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
판교에 얻은 사무실은 본래 책상과 전화기, 노트북 하나가 전부인 조촐한 사무 공간이었다.
그러나 개발팀을 추가 채용한 이후부터는 사무실에 컴퓨터가 하나둘 늘어가더니,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개발실과 같은 모습이 돼 있었다.
"도토리 코인의 보안 취약점을 노린 해킹 공격은 무난히 해결됐습니다. 그 결과 소폭 하락하던 도토리 코인의 시세는 다시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으며..."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그나마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은 중앙에 놓인 원형 책상이 유일했다.
지금은 그곳에 전 직원이 모여 앉아서 회의가 한창이다.
전 직원이라고 해봐야 나, 박태식, 이소영, 그리고 개발자 3명과 개발 보조 2명까지 8명이 전부인 조촐한 인원이다.
좋게 포장하면 IT 벤처기업 같은 분위기였고, 날 것 그대로 말하자면 없는 살림에 꾸역꾸역 개발을 끌고 간다는 분위기다.
분위기.
나는 그 어떤 것보다 이 분위기라는 것이 조직의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한다.
WHTS가 소규모 벤처기업 수준에서,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하려면 가장 먼저 환경을 바꿔서 분위기를 정리해야 했다.
툭.
내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자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린다.
"회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잠시 저를 따라오시죠. 여러분께 소개할 곳이 있습니다."
내가 향한 곳은 우리가 쓰던 사무실의 바로 아래층, 얼마 전에 공실로 나온 503호, 504호를 이어 붙인 사무실이었다.
끼익.
사무실 문을 열자 향긋한 커피 내음이 우리를 맞이한다.
아직 인테리어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잡내가 조금 섞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강렬한 커피 볶는 냄새가 잡내를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여긴... 카페?"
"와, 신기하네요. 오피스텔 5층에 카페가 있다니요."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직원들 입에서 놀라는 소리가 줄줄이 나온다.
"여긴 카페가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이 쓸 개발실입니다."
"엑? 여기가 개발실이라고요?"
"누가 봐도 카페인데..."
카페로 착각할 만했다. 아예 내부 인테리어를 카페 개업 전문 업체에 맡겼으니까.
벽면 장식부터 시작해서, 카운터, 메뉴판, 커피 머신, 심지어 로스터기도 카페에 쓰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뒀다.
카페와 다른 점이라면 그래도 개발실인 만큼, 책상과 의자는 오래 앉아도 편한 것들로 갖춰뒀다.
"여기 커피 머신이랑 그라인더도 전부 진짜예요!"
"그럼 진짜 커피도 마실 수 있겠네요?"
"대박! 사진 찍어서 자랑해야지."
직원들은 흩어져서 새로운 사무실을 구경하기 바쁘다.
그러는 동안, 이소영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붙인다.
"대표님, 여기가 진짜 저희가 쓸 개발실이 맞아요? 아니죠? 농담하신 거죠?"
"농담이라뇨. 소영 씨가 이걸 원했잖습니까."
"제가요?"
"저번 주쯤에 개발실 분위기가 어땠으면 좋겠냐고 물었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그녀는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건지 '아!' 하고 놀란 목소릴 낸다.
"그때는 분위기를 물어보신 줄 알고 카페처럼 편한 쪽이 좋다고 했던 거예요."
"카페처럼 편한 분위기를 내려면 최대한 카페와 비슷하게 만들어야죠."
"그렇긴 한데..."
"혹시 이런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소영은 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다.
"아니에요. 완전 마음에 들어요. 단지, 너무 과하게 투자하신 게 아닌가 싶어서..."
일반 사무실을 카페처럼 꾸몄으니 비용은 대여섯 배가 들어간 건 맞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비용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이 사무실은 개발팀에 대한 투자입니다."
"이게 투자라고요?"
"저는 최고의 실력자들로 가상화폐 개발진을 꾸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먼저겠죠."
세상에 개발자는 많지만 뛰어난 실력에, 가상화폐 개념까지 이해한 개발자는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그런 고급 인력은 단순히 연봉만 많이 준다고 영입되는 게 아니다.
기업의 규모, 복지, 근로 조건, 프로젝트의 방향, 지속가능성 등의 다양한 조건을 만족해야 간신히 영입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이켜 보면, 전문 개발자인 이소영을 영입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일단 개발 인원을 20명 내외까지 늘릴 생각입니다. 소영 씨가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 뽑으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개발진을 뽑는다니요. 그건 말도 안 돼요."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지금 계신 개발자들도 전부 소영 씨가 데려왔잖습니까."
"이번은 단기간에 코인을 출시해야 하니까 지인들에게 잠시만 도와달라고 한 거라고요. 그거랑 정식 팀을 꾸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요."
이소영은 혼란스러운지 한참이나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리다가 힘겹게 말을 내뱉는다.
"대표님, 저는 겨우 22살이에요."
"이더리움을 만들 당시 비탈릭 뷰테린은 18살이었죠."
"아, 아니 그분은 천재잖아요!"
"제가 직접 만나본 바로는 소영 씨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던데요?"
그녀는 얕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으리란 걸 눈치챈 것 같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이 일에 적임자로 국내에서 소영 씨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그래요?"
"제 안목이 그러더군요."
안목이라는 말이 나오자 심각한 표정이던 이소영이 픽 웃음을 흘린다.
"제게 권한을 줬다가 돈만 잔뜩 쓰고 망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별수 있나요. 그땐 제 안목을 탓해야죠."
"그게 전부예요?"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제가 살면서 대표님 같은 분은 처음이네요."
조직의 말단은 높은 급여나 승진, 복지 같은 당근을 안겨주면 조직에 충성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말단을 이끄는 관리자급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직 수장의 무한한 신뢰와 인정.
비록 수감 생활 중 조폭에게 배운 지식이긴 하다만, 나는 그것이 일반 기업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새로운 사무실과 인테리어, 인력 충원, 광고비 집행 등.
한 번 돈을 쓰기 시작하니, 봇물 터진 것처럼 돈이 콸콸 나가기 시작한다.
여기에 얼마 후에는 싸이클럽 인수자금까지 필요했으니, 적게 잡아도 30억 원에 달하는 지출을 미리 대비해둬야 했다.
"현재 회사에 남은 돈은 초기 자금인 17억에서 싸이클럽 투자금 5억과 잡비를 제한 9억이 전부야. 그러니 네 계획대로 가려면 최소 21억은 추가로 필요하다는 거지. 그리고..."
회사의 재무 담당인 박태식은 열심히 떠들다가 목이 아픈지, 가져온 재무보고서를 툭툭 두들긴다.
나더러 직접 읽어 보라는 뜻이었다.
"맨날 돈 부족하다고 징징거리더니, 그래도 10억은 추가로 확보했네? 이건 어디서 난 거냐?"
"비트코인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냈어."
"담보 대출이 가능해?"
"어휴, 말도 마라. 국내에선 가상화폐를 자산으로 인정해주는 곳이 없어서 일본계 은행까지 찾아가서 간신히 했다는 거 아니냐."
확실히 박태식은 업계에서 구르고 구른 경험이 있다 보니 이런 분야에선 빠삭하다.
"어? 잠깐. 담보 대출이면 회사 비트코인은 은행에 묶였다는 뜻이잖아?"
"당연하지. 담보가 멀쩡해야 대출 계약도 유효한 법이니까."
현재 회사에서 보유 중인 비트코인은 총 9031개다.
이걸 오늘자 시세인 331,200원으로 환산하면 2,991,067,200원. 약 30억 원이 된다.
"회사 비트코인이 묶이면 곤란해."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네가 비트코인은 절대 안 판다고 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건 맞다. 앞으로 비트코인은 시세가 미친 듯이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만약의 사태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도 비상시엔 꺼내서 쓸 수 있어야지."
"에이, 별걱정을 다 한다. 진짜 위급할 때면 그 지갑의 비트코인을 꺼내서 쓰면 그만이잖아."
박태식이 언급한 '그 지갑'이란 이번 라스베이거스에서 털어온 440억 원을 비트코인으로 바꿔둔 전자지갑을 뜻했다.
"그 지갑을 건드리는 건 절대 안 돼."
"어째서? 13만 개나 있으면 5천 개 정도는 꺼내서 써도 되는 거잖아. 그것만 해도 15억은 될 텐데."
"몇 개를 꺼내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지갑에 있는 비트코인을 환전하는 순간... 우리가 횡령계좌를 털었다는 게 그대로 노출될 거다."
박태식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비트코인은 추적이 안 되는 암호화폐라며?"
"익명으로 네트워크상에 있을 때만 그런 거지. 환전은 가상화폐 거래소를 통해야 하는데, 거래소가 비밀을 지켜줄 거 같아?"
고객 정보유출은 대기업이나 은행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런데 법적인 규제를 전혀 받지 않는 가상화폐 거래소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우혁아. 그럼 그 지갑의 돈을 하나도 못 쓰면... 400억이 넘는 돈이 그림의 떡이라는 소리잖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야. 다 방법이 있지."
"빨리 말해줘. 안 그러면 속이 쓰려서 위액이 역류할지도 몰라."
박태식 저놈, 오버하는 건 진짜 알아줘야 한다.
"우리 정보가 노출되는 시점은 거래소에서 환전 신청을 할 때야. 달러나 원화를 받으려면 어쨌거나 현실 계좌가 있어야 하니까."
"차명계좌로 받으면 어때? 아니면 제3국의 비밀계좌도 있고."
"그것도 결국은 인출을 해야 할 텐데, 그때 꼬리가 밟히게 돼 있어."
범죄조직이 비트코인을 차명계좌로 인출하려다가 FBI에 검거된 사건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였다.
"차명계좌도 아니면 뭘 어쩔 생각이야? 비트코인 그 자체로는 쓸 만 곳이 거의 없다시피 할 텐데."
"비트코인으로 다른 코인을 살 거야."
"오, 알겠다. 다른 코인으로 몇 번 갈아타서 세탁하는 거구나? 그치? 그러면 추적이 힘들 테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다만, 여기엔 아주 큰 문제점이 있다.
아직은 미성숙한 가상화폐 시장에, 수백억이나 되는 돈이 한 번에 들어왔다가 빠지면 어떻게 될까?
'비트코인은 그나마 버티겠지만, 다른 잡코인은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바닥까지 처박히겠지.'
이런 내 행동으로 인해 가상화폐 시장에 어떤 나비효과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부작용 없이, 긍정적인 요인만 불러오는 방식으로 이번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 지갑의 비트코인으로 몽땅 도토리 코인을 살 생각이야."
도토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박태식은 과부하 걸린 로봇처럼 움직임이 뚝 멎어 버린다.
"생각해봐. 수백억에 달하는 돈이 도토리 코인에 몰리면 어떻게 되겠어? 도토리 코인의 가치 역시 수백 배나 펌핑되겠지?"
"아하! 그때 우리가 도토리 코인을 찍어내서 팔고 돈을 조달하면 되겠구나."
"바로 그거야."
박태식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를 막 두들겨 댄다.
"와! 신우혁, 이 미친놈! 어떻게 이런 발상을 매번 해내는 거야?"
"워워, 진정해. 이 작전에 성공하려면 먼저 선결과제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나도 그쯤은 알고 있어. 도토리 코인을 거래소에 상장시켜야 하잖아. 그래야 정식으로 거래가 될 테니까."
"그냥 상장만 하는 정도로는 안 돼. 우리 돈을 받고도 끄떡없는, 아주 큰 규모의 거래소에 상장해야 해."
박태식은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제 가슴팍을 툭툭 두들긴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이미 미국의 코인피버에서 상장 문의가 왔으니까."
코인피버는 세계 3대 가상화폐 거래소로 꼽히는 대형 업체다.
그 정도 규모의 거래소라면 우리가 수백억을 때려 박아서 도토리 코인을 펌핑 시켜도 너끈히 견딜 수 있을 거다.
"좋네. 바로 미팅 일정부터 잡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