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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피버는 2015년 기준, 거래량 3위의 가상화폐 거래소다.
다른 대형 거래소들이 오랜 운영 기간을 앞세워서 회원을 모았다면, 코인피버는 다양한 가상화폐 취급으로 단기간에 성장한 케이스였다.
지금껏 코인피버에 등록된 가상화폐만 해도 무려 90종으로.
아예 홈페이지 메인에 신규 코인 섹션이 따로 있을 만큼, 신규 코인 유치에 적극적인 거래소였다.
높은 인지도, 많은 거래량, 신규 상장에 우호적인 성향.
코인피버는 도토리 코인을 상장하는 데 최적의 거래소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을 두고 꾸물거릴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곧장 미팅 일정을 조율했고, 바로 다음 날 화상 통화로 최고책임자 미팅을 진행키로 했다.
-반가워요. 저는 코인피버의 제인이에요.
"WHTS컴퍼니의 대표 대니얼 신입니다."
코인피버에선 최고책임자치곤 젊은 여인이 대표로 나왔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많게 잡아도 3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와츠의 대표가 굉장히 젊은 분이셨네요. 혹시 대학생은 아니시죠?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너무 어려 보이셔서 제가 실수를 했네요. 사실은 고등학생이냐고 물어볼까 했거든요.
"농담이 심하시군요."
-이번은 좀 그랬나요? 호호호.
규모가 큰 업체였기에 격식을 차린 미팅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어진다.
-도토리 코인의 소식을 처음 듣고는 정말 어메이징이었어요. 코인 공개 30분 만에 솔드아웃됐다고 했던가요?
"국내 거래소에선 완판까지 딱 3초 걸렸습니다. 물량이 모자라서 난리가 났었죠."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2차, 3차로 ICO를 진행하실 만도 한데, 어째서 저희 쪽에 상장하시려는 걸까요.
그녀의 말처럼 신규 코인은 ICO가 성공하면 2차, 3차, 심하면 5차까지 계속 ICO를 이어가면서 자금을 수혈하는 것이 정석이다.
"ICO를 자주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발행처에 돈이 없거나, 아니면 투자만 잔뜩 받아먹고 튀려는 스캠 코인이거나죠."
스캠 코인은 투자금만 받고 잠적하거나 파산 신청을 하는 사기 목적의 코인을 뜻한다.
"하지만 도토리 코인은 이미 충분한 자금과 개발진을 보유했기에, 굳이 ICO를 반복해서 코인의 신뢰를 훼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엄청난 자신감이네요.
"확실한 근거에 기반한 자신감이죠."
제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화면 너머에서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그 자신감이 혹시 한국의 유명 SNS와 제휴 때문인가요? 싸이클럽? 와츠가 거기에 최대 주주라고 하던데요.
"그런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싸이클럽은 가입자만 3200만 명, 한국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이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저희도 알고 있어요. SNS의 점유율이 점점 떨어져서, 지금은 실사용자가 아주 적다는 것까지도요.
그 후에도 제인의 송곳 같은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개발진의 규모와 책임자는 누군지, 재무 상황은 어떠하며, 개발 진척은 순조로운지 등등.
처음엔 최대한 상세히 대답해줬으나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지다 보니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제인, 미안하지만 뭐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지금 코인피버에 상장된 다른 가상화폐들도 이렇게 자세한 인터뷰 과정을 거친 겁니까?"
제인은 그 말을 듣더니 제 입을 툭 치며 웃기 시작한다.
-아, 대니얼. 미안해요. 제가 미팅 초반에 수다를 떤다고 한가지 말을 빼먹어버렸어요. 진짜, 진심으로 미안해요.
"무슨 말을 빼먹으셨다는 건지."
-저희는 도토리 코인을 100번째 상장 코인으로 낙점했어요. 당연히 그에 걸맞은 대규모 프로모션도 같이 진행될 텐데, 그런 코인에 하자가 있거나 스캠이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되잖아요.
100번째 상장 코인. 대규모 프로모션.
저 말을 들으니 코인피버 측에서 꼼꼼하게 검증하려 들었던 행동이 모두 이해된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직원이 한국으로 실사를 나갈 예정이거든요. 일정 괜찮으시겠어요?
"언제든지요."
-정말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마음에 들어요.
마침 개발실도 새로 마련했고, 개발 인력도 대거 보충하고 있으니, 보여주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딱 좋다는 소리가 쏙 들어가게 된다.
-SNS 이름이 싸이클럽이라고 했던가요? 어떤 모습일지 정말 기대되네요.
* * *
나는 도토리 코인의 개발진과 개발 환경, 청사진, 회사의 재정 건전성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퍼즐 조각을 준비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내가 어쩌지 못 하는 퍼즐 조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싸이클럽이다.
코인피버 측에서 실사를 나오면 당연히 싸이클럽 사무실도 들리려 할 터.
그때 싸이클럽의 신규 프로젝트 상태가 심각하다면 도매금으로 묶인 WHTS컴퍼니의 이미지에도 큰 손해였다.
자칫 잘못하면 상장계획이 취소될지도 모르는 상황.
나는 그런 불상사를 미리 대비하고자 싸이클럽 사무실을 찾아갔다.
딸랑.
오랜만에 방문한 싸이클럽 사무실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개발실은 창고처럼 어수선했고, 여전히 군데군데 빈 자리도 보인다.
'지금쯤이면 한창 바쁠 시기일텐데... 그런 낌새가 전혀 없군.'
내가 사무실로 도착하고 5분 정도가 더 흘렀을 무렵에야 정지승 대표가 걸어 나온다.
"반갑습니다, 정 대표님."
"아, 예. 오셨네요."
반응이 예전과 달리 미적지근하다. 미리 간다고 연락까지 했는데 늦게 나온 것도 그렇고.
다른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리 앉으시죠."
그는 턱짓으로 자릴 안내해주고는 먼저 털썩하고 의자에 앉는다.
"신규 프로젝트 상황을 체크하러 오신 거죠?"
"그런 것도 있고, 그간에 제가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아서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인사는 전화로 편하게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이왕 오신 거 한번 쭉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정지승은 안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느긋하게 불을 붙이고 말을 이어간다.
"오픈 일정은 기존에 공지한 대로 10월 5일로 확정됐습니다."
"정확히 2주 남았군요."
"예예, 그렇죠. 개발은 한참 전에 마무리됐고, 이젠 서버에 올려서 막바지 테스트만 보고 있으니까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는 구석에 굴러다니던 태블릿을 내게 넘겨준다. 태블릿 화면에는 이번에 공개될 싸이온 서비스가 떠 있었다.
"음..."
어디서 본 듯한 메뉴 구성은 그렇다 쳐도, 싸이클럽을 대표하는 방명록과 쪽지는 아예 찾을 수 없고, 미니홈피도 구색만 갖춰둔 수준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메뉴 선택 후에 웹 페이지가 뜨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페이지 전환 속도가 너무 느린 것 같군요. 테스트 서버라서 그런 겁니까?"
"그건 속도제한을 걸어둬서 그래요."
"한국 사람들이 다른 건 몰라도 느린 건 못 참을 텐데요."
"어쩔 수 없어요. 싸이클럽은 가입자만 3천만 명이 넘는데, 그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리면 서버가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클릭과 동시에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페북과 트윗을 두고, 느려 터진 싸이온을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장담하는데 한국인은 페이지 로딩이 3초만 넘어가도 창을 닫아 버릴 거다.
'그래도 출시는 정상적으로 준비되는 거 같고, 겉모습도 멀쩡해 보이니 큰 문제는 없겠어.'
나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태블릿을 다시 그에게 돌려준다.
"신규 서비스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어, 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군요. 기존에 잘나가는 SNS와 싸이클럽의 장점을 잘 버무린 느낌입니다."
"핫핫! 정확한 평가입니다. 역시 신 대표님은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좋게 말해서 잘 버무린 거고, 솔직한 표현으로는 이도 저도 아닌 잡탕과 같은 상태다.
아마 이 상태로 출시하면 싸이클럽은 망하겠지. 아니, 그냥 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폭삭 망할 거다.
'내가 투자금을 댐으로써 뭔가 변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나비효과는 없었던 건가.'
이대로 싸이클럽의 신규 서비스가 망해도 상관없다. 약속했던 20억을 추가로 투자해서 지분을 싹 쓸어오면 그만이었으니까.
* * *
싸이클럽의 새로운 서비스 '싸이온'의 오픈 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간에 다방면으로 홍보가 이뤄진 덕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호기심 반, 우려 반으로 싸이온 오픈 일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싸이클럽의 추억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싸이온의 오픈 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국내 최대의 가상화폐 커뮤니티 비트코인 러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싸이클럽 오픈까지 10일. 떡상의 그날이 올 때까지 숨 참고 기다립니다.
-도토리 코인 사두셨나 보네요. 진짜 부럽다. 저는 그날 일 한다고 하나도 못 담았어요. 징징.
-저는 분위기 보고 사려다가 매진.
-아직 안 늦었습니다. 개인 거래로 살 수 있어요. 가격이 이미 몇 배나 오르긴 했지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의 절반 이상이 도토리 코인 이야기였다.
그만큼 도토리 코인은 ICO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국내 가상화폐 투자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너무 희망 회로만 돌리시는 거 아닙니까? 이러다 싸이온이 망하면 도토리 코인도 같이 개박살 날 텐데요.
-소식이 많이 늦으시네요.
-무슨 소식요?
-도토리 코인이 코인피버에 정식 상장된다는 찌라시가 있어요. 코인피버 직원이 인천공항에 온 걸 누가 봤다고 하더라고요.
가상화폐 거래소에 코인이 상장되면 십중팔구는 시세가 폭등하게 된다.
물론 얼마 못 가고 다시 폭락하는 코인도 있지만, 이번 도토리 코인은 싸이온 오픈이라는 호재가 있었기에 폭등 쪽에 무게가 실렸다.
-진짜 대박이네요. 코인피버면 미국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거래소잖아요.
-미국이 아니라 세계에서 3위급입니다.
-코인피버 상장이 사실이면 그날로 떡상 가는 거죠. 최소가 5배, 많게는 10배 예상합니다.
-엥? 제가 아는 찌라시에는 코인피버가 아니라 한국 거래소에 상장한다고 하던데요? 비트힛에 독점으로 상장한다고...
-어느 찌라시가 맞는 거예요?
코인피버와 비트힛.
상반된 정보가 나오자 게시판에는 어떤 정보가 맞느냐로 한참이나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제가 딱 정리해줍니다. 코인피버는 그냥 찌라시고, 비트힛 상장은 국내 언론사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비트힛 쪽이 싸이클럽 공식 가상화폐가 될 거고요.
-싸이클럽 공식은 도토리 코인 아니었어요?
-도토리 코인은 와츠라는 해외 업체가 만들어서 내놓은 겁니다. 이번 비트힛에 상장될 코인은 싸이클럽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거고요.
기존의 도토리 코인에 이어 등장할 새로운 싸이클럽 코인.
하나의 SNS 플랫폼에서 가상화폐를 2개나 발행한다는 소식에, 커뮤니티 게시판은 발칵 뒤집히게 된다.
-만약에... 새로운 코인이 공식으로 지정되면 기존에 나온 도토리 코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용처가 없으니까 똥값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