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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18화 (18/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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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 외곽을 돌고, 돌고, 또 돌던 백승태 일행은 드디어 마지막 세탁장을 앞두고 있었다.

이들이 오늘 세탁한 돈은 360만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40억 원에 달했다.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이젠 이들의 얼굴에는 밤늦도록 이어질 유흥의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대로 마지막까지 무난하게 일이 끝나려나 싶던 차에,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여보세요. 음... 응? 뭔 소리야? 사라졌다니? 꼼꼼히 확인해봤어?"

통화를 마친 브로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백승태가 얼른 그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작은 트러블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같이 입국하셨던 일행분 있잖습니까. 그... 대리라고 했던가요? 그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이 붙어 다니는데 어떻게 사라진단 말입니까?"

"저희 직원이 갱들에게 시비가 걸렸나 봅니다. 그래서 잠시 어수선하던 사이에 사라졌다는군요."

브로커의 말을 들은 백승태와 박민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간다.

"이 새끼가 어딜 싸 돌아다니는 거야? 백 부장, 빨리 연락해봐."

"알겠습니다."

백승태가 전화를 걸어보지만, 신호음만 계속 이어질 뿐, 받을 생각을 않는다.

"그놈을 당장 찾아봐야겠습니다. 호텔로 돌아갑시다."

"다음 목적지가 코앞인데 저기까지만 들렀다가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차 돌려요!"

박민교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브로커는 화들짝 놀라서 차를 돌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화를 안 받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마사지 숍에서 계집질을 하고 있을 겁니다."

브로커의 말에도 두 사람은 진정할 기미가 없다.

당연했다. 신우혁이 어디 길바닥에서 객사라도 하는 날엔 지금껏 세웠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만에 하나 누명 씌울 것을 눈치채고 도망간 거라면?

호텔까지 이동하는 십여 분 동안, 불안한 상상은 더 안 좋은 쪽으로 몸집을 키워갔다.

끼익.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호텔 로비로 뛰어 들어갔다. 혹시 신우혁이 객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바로 그때, 먼저 들어간 박민교의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너, 왜 여기에 있어?"

사라졌다던 신우혁은 호텔 입구에서 슬롯머신을 굴리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으면 재떨이엔 꽁초가 수북했고, 종이컵이 탑처럼 쌓였으며, 눈은 폐인처럼 시뻘겋게 충혈된 채였다.

"어? 두 분, 벌써 오셨습니까?"

머릴 긁적거리며 일어서는 그의 시선은 좀처럼 슬롯머신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백승태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하하핫, 원래 해외에 나오면 사람이 풀어질 수도 있는 법이지."

"전무님. 이럴 땐 따끔하게 혼내야 합니다. 저놈 때문에 마음고생 한 걸 생각하면..."

"어허, 괜찮다니까. 그러네."

박민교는 한참이나 기분 좋게 껄껄거리다가 말을 잇는다.

"오늘처럼 좋은 날엔, 마시고, 즐기는 것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 * *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고 셋째 날.

백승태는 자신의 쩍쩍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으, 음... 으... 으... 음?"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잿빛 바닥이었다. 뺨에서 차갑고 딱딱한 촉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건 시멘트 바닥이 분명했다.

'내가 왜 맨바닥에 누워있는 거지?'

어제 일을 마치고 스트립 바에 가서 진탕 퍼마신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안개처럼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일단 상체를 일으키기로 한다. 꽤 오랫동안 찬 바닥에 누워있어서 그런지 몸이 녹슨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여긴 어디야?'

그가 누워있던 곳은 대여섯 평 남짓한 방이었다. 시멘트 바닥과 벽 외엔 아무것도 없는 방 말이다.

놀라서 바닥을 짚는데 뭔가 물컹한 것이 손에 잡힌다.

"히익!"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어제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던 박민교 전무였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백승태는 급히 그를 흔들어서 깨운다.

"전무님, 전무님."

"야이 씨. 나 피곤하니까 깨우지 마라."

"지금 주무시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일어나십시오."

박민교는 한참이나 몸을 뒤척거리다가 눈을 뜬다.

눈을 뜬 뒤에는 백승태와 정확히 같은 반응을 보이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백 부장, 여긴 어디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떠보니 여기였습니다."

이들이 갇힌 방에 있는 거라곤 철로 된 문 하나가 전부였다. 그 외엔 흔한 창문도 보이지 않는다.

철컥.

문은 잠겨 있었다.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려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누가 저희를 이 방에 가둔 것 같습니다."

"대체 누가?"

"그건 저도 기억이 없습니다. 혹시 전무님은 뭔가 기억 나는 게 없으십니까?"

"기억이라곤 스트립 바에서 새벽 5시까지 놀았던 게 전부야. 그리고 이후엔... 윽... 전혀 떠오르는 게 없어."

숙취로 인상을 구기던 박민교가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가방은? 내 가방은 어디 갔어?"

"저도 잘..."

박민교의 가방 안에는 현찰과 신용카드, 여권, 그리고 비밀계좌의 USB 보안키가 들어 있었다.

"빨리 찾아봐! 씨발, 그거 없으면 안 된단 말이다!"

"전무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밖에 우릴 가둬둔 놈들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런 젠장..."

박민교가 가방을 찾느라 방을 살피는 동안 백승태는 넥타이핀으로 철문의 구멍을 열심히 쑤셔본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휴대폰이라도 있었으면..."

하루아침에 이상한 방에 갇힌 데다가, 중요한 가방도 잃어버렸다.

두 사람은 허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누군가 와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누가 와도 문제였다. 여기에 자신들을 가둔 사람이라면, 멀쩡히 내보내 준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시간만 계속 흐른다.

아깐 잔뜩 긴장해서 느끼지 못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배고픔과 목마름이 미친 듯이 밀려온다.

특히 갈증은 밤새도록 술을 마셔서 그런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물... 물이라도 있었으면..."

이러다 진짜 소변이라도 받아 마셔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백승태가 작은 생수병 하나를 들고 온다.

"물? 이게 어디 있었어?"

"이쪽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벽면 바닥에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쥐구멍이 나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옆 방으로 추정되는 시멘트벽이 보였다.

"병은 멀쩡해 보입니다만, 상했을지도 모르니 일단은 기다려 보시는 게..."

박민교는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생수를 따 마신다.

순식간에 병에 든 생수 절반이 사라졌고, 나머지도 다 마셔버리려는 것을 백승태가 간신히 저지한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목말라서 죽겠는데 그런 걸 걱정할 때야? 그리고 딱 봐도 물이 깨끗해 보이잖아."

"아니 그래도..."

바로 그때, 벽 너머에서 쿵쿵하고 뭔가 두들기는 소리가 넘어온다.

놀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 거기에 계신 게 박 전무님이랑 백 부장님입니까?"

신우혁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반가운 나머지 거의 동시에 소릴 지른다.

"신 대리! 나야!"

"맞아. 날세!"

그러나 반가움은 잠시뿐,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두 분께서 구해주러 오신 겁니까? 빨리 좀 꺼내주십시오."

"우리도 여기 갇혔어. 눈을 떠보니 여기더군."

"아... 그러셨군요."

같은 신세의 사람이 한 명 늘어난 것 외엔 바뀐 게 없었다.

박민교는 한숨을 푹 쉬며 드러누워 버렸고, 백승태는 그래도 돌파구가 있을까 싶어서 부지런히 대화를 나눈다.

"그쪽 방 상태는 어때?"

"앞에 철문 하나가 있는데, 여기 말곤 나가는 통로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열어봐.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삐걱삐걱하는 철 마찰음이 난다. 문고리를 돌리는 것 같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발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진다.

"헉... 헉... 틀렸습니다. 꿈쩍도 안 합니다."

"젊은 사람이 뭐 그리 힘이 없어? 배에 힘 꽉 주고 해봐."

"조금만 쉬다가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저... 부장님, 여기 구멍에 있던 생수 못 보셨습니까?"

백승태는 깜짝 놀라서 박민교를 돌아본다. 그가 들고 있던 생수는 이미 절반 이상이 사라진 상태였다.

"무, 무슨 생수?"

"아까 방 뒤편에서 찾은 생수를 이쪽 구멍에 숨겨뒀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박민교는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급히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잠시지만 불편한 침묵이 이어진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벽 너머에서 나올 말을 기다린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 * *

화려한 라스베이거스도 중심부에서 벗어나면 흔한 도심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 근방은 한때 난개발이 이뤄지던 곳이었기에 짓다가 만 폐건물이 다수 버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 폐건물 중 한 곳에 갇혀서 사람이 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다. 나는 갇힌 게 아니라 갇힌 척만 하고 있었으니까.

토독. 톡. 톡.

나는 건물의 3층 입구로 나와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승태를 가둔 곳은 3층에서도 가장 안쪽 방이었기에, 여기까지 나오면 내가 뭘 하든 소리가 들릴 일은 없었다.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늦는 거야.'

내가 백승태와 박민교를 잡아두는 동안, 한국에선 박태식이 저들의 비밀계좌를 털고 있었다.

참고로 조세피난처에 있는 비밀계좌 돈을 빼려면 8자리의 비밀번호와 USB에 담긴 물리 키가 필요했다.

비밀번호는 돈 세탁장에서 확보한 CCTV로 해결했고, 물리 키는 USB 파일을 통으로 복제해서 넘겨줬다.

이제 남은 것은 비밀계좌의 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뿐.

초조하게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때에 끝 방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신 대리. 신 대리."

살금살금 걸어서 그들이 갇힌 곳의 옆 방으로 들어간다.

"말씀하시죠, 부장님."

"저... 혹시 뭐 좀 닦을 만한 거 없나?"

"닦을 만한 거라뇨? 어디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백승태의 목소리가 계속된다.

"전무님께서 방금 볼일을 보셔서... 거기 휴지 같은 거라도 없나?"

"휴지는 없습니다."

"역시 그렇지..."

백승태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어, 박민교가 말하는 게 들린다.

"빨리 옷이라도 벗어다 주게. 어서."

"전무님, 아무리 급해도 옷으로 닦는 건 좀..."

"그럼 내 옷으로 닦으란 말인가?"

저쪽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진다. 상상도 하기 싫은 그렇고 그런 상황이겠지.

'백승태는 멀쩡한 걸 보니 박민교만 설사약 넣은 물을 마신 건가?'

얼마지 않아 벽 너머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찬 '뿌직뿌직' 소리가 이어진다.

"으헉!"

이번은 백승태의 목소리였다.

"저, 전무님... 셔츠 좀 벗어다 주십시오. 제건 아까 벗어다 드렸잖습니까."

"뭔 소리야. 내건 안 돼."

"너무 하십니다!"

그 뒤로도 산발적인 푸드득 소리와 닦을 거리를 두고 실랑이하는 말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나는 끅끅거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다가 입을 뗀다.

"부장님, 한 번 썼던 옷이라도 바닥에 문질러서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젠... 늦었어."

늦었다는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아깐 상의를 벗어줬다고 했으니까 이번엔 팬티를 희생시킨 건가.

'이제 신호가 왔으면 앞으로 반나절은 더 고생해야 할 거다.'

더러운 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가 힘들어서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온다.

밖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때까지 저들을 가둬둘 순 없었다.

'아침까지 연락이 안 오면... 여기서 죽일 수밖에.'

미리 준비해둔 기름과 나무판자, 커튼 뭉치를 다시 한번 체크했다.

이걸 문 앞에 쌓아두고 불을 지르면 탈진 직전인 두 사람은 꼼짝없이 타 죽을 거다.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도 저들이 죽으면 일행인 내가 의심받을 게 뻔했기에, 가급적이면 얌전한 방식으로 이번 일이 마무리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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