것들을 털어낼 수 있다면 앞으로도 잘 써먹을 생각이다.

* * *

점심시간이 되면 전 직원이 우르르 구내식당으로 몰려간다.

내 눈엔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이런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평소라면 나도 저 무리에 가세해서 밥을 먹었을 거다. 하지만 오늘은 방향을 돌려서 회사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철컥.

주변을 한번 확인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안주머니를 뒤져서 펜을 꺼낸다.

출근할 때면 늘 가지고 나오는 펜이다. 외관만 보면 평범한 볼펜 형태였지만 이렇게 뚜껑 부분을 5초간 꾹 누르면.

반짝.

숨겨져 있던 LED가 점등되며 진짜 기능이 활성화된다.

-네가 지금껏 줄창 해외 출장을 나갔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건 비자금을 만들어 올 때마다 그 자리에 널 세워두기 위해서였어. 그래야 네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녹음기 펜에서 백승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흘러나온다.

이 정도 발언이면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쓰고도 남았다.

'어떻게 할까. 바로 터트려 버려?'

내가 언론에 제보하는 즉시 횡령 건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돼 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1000억 대 횡령인데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겠는가.

하지만 횡령 사실이 드러나는 것과 박민교, 백승태가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백승태는 몰라도, 뒷배가 확실한 박민교까지 엮어 넣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박민교를 살려두면 언젠간 내게 복수하려 들 거다.'

트럭으로 사람을 밀어 죽일 정도의 악독한 놈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게다가 그 복수의 대상이 나 하나면 몰라도 내 주변 사람들까지 넓어진다면 정말 최악이었다.

'일을 벌일 땐 끝까지 갈 각오로 해야 해. 그게 아니면 내게 피해가 없는 방법을 찾거나.'

차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로 생각에 잠긴다.

끝장을 볼 여러 가지 방안들, 거기엔 극단적인 것들도 포함돼 있었다. 말 그대로 끝장이다 보니 이쪽 방안은 최대한 뒤로 미뤄둬야 했다.

'내게 피해가 없게 하려면... 백승태를 이용하는 게 딱 맞는데 말이지.'

백승태의 목적은 박민교의 비자금을 털어서 해외로 튀는 것.

그 과정에서 나를 포섭하는 이유는 박민교에게 정보가 넘어가는 것을 막고, 일이 끝나면 꼬리 자르기 용으로 던질 생각일 거다.

'만약, 일이 꼬여서 백승태의 퇴로가 막히면 어떻게 될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그러니 백승태도 그때가 되면 박민교를 물어뜯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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