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
4박 5일 라스베이거스 출장에다가 주말까지 겹친 터라, 근 일주일 만에 출근길에 오른다.
삑.
사원증을 찍고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회사 입구를 딱 통과하는 순간부터 몸이 축 늘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회사 전반에 깔린 분위기가 그렇다.
열심히 일한다고 바뀌는 건 없고, 뭔가 해낸다는 성취감도 없으니, 직원들은 매일 하던 일을 기계처럼 반복만 할 뿐이다.
다른 회사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KN케미컬은 유독 그런 면이 심각했다.
"신 대리, 진짜 오랜만에 보네. 이러다 얼굴 까먹는 거 아냐?"
사무실에 딱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기 싫은 인간이 내게 다가온다.
회계부의 하승찬 과장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치곤,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 아, 그래. 미국 다녀오더니 시차 적응이 안 됐나 봐."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아니면 다행이긴 한데, 해외 다녀온 사람이 어째 손이 너무 가벼워 보이네. 오면서 쪼꼬렛이라도 사 오지 그랬어."
그러고 보니 사무실에는 특이한 관습이 있었다.
멀리 출장을 다녀오면 기념품이나 먹거리를 사와야 한다거나, 진급하면 떡을 돌려야 했고, 상사 생일이 되면 신입사원까지 돈을 모아서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했다.
이런 선물이 자율적이면 누가 뭐라 하겠냐마는,
'하승찬 이 인간이 매번 죄인 취급을 하는 탓에 강제적으로 사 와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
이때 옆에서 누군가 과장 말을 거들고 나선다.
"아유, 과장님. 형편이 넉넉잖으면 못 사 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뭐, 초콜렛도 안 샀다는 건 성의의 문제겠지만요."
입사 동기인 홍만원이다. 이놈은 예전부터 나를 사사건건 걸고넘어졌는데, 아직도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거 참, 초콜렛 그거 몇 푼 한다고. 형편이니 뭐니 그래?"
"사람마다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아니면 출장지에서 바쁘니까 까먹을 수도 있는 거고요."
"아하, 이번에 출장 갔던 데가 라스베이거스라고 했었지? 거기라면 논다고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겠구나."
언제나처럼 사무실 사람들 다 듣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생각인 것 같다.
나는 그럴 여지를 주지 않고 딱 잘라서 말했다.
"제게 초콜릿 맡겨 두셨습니까?"
효과는 확실했다. 벌새처럼 떠들던 두 사람의 입이 딱 멎었으니까.
"선물은 축하나 고마움을 표할 때나 주는 겁니다. 그런데 과장님께 제가 어떤 고마움을 표할 일이 있었을까요?"
"원래 누군가 출장을 나가면 남은 사람들이 그만큼 고생하는 법이야."
"과장님과 저는 부서가 달라서 고생할 것도 없었을 것 같은데요."
하승찬의 얼굴이 점차 달아오른다. 반박하고 싶은데 마땅한 건수가 없으니까 속이 뒤틀리나 보다.
보다 못한 홍만원이 구원투수로 나선다.
"야, 신우혁. 네가 요즘 사무실 분위기를 개판 만들어 놔서, 하 과장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 줄 알아?"
"전혀 모르겠는데."
"그래, 너는 모르겠지. 매번 부장님 출장이나 따라다니면서 꿀만 쪽쪽 빨아 댔으니까."
출장이 편하다라... 만약 박민교나 백승태가 저 말을 들었으면 뺨을 왕복으로 후려치지 않았을까?
바로 그때, 사무실 입구 쪽에서 '어흠' 거리는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여긴 아침부터 뭐 이리 소란스럽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박민교 전무가 어슬렁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온다.
사색이 된 하승찬과 홍만원은 급히 입구로 쫓아가서 고갤 숙인다.
"아,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박민교는 두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온다.
"우리 서 대리,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예. 저는 멀쩡합니다."
"휴... 그날 일은 정말 고마웠네. 서 대리가 아주 큰 일을 해줬어."
그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더니, 그제야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아깐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나? 출장이 어떻고 하는 소린 들었는데."
하승찬과 홍만원이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눈빛으로 애원하고 나섰다.
저러니까 더 자세하게 말해주고 싶어진다.
"무슨 이야기를 했었냐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하승찬이 얼른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전무님! 별말은 안 했습니다. 그저 해외 출장 나가면 견문을 쌓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는 말만 했지요."
"맞습니다. 좋은 기회라서 부럽다고 했습니다. 하하... 하하..."
두 사람의 필사적인 변명이 이어졌으나, 오히려 그 변명이 박민교의 성질을 긁게 된다.
"출장 가는 게 좋은 기회라고? 자네들은 회사 출장이 무슨 해외여행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겐가."
박민교의 서슬 퍼런 눈길이 두 사람을 훑는다.
출장지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다가 왔는데, 견문 같은 소릴 해대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저, 전무님.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시끄럽다. 변명은 시말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이때 내가 살짝 끼어들어서 추가타를 넣어준다.
"전무님, 이번에 무역부에서 나이지리아 출장이 있는데 지원자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두 분을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오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로군."
나이지리아는 말에 두 사람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내가 자네들의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지."
* * *
백승태는 요즘 눈을 감을 때마다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영문도 모른 채 폐건물에 갇혀서 보냈던 하루.
그냥 갇혀만 있었어도 끔찍했을 텐데, 같이 갇힌 사람이 하필이면 상전처럼 받들어야 하는 박민교였으니.
뒤를 닦는데 셔츠를 내주고, 팬티를 내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 있는 덮을 것까지 내줬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다 보니 백승태는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 왔고, 그 결과 박민교와 쌍욕을 하며 드잡이질까지 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딱 그때 문이 열려서는... 에이, 씨. 문을 조금만 더 빨리 열어줬더라면 그럴 일도 없었잖아.'
괜히 부하직원 탓을 하며 시커멓게 그을린 속을 달랜다.
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기보다 그냥 남 탓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옘병."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갑갑해서 담배라도 한 대 태울 생각으로 몸을 일으킨다.
딱 그때, 인터폰이 '삐리리릭' 하고 울렸다. 발신지는 전무 비서실이다.
-부장님, 전무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백승태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전무실로 걸음을 옮긴다.
그가 전무실에 도착했을 땐, 처음 보는 사내가 박민교와 마주 앉아 있었다.
"이런 일은 저희가 전문 분야인 만큼, 전무님께서는 마음 푹 놓으시고 결과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하하핫. 그래. 자네 말만 들어도 믿음직하구먼."
박민교는 백승태가 전무실로 들어왔음에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마냥 세워두기만 했다. 그 뒤로 시간이 한참 더 흐른 뒤에야 그를 돌아본다.
"어이, 백 부장. 거기 서서 뭐 하고 있어? 얼른 앉아."
"아, 예.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그제야 마주 앉아 있던 사내가 고갤 살짝 까딱거린다.
"LJ그룹 전략비서실의 나준석 실장입니다."
"LJ그룹 사람이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야, 전무님께서 요청하셨으니 온 거 아니겠습니까? 원래 이런 분야에는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대기업 비서실 출신이면 각종 세금 문제나, 비자금, 돈세탁 등에 대해서 빠삭한 전문가가 맞다.
하지만 아무리 전문가라도 외부 인력을 데려온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전무님, 이번 일에 타사 쪽이 관여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무슨 문제?"
"아무래도 보안 측면에도 우려가 있을 것이고..."
"보안 좋아하시네."
박민교는 대놓고 비웃음을 터트린 것으로 모자라, 손가락으로 백승태의 가슴팍을 푹푹 찔러댄다.
"하루아침에 400억짜리 계좌가 털렸어. 자그마치 400억짜리 계좌가! 그런데 지금껏 네가 알아낸 게 뭐야? 응? 입이 있으면 빨리 말을 해봐!"
"그 건은 조사하는 중입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시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집어치워. 이미 다 알아냈으니까. 그렇지, 나 실장?"
호명된 나준석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고는 브리핑을 시작한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범인은 해킹이 아니라 비밀번호와 물리키를 사용해서 돈을 빼갔습니다."
"물리키면 우리 가방을 훔쳐간 놈이 범인이겠군. 그런데 계좌에서 정상적으로 이체됐으면 흔적이 남아있을 텐데?"
"흔적은 명확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영악한 것이, 일반 계좌로 옮긴 것이 아니라 가상화폐로 몽땅 바꿔갔다는 점입니다."
가상화폐라는 말이 나오자 박민교와 백승태,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상화폐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컴퓨터 네트워크 안에서만 존재하는 화폐입니다."
"사이버머니 같은 건가?"
"거의 흡사합니다만, 그들이 바꾼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기술로 보안성을 극대화한 화폐입니다."
설명은 들었으나 가상화폐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되찾을 방법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비트코인의 특성상 작정하고 숨기면 되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은 훔친 절도범의 신상을 알아내서 직접 받아내는 것뿐입니다."
"그건 가능하고?"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범인이 거래한 흔적을 확보했습니다."
박민교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 흔적을 따라가면 놈의 주소 같은 게 나오는 건가?"
"안타깝게도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가상화폐는 해킹 및 추적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니, 추적이 안 되면 흔적을 확보한 게 무슨 소용이야?"
"비트코인은 추적이 안 되지만 달러나 원화는 쉽게 추적할 수 있잖습니까."
처음엔 이 말의 뜻을 모르고 인상만 구기던 박민교였으나, 이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다.
"옳거니! 그 잡것이 가상화폐를 실물 화폐로 교환하려 들 때, 잡으면 된다는 거로군."
"바로 그겁니다."
"역시 LJ그룹의 브레인이야. 아주 훌륭해. 누구랑은 다르게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바로바로 나오는구만."
박민교는 말한 '누구'는 당연히 옆에 있던 백승태였다.
백승태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 나름의 의문점을 내놓는다.
"만약에 범인이 실물 화폐로 교환하려 들지 않는다면요? 그땐 찾을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비트코인이 어떤 화폐인지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뭘 모른다는 겁니까?"
"비트코인은 네트워크 상에만 존재하는 화폐라 현실에서 사용처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가격 변동성도 커서 하루아침에 가치가 1/10이 된 전례도 있지요."
그 말을 듣고 박민교가 놀라서 목소릴 높인다.
"그딴 게... 화폐라고?"
"화폐긴 한데 역사도 짧고, 보증하는 곳도 없어서 굉장히 불안정한 화폐라고 보시면 됩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잖아."
"맞습니다. 범인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한시라도 빨리 비트코인을 실물 화폐로 바꾸려 들 겁니다."
언제 가치가 0이 되어도 이상치 않은 데이터 쪼가리.
현시대 비트코인의 평가는 딱 이런 수준이었기에, 나준석의 목소리엔 확신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