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출소 후 코인 재벌-31화 (3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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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용인 인근의 골프장은 홀마다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요즘은 개나 소나 골프 친답시고 설쳐댄다니까. 쯧쯧쯧."

박민교는 한참이나 혀를 차다가 골프채를 잡는다.

자세부터가 아마추어와는 급이 달랐다. 밥 먹고 골프만 치러 다닌 덕분에 그는 이미 준프로급 실력의 소유자였다.

팍-!

호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날아간다.

한창 공의 궤적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전무님 나이스샷! 진짜 나이스샷입니다!"

같이 따라 나온 백승태 부장이었다.

박민교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만든 채 그를 돌아본다.

"백 부장, 내가 공 떨어지기 전에 떠들지 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전무님 스윙이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그만..."

예전이었다면 좋게좋게 웃으면서 넘어갔을 일이다.

하지만 박민교는 미국에서 그 사건을 겪은 뒤로,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밉상으로밖에 보였다.

"뭐 하고 있어. 차례가 왔으면 빨리빨리 준비해야지."

"옙! 알겠습니다."

백승태는 골프채를 들고서 허겁지겁 볼 앞으로 향한다. 누가 보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박민교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박민교는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은 절대 다시 품지 않는 성격이었다.

'저 꼴 보기 싫은 놈을 빨리 치워버리면 좋을 텐데.'

박민교는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백승태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백승태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처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도 옆에 딱 붙들고 있어야 했다.

"나이스 샷입니다. 정말 폼이 장난 아니십니다. 하하. 하하..."

박민교와 백승태의 불편한 라운딩이 계속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공이 홀컵 근처까지 갔을 때쯤, 저만치 멀리서 시커먼 차림의 사내가 다가오는 게 보인다.

딱 봐도 골프를 치러 온 차림은 아니다.

"전무님.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나 실장이 왔나 보군."

"나준석 실장이요? 그 사람이 여길 왜 옵니까?"

"자넨 몰라도 되는 일이니까, 저기 가서 다음 홀로 갈 준비나 미리 해둬."

박민교는 백승태를 일부러 멀리 보내버리고 나준석을 맞이한다.

"나 실장, 왔는가."

"예, 전무님. 그간에 무탈하셨습니까."

"무탈할 리가 있나. 요즘 스트레스 때문에 잠이 안 와서 미치겠어."

"그럴 땐 물 좋은 곳에서 요양 좀 하다가 오시지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내가 일이 원체 바빠서 말이야."

박민교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주제를 본론으로 이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기에, 주말에 연락을 다 했어?"

"전에 말씀드렸던 그 계좌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방금 언급된 '그 계좌'란 횡령금을 털어서 비트코인으로 바꿔 간 가상화폐 지갑을 뜻했다.

"그 계좌에서 처음으로 움직임이 잡혔습니다."

"그 썩을 놈이 현금을 인출했구나?"

"현금은 아니지만 다른 가상화폐를 대량 구매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잠시 흥분으로 물들었던 박민교의 인상이 다시 찌푸려진다.

"현금으로 출금하지 않으면 추적해도 의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번 움직임은 현실화폐로 출금 전,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사전절차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호라. 그러니까 곧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범인이 어떤 가상화폐로 갈아타든 간에 최종목적이 현실화폐 환전임은 변함없습니다."

가상화폐의 문외한인 박민교도 환전이 필수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다. 가상화폐 자체로는 사용처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찝찝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혹시 놈이 거래소를 갈아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때도 추적할 수 있는 건가?"

"현존하는 가상화폐 거래소 중 100억 원이나 되는 큰돈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 열에 아홉은 추적이 가능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했지만, 저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소액은 추적조차 안 된다는 뜻 아닌가.

이쯤 되면 이름만 가상화폐지 대놓고 자금 세탁을 하라고 만든 화폐나 마찬가지였다.

'잠깐만. 그렇다면 내가 이걸 쓰면 되는 거잖아.'

순간적으로 박민교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서너 가지나 불쑥 떠올랐다.

그중 한 가지 계획은 그의 마음에 쏙 들다 못해, 너무 완벽해서 박수가 절로 쳐질 정도였다.

가상화폐로 돈세탁을 하면서, 동시에 골칫거리들도 처리하는 완벽한 계획.

박민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골프장 구석에서 쉬고 있는 백승태 쪽으로 향했다.

"드디어 저걸 치워버릴 수 있겠군."

* * *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아침, 나는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

공기는 서늘하고 도로도 한산하다. 모든 환경이 쾌적했지만 내 기분만은 쾌적하지 못했다.

'박민교가 무슨 일로 나를 불러낸 걸까? 그것도 아침 일찍부터.'

평소였다면 또 이상한 헛짓거리를 시키겠거니 하고 생각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틀 전, 횡령 계좌에서 빼돌린 비트코인을 움직였다.

만약 그 계좌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알아내서 부른 거라면?

'아니야. 나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월요일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거야. 그 전에 납치해서 어디 시골 창고에 가둬버렸겠지.'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정확히 6시 40분이었다.

어제 백승태가 신신당부해서 서두르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남는 시간에 커피라도 마실 생각으로 일어나던 차에, 탕비실에서 나오는 백승태와 딱 마주쳐 버렸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일찍 왔네."

"중요한 일인 거 같아서 서둘렀습니다."

"그래, 잘했어. 회사 생활은 눈치가 있어야 살아남는 거야."

백승태가 내게 칭찬을 해주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어제 말씀하셨던 와 보면 안 다는 게 무슨 일입니까?"

"음..."

백승태는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이내 고갤 내젓는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 일단 올라가자."

"알겠습니다."

전무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백승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일 이야기나 시시콜콜한 지적질이라도 했을 텐데, 뭔가 큰 건이 오긴 오나 보다.

똑똑.

"백승태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전무실 안으로 딱 들어가는 순간.

앉아 있던 박민교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맞이한다.

"오! 어서 와. 신 대리. 아니지, 오늘부터는 신 과장이라고 해야 하나."

옆에서 같이 들어온 백승태가 말을 덧붙인다.

"너, 오늘부터 과장이다. 전무님이 특별히 승진시켜 주신 거야."

신우혁 과장.

예전의 나였다면 뛸 듯이 기뻐서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다녔을 거다. 그만큼 입사 4년 차에 과장 진급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고속 진급의 진짜 이유를 아는 나로선 전혀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내가 과장을 달고, 정확히... 다섯 달 뒤에 팀장으로 직급이 또 올라갔었지.'

당연히 팀장을 그냥 달아준 건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해외 바이어와의 대단한 성과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백승태 자리를 그대로 넘겨줬었다.

그리고 그 이후, 정확히 한 달 뒤에 횡령 사건이 터졌다.

내가 추측을 해보자면 겨우 대리 따위가 1800억을 횡령했다면 말이 안 되니까, 직급이라도 '통합관리부 팀장'을 박아서 재판에 세우려고 그랬던 것 같다.

"신 과장. 왜 그리 멍하게 있어?"

내가 잠시 옛 생각에 빠진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아, 이게. 너무 얼떨떨해서... 실감이 안 납니다. 하하하..."

"처음엔 어색해도 며칠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감사합니다, 전무님."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어리숙한 직원을 연기해낸다.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면 그만이었다.

"자자, 인사는 이만하면 됐고. 얼른 앉아 봐. 지금부터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박민교는 잔뜩 분위기를 잡은 뒤, 담배까지 한 대 꼬나물고서 말을 꺼낸다.

"내가 신 과장을 왜 밀어줬다고 생각해?"

"저번 미국 출장 때 있었던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맞아. 힘들고 어려울 때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게 한 팀으로 일할 때는 진짜 중요한 거거든."

박민교의 시선이 슬쩍 백승태에게 갔다가 돌아온다. 백승태는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기 바쁘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번에 홍콩 무역업체를 하나 굴릴까 생각 중인데 말이지. 신 과장이 거기 책임자로 들어가 줬으면 해."

"홍콩에서 쭉 있으란 말입니까?"

"아니, 계속 있으란 소린 아니고. 왔다 갔다 하면서 좀 봐달라는 거지."

지금껏 해외 출장은 자주 보냈어도, 이번처럼 해외 업체를 맡긴 적은 처음이다.

박민교는 무슨 꿍꿍이일까?

정보가 더 필요했다. 나는 최대한 의심 받지 않는 선에서 질문을 내놓는다.

"거기가 어떤 회사인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쓰는 재료나 수입품을 대주는 일을 할 거야. 나도 곧 은퇴해야 할 텐데 비빌 언덕은 있어야지 않겠어?"

대충 요약하자면 해외 업체를 만들어서 KN케미컬에 빨대를 꼽겠다는 뜻이었다.

사장 친인척이 회삿돈 슈킹하는 거야 흔한 일이다만, 문제는 거기에 왜 나를 끼워 넣냐는 것이었다.

'나는 늦어도 내년이면 횡령범으로 빵에 들어갈 사람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 요직에 배치할 리는 없어.'

구린내가 진동하는데 정확히 어떤 냄새인지 감이 안 잡힌다.

그 뒤로 한참이나 사업이 어떻고, 무역이 어떻고를 나불나불 떠들던 박민교의 입에서 결정적인 단어가 흘러나온다.

"내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서 이번에 가상화폐를 도입할 생각이거든."

* * *

전무실을 나선 뒤, 곧장 옥상으로 걸음을 옮긴다.

'박민교의 꿍꿍이가 가상화폐였다니.'

분위기를 보면 내가 가상화폐로 돈을 빼돌린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똬리를 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상화폐를 사용하면 순식간에 회삿돈을 꿀꺽 삼키고 세탁까지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민교가 가상화폐를 쓰게 되면 내가 횡령범으로 몰리는 시기가 빨라질 수도 있어.'

내가 과장으로 진급한 시점에서 이미 초읽기는 시작됐다.

이젠 정말 증거 수집 따위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내가 먹히지 않으려면 그 전에 내가 먹어 치우는 수밖에.

'박민교를 치려면 나도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다.'

예전엔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 인생쯤은 갈아 넣겠노라고 쉽게 말했었는데, 이젠 잃을 게 많아서 그런지 선뜻 들이박기가 겁난다.

"음..."

뒤늦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다.

그때, 옥상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야, 신 대리. 걸음이 뭐 이리 빨라."

백승태가 숨을 헐떡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온다.

"저 이제 대리 아닙니다."

"어쭈. 이놈 봐라."

늙은 너구리처럼 웃은 백승태는 내게 불을 빌려서 담배를 태운다.

그는 슬쩍 내 눈치를 살핀 뒤 입을 연다.

"어쩔 생각이야?"

"뭐가요?"

"박 전무가 했던 제안. 그거 할 생각 있냐고 물은 거다."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회사 그만두기 싫으면 해야죠."

나는 그와 오래 말을 섞기 싫어서 반 넘게 남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딱 돌아서 가려던 차에 백승태가 나를 막아선다.

"너, 그거 하면 큰일 난다."

"안 해도 큰일 나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가 생각하는 큰일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건드렸다간 10년은 감옥 생활해야 할 거다."

뭐지? 이 인간이 갑자기 미쳤나.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백승태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같아? 박민교는 가상화폔지 뭔지로 너랑 나랑 엮어서 처넣을 생각이야."

"증거 있습니까."

"차고도 넘치지. 놀라서 까무러치지만 마라."

백승태는 기다렸다는 듯, 제 휴대폰을 켜서 녹음 파일을 재생한다.

음성 파일의 주인공은 박민교였다.

-가상화폐를 해외 법인으로 받으면 깔끔하게 해결되는 거야. 나중에 회삿돈 사라진 게 들키면 어떻게 되냐고? 그땐 법인 운영한 놈들이 다 뒤집어쓰는 거지.

박민교가 저런 목적으로 나를 끌어들였다는 것쯤은 예상했다.

그걸 백승태가 가르쳐 줄 줄을 몰랐을 뿐.

"이제 상황 파악이 됐냐? 이대로 있다간 너랑 나랑 손잡고 나란히 지옥행이다."

"그래서 부장님은 어쩌실 겁니다."

"후... 어쩌긴. 저 새끼가 우리 뒤통수 후려 까는데 가만히 맞아 줄 순 없는 거잖아."

백승태는 안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한 개비 꺼낸다. 그리고는 무는 방향을 내 쪽으로 돌려서 내밀었다.

"우리가 먼저 박민교를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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