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 밤이다.
이름 모를 풀 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폐건물 안에서,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 신 대리..."
벽 너머에서 축 늘어진 백승태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일일이 대답해주는 것도 귀찮아서 자는 척 무시해버리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끈질기게 나를 불러온다.
"신 대리, 또 자냐? 일어 나봐... 빨리."
"무슨 일이십니까?"
"그... 미안한데 말이야. 너무 추워서 그런데 덮을 만한 것 좀 주면 안 될까?"
밤이라도 날씨가 추운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후덥지근한 쪽에 더 가까웠지. 그런데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몸 상태가 어지간히 안 좋은 가 보다.
"죄송하지만 이쪽에도 덮을 만한 건 없습니다."
"네 윗도리를 벗어주면 되잖아."
"달랑 셔츠 하나 입고 있는데 이걸 벗어 달란 겁니까?"
"벗어 줄 수도 있는 거지. 원래 젊을 땐 웃통도 까고 다니고 그러잖아. 안 그래?"
조동아리 놀림을 듣고 있다 보니, 아침까지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불을 질러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는다.
불이 나면 다른 건 몰라도 춥다는 소리는 쏙 들어갈 거다.
'흥분하지 말자. 여기서 간단히 처리하고 끝내면 수지타산이 안 맞아.'
내가 억울하게 갇혀서 고통받은 시간만 무려 7년 2개월이다.
그 영겁과 같은 세월을 보내고 간신히 출소했더니, 트럭으로 밀어버리기까지 했던 게 저것들이다.
겨우 몇 분의 정도의 짧은 고통으로 끝내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겪은 지옥의 시간을 그대로 돌려준 뒤, 평생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며 살게 만들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통로 쪽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이 보인다. 휴대폰에 새 메시지가 온 것 같다.
옆에서 계속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으나, 깔끔하게 무시하고 메시지를 확인하러 간다.
[드디어 계좌 뚫었다. 잔액이 3800만 달러. 어떻게 할까? 조금씩 옮겨? 아니면 다?]
3800만 달러면 한화로 약 440억이다.
총 횡령액이 1800억 원이라고 했으니까, 나머지 1360억 원은 다른 계좌에 넣어둔 것 같다.
저 쓰레기들을 살려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늘었다.
[전액 처리해줘. 최대한 빨리.]
[오케이. 확인]
짧게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옆 방에선 백승태가 여전히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내가 신 대리를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너무 정이 없어. 힘들 땐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제 살길만 찾으면 그게 다 복을 걷어차는 거라니까?"
"제가 힘들 땐 도와줄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개소리라서 헛웃음조차 안 나온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평소에도 꾸준히 개소리를 해왔기 때문이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바닥에 굴러다니는 포대 자루가 하나 있는데 이거라도 드립니까?"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어서 이쪽 구멍으로 넣어 줘."
"음... 잠시만요."
내가 대답을 미루고 있자 백승태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진다.
"빨리. 이러다 입 돌아가겠어. 신 대리? 신 대리? 왜 말이 없어?"
"포대 자루를 두르고 있으니까 생각보다 따뜻하네요. 진작 이러고 있을 걸 그랬습니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넘겨."
계속 튕기면서 약을 올릴 수도 있었지만 내 목적은 그게 아니다.
나는 포대 자루를 돌돌 말아서 구멍으로 넣는다.
"아쉽게도 자루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두 분이 잘 상의해서 쓰십쇼."
* * *
폐건물의 밤이 깊어간다.
방에 갇힌 두 사람은 추위를 이기고자 어깨가 맞닿을 만큼 바짝 붙어서 웅크리고 있었다.
"..."
백승태는 넋을 놓고서 허공을 응시한다. 잠이라도 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환경 탓인지 그것도 쉽지 않다.
춥고, 목마르고, 배도 고픈데, 사방에 싸질러 놓은 대변 냄새 때문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최악인 것은 이곳을 벗어날 희망이 없다는 거다.
'누가 우릴 가둔 거지? 돈을 노린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범인은... 브로커인가?'
브로커가 아니라도 노릴만한 사람은 많았다. 하루에 수십억이나 되는 돈을 뽑고 다녔으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돈이 많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 셈이다.
'내가 그래서 조금씩만 출금하자고 했건만, 박민교 저놈이 끝까지 우기는 바람에.'
박민교 전무는 방금 얻은 포대 자루를 혼자 똘똘 말고서 잠을 퍼질러 자고 있었다.
저놈 때문에 이런 곳에 갇혔는데, 저놈 때문에 더러운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저놈 때문에 윗도리와 팬티도 벗었는데, 저놈 때문에, 저놈 때문에...
"부장님. 혹시 그쪽에 뾰족한 물건 없습니까?"
백승태는 옆 방에서 들려온 신우혁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넥타이핀이 있긴 한데, 어디에 쓰려고?"
"문을 따볼까 해서요."
"헛수고야. 내가 해봤는데 쉽게 열릴만한 구조가 아니다."
그때 자는 줄 알았던 박민교가 중얼거린다.
"그냥 줘."
"예?"
"그냥 주라고. 저놈 비위를 맞춰줘야 뭐라도 받아낼 거 아니야."
뭘 받아내도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박민교가 다 가져갈 텐데.
"자, 받아."
개구멍으로 넥타이핀을 넘겨준다. 그러고 돌아서는 데, 자꾸 박민교가 두르고 있는 포대 자루가 눈에 밟힌다.
"전무님, 자루 좀 같이 덮으면 안 되겠습니까?"
박민교는 계속 눈을 감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너무 추워서 그럽니다. 귀퉁이라도 좋으니까..."
"배 아프니까 말 걸지 마라."
"그게 아니면 반을 잘라서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야, 백승태. 나 혼자 덮기도 작아 죽겠는데 너를 어떻게 떼줘? 그냥 좀 참아. 이 덜떨어진 새끼야."
저 말을 듣는 순간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껏 백승태가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소리였다.
"덜떨어진 새끼? 박민교 이 존만한 놈아. 내가 너보다 나이를 3살이나 더 먹었어. 어디서 새끼, 새끼 거려?"
"너... 미쳤냐?"
"그래, 미쳤다. 미쳤으면 어쩔 거야?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혈연으로 전무 자리 앉으니까 사람이 다 좆으로 보이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박민교가 벌떡 일어서서 백승태의 멱살을 움켜쥔다.
"네가 뒤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퉤! 죽고 싶으니까 빨리 죽여 봐. 어차피 여기서 굶어 뒈질 텐데, 그게 그거지!"
"오냐, 소원대로 죽여 주마! 먼저 그 아가리부터 찢자!"
두 사람은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어 댄다.
그러다 상태가 조금 더 멀쩡한 백승태가 박민교를 질질 끌고 가서 내동댕이친다. 거긴 두 사람이 똥을 잔뜩 싸질러둔 곳이었다.
"이 개새끼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박민교가 악에 받쳐서 달려든다. 버티나 싶던 백승태도 점점 힘이 빠져서 같이 바닥을 뒹굴었고, 자연스럽게 전신 똥칠을 하게 된다.
그 뒤로 오 분 정도가 더 흘렀을 때쯤, 옆 방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끼익.
소리 덕분에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의 움직임이 뚝 멎는다.
이어서 다시 쇠의 마찰음이 들리는데.
끼이이이익.
철컥.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방금 넥타이핀을 가져갔던 신우혁이었다.
그는 똥 범벅이 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 누워서 뭐하십니까?"
* * *
밤 10시. 인천공항.
나는 폐건물을 나온 직후,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박민교와 백승태는 가방과 함께 여권을 잃어버린 탓에 여전히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예, 부장님. 저는 방금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두 분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다.
휴대폰 너머에서 백승태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박민교와 대판 싸운 것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아, 그런데 지금이라도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방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었다면서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몸이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여기서 신고해드리겠습니다."
-어허. 신경 쓰지 말래도.
통화를 끝내자마자 '풉' 하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가 장담하는데 두 사람은 절대 신고하지 않을 거다.
괜히 경찰 조사를 받다가 자신들의 범죄행위가 다 까발려지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할 테니까.
"쯧쯧. 어쩌겠냐. 너희들이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항 통로를 빠져나간다.
그대로 입국장까지 걸어 나오자 마중 나와 있던 박태식이 나를 반긴다.
"무사히 왔네?"
"당연하지. 그럼 안 무사하겠냐."
박태식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굉장히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일단 차에 가서 이야기하자."
"휴... 그래, 그게 낫겠다."
입국장에서 공항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박태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차 안에 들어가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말을 쏟아낸다.
"너,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뭐가?"
"네가 계약했다던 업체, 알아보니까 평범한 업체가 아니던데? 무슨 마피아 패밀리랑 연결됐다는 소리도 있고..."
"연결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마피아일걸."
"그게 정말이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동네는 마피아라고 특별한 게 아니야. 보안업체, 부동산업체, 렌터카업체, 대부업체 등, 모든 사업이 마피아와 연결돼 있거든."
"아, 아니. 그런 사람들을 네가 어떻게 안 거야?"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해뒀지."
라스베이거스 출장은 꽤 오래전부터 예정된 이벤트였다.
그리고 현지에서 돈세탁을 돌리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미리 대응책을 마련해둔 것뿐이다. 박민교라는 대어까지 걸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다음부터 이런 위험한 일을 할 거면 미리 상의 좀 해라. 응?"
"너까지 끌어들이긴 너무 위험했어."
"조세회피처 비밀계좌에 있는 수백억을 옮기는 일은 안 위험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는 괜히 미안해져서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
"그보다 계좌에 있던 돈은 내가 말한 대로 처리했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데."
"그거, 하... 말도 마라. 복제된 보안키로는 계좌 접근이 안 되더라고. 도중에 소영 씨가 복원을 안 도와줬으면 아직도 해결 못 했을 거다."
"소영 씨? 이소영이 도와줬다고?"
"응. 네가 부탁했다고 하니까 별말 없이 도와주던데? 어쨌든, 돈이 어떻게 됐는지는 네가 직접 확인해 봐."
박태식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내게 휴대폰을 넘겨준다. 그 화면에는 가상화폐를 보관하는 전자지갑이 깜빡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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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보유수량 : 130,266BTC
매수평균가 : $291.75
매수금액 : $38,005,105
평가금액 : $41,653,595(▲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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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범들이 열심히 빼돌렸던 회삿돈 440억 원은 몽땅 전자지갑 속 비트코인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