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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후 코인 재벌-17화 (1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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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 매캐런 공항.

내가 살아서 이곳을 다시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서 말이다.

그나마 다른 구석이 하나 있다면 같이 온 멤버가 하나 추가됐다는 거다.

박민교 전무.

본디 그가 출장을 따라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출장뿐만 아니라 나와 접점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선지 같은 비행기를 타고서 일행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야! 신우혁! 뭘 멍하니 있어? 빨리 짐 챙겨와!"

"아예, 갑니다."

박민교 전무가 같이 움직인다 해도 출장지에서 내 역할이 바뀌는 건 아니다.

표면상의 역할은 출장 보조, 쉽게 말해서 짐꾼에 잡심부름 꾼이다. 그러나 내면에 숨겨진 진실은 따로 있었다.

유명 카지노나 선상 도박장이 열리는 장소로 나를 데려가서 출입국 내역 만들기.

여기서 소름 돋는 것은 여권의 출입국 내역이었다.

백승태는 항상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는데, 정작 재판과정에서 제출된 그의 여권에는 해외 출국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권을 바꿔치기했어도 법무부에 출국 내역 정도는 남아 있을 텐데...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어쨌든 상대의 카드가 출입국 내역 조작이라는 건 알았으니, 그에 맞는 대응책을 준비해야 했다.

스윽.

공항의 입국 심사대를 통과함과 동시에 셔츠 앞주머니에 펜을 꽂는다.

이건 초소형 카메라가 달린 특수 펜이다.

요 녀석으로 박민교와 백승태의 모습을 다 찍어두면, 출입국 조작 카드는 완벽히 봉쇄할 수 있었다.

'물론 재판까지 안 가는 쪽이 베스트긴 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모든 입국 절차를 마치고, 짐을 잔뜩 짊어진 채 입국장으로 향했다.

누가 라스베이거스 공항이 아니랄까 봐, 입국장 진입로부터 각종 슬롯머신이 깔려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동양인 사내들이 우릴 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환영합니다! 웰컴!"

금니가 인상적인 중년인과 무표정한 거구의 사내다.

그들은 곧장 박민교와 백승태에게 다가가서 과할 정도로 인사를 나누고는, 다음으로 내게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가이드를 맡은 미스터 창입니다."

가이드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체는 현지 돈세탁 브로커다.

라스베이거스는 도박과 호텔의 도시임과 동시에,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검은돈을 합법적인 돈으로 바꿔주는 돈세탁 허브이기도 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까딱거리고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디 보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비즈니스를 할 수는 없겠군요.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라스베이거스는 이 시각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미스터 창은 우리를 베가스 스트립에서도 가장 화려한 도로로 이끌었다.

사방에 번쩍대는 네온사인이 즐비했고, 거리는 호객꾼과 비틀거리는 주정뱅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곳을 뚫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입구부터 몽환적인 조명이 깔린 스트립 바였다.

"지금만큼은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라스베이거스의 정수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스트립 댄서들이 나타났다.

테이블당 한 명씩, 우리 테이블엔 두 명이 동시에 올라와서 육감적인 자태를 뽐낸다.

과감하면서도 아슬아슬하고, 줄듯 말듯 애를 태우는 그녀들의 쇼는 박민교와 백승태의 혼을 빼놓기 충분했다.

"오오... 오우... 라스베이거스는 몇 번 와봤다만 여긴 더 특별한 곳이군."

"전무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팁을 두둑하게 주면 진짜배기 쇼를 직접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직접?"

백승태는 음탕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인다.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다 쏠 테니까 끝장을 보자고."

"역시 전무님은 통이 크십니다."

"내가 원래 대인배라는 말을 자주 듣지. 헤이, 헤이, 백 달라! 백 달라! 부족해? 그럼 오백 달라는 콜?"

박민교가 달러를 뿌리자 다른 테이블에 있던 댄서들 두 명이 더 합세했다.

그들은 서로 몸을 휘감은 채로 술을 마시다가, 지겹다 싶으면 파트너를 바꿔서 다시 물고 빨아댄다. 이미 주변에 누가 있든 안중에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저 역겨운 행태에 눈살이 찌푸려졌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웃음이 나온다.

'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겨 둬라. 내일부터는 빡세게 굴러야 할 테니까.'

* * *

라스베이거스의 아침은 타 도시처럼 활기참이 없다. 이유는 밤늦도록 유흥을 즐기느라 다들 늦잠을 자기 때문이란다.

박민교와 백승태도 라스베이거스식 생활패턴을 충실히 따랐다.

그들이 호텔 라운지에 나온 시간은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오후 2시였다. 그러고도 술이 덜 깼는지 한참이나 몸을 흐느적거린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호텔 라운지에서 10분 정도를 더 기다리고 있자 미스터 창이 우릴 찾아왔다.

"두 분,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 스케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무조건 오케이니까 빨리빨리 갑시다."

"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스베이거스의 비즈니스는 오후 3시부터 시작되니까요."

백승태는 한참이나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느지막하게 내게로 다가온다.

"전무님과 바이어 미팅이 있으니까, 너는 우리 올 때까지 근처 카지노에서 시간 때우고 있어."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백승태는 내 손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몇 장 쥐여주고는 어깨를 툭툭 친다.

"그리고 저기 저 사람 있지? 오늘은 쟤가 가이드를 해줄 거다."

그가 가리킨 곳엔 미스터 창이 데려온 거구의 두건 쓴 사내가 서 있었다.

말은 가이드라고 했지만, 실상은 감시자 역할이었다.

"괜히 딴 데로 새지 말고. 잘 따라다녀."

백승태와 박민교가 호텔 라운지를 떠난 뒤.

나는 두건 사내를 따라서 호텔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에서 이어지는 지하층에는 입구부터 슬롯머신이 줄줄이 깔려 있었다.

삐로롱-, 삐로롱-, 삐로롱-.

귀가 따가울 정도의 소음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라스베이거스는 특정 구역에만 카지노 시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역 전체가 카지노며, 거기에 식당, 상점, 휴게 시설 등이 같이 영업하는 형태였다.

"카지노. 카지노. 달러 익스챈지 히얼."

두건 사내는 콩클리쉬로 의사를 전달했다. 백승태와 박민교가 영어를 못하니, 나도 그럴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몽땅 크레딧 카드에 충전했다.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주변에 널린 게 슬롯머신이었으니 아무 곳이나 앉아서 레버를 당긴다.

철컥.

드르르륵.

슬롯머신을 처음 당길 땐 이걸 왜 할까 싶지만, 몇 판 굴리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레버를 당기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슬롯머신을 하고 있으면 늘씬한 여인이 옆에 들러붙어서 담뱃불을 붙여주고, 몸 구석구석을 주물럭거린다.

카지노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패키지였다.

도박, 술, 담배, 음식, 여자.

이 모든 것을 슬롯머신에 앉은 채로 다 해결할 수 있었기에, 한 번 빠지면 어지간한 자제력으론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도 예전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여기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지.'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해줄 내가 아니었다. 레버를 당기는 와중에도 티나지 않게 주변을 계속 살핀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가 흘렀을 때쯤, 문신으로 전신을 도배한 흑인 사내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서 내 뒤에 서 있는 두건 사내에게 다가간다.

"오우! 여기 있었네. 브로."

흑인들은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두건 사내는 인상만 찌푸릴 뿐, 악수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뭐 하는 놈들이냐?"

"워, 재미없다. 우리가 누군지 벌써 까먹었어?"

흑인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두건 사내의 얼굴을 후려친다.

빡!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두건 사내의 몸뚱이가 크게 휘청거린다. 그 충격으로 뒤에 있던 장식장이 와장창 부숴졌다.

"꺄아아악!"

"뭐야? 싸움이라도 났어?"

"가드! 가드! 빨리 와요!"

두건 사내가 삼단봉을 꺼내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덕분에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소란을 피해서 도망가는 손님과 달려오는 카지노 가드들.

나는 그들의 틈바구니에 합류해서 조용히 카지노를 빠져나간다.

* * *

라스베이거스는 카지노와 호텔 산업으로 일 년 내내 휘황찬란했지만, 그만큼 뒤에 깔린 그림자도 짙은 곳이다.

도박과 항상 따라붙는 불법 사채, 전당포, 매춘업은 규모 면에서도 세계 제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

진짜 큰돈이 오가는 곳은 카지노를 이용해서 검은돈을 멀쩡한 돈으로 바꿔주는 돈세탁 사업장이었다.

"후... 이 짓도 계속하려니 피곤하군."

박민교는 오후 내내 라스베이거스 외곽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조세피난처로 빼뒀던 회삿돈을 세탁해서 일반 계좌로 옮겨오는 것.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검은돈을 위장 사업장의 계좌로 송금하면, 수수료를 일부제하고 국내 계좌로 쏴주는 형태였다.

"전무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다섯 곳만 더 들리고 마무리하시죠."

백승태의 말을 들은 박민교의 얼굴이 굳어간다.

"뭐? 다섯 곳이나 더?"

"한 곳에서 많은 돈을 송금받으면 미국국세청에서 조사를 나올 수 있습니다."

"나도 알아. 아는데... 이건 너무 번거롭군."

차창 밖에서 라스베이거스의 조명들이 번쩍인다.

박민교는 저 불빛을 볼 때마다 어젯밤에 느꼈던 하반신의 짜릿함이 아른거렸다.

"이런 아날로그 입출금 방식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

"종교단체에 기부금 형식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방에 300만 달러까지도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럼 이 짓거리를 왜 하는 거야?"

"기부금 처리 방식은 수수료만 45%가 넘습니다."

수수료 45%는 불만을 쏟아내던 박민교를 침묵시키기 충분한 수치였다.

이들은 차를 타고 십여 분을 더 이동해서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번은 입구에 차가 줄줄이 세워진 렌터카 업체였다.

"어떻게 오셨소?"

직원의 퉁명스러운 응대에, 브로커가 앞으로 나선다.

"여기 핑크색 차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핑크?"

가게 앞에 세워진 차 중에 핑크색은 없었다. 그러나 브로커는 능청스럽게 다시 색을 언급한다.

"예, 아주 찐한 핫핑크라고 하더군요."

"잠시 기다려보시오."

직원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꾸깃꾸깃한 렌터카 카탈로그를 들고 온다.

카탈로그 속 차들은 전부 핑크색으로 도색된 상태였는데, 일일 대여료가 터무니없이 비쌌다.

박민교는 이미 이런 곳을 4곳이나 돌고 왔기에, 능숙하게 카탈로그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확인해보시죠."

직원이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고, 그 뒤로 1분이 채 안 돼서 세탁된 돈이 입금됐다.

용건이 끝났으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인사도 없이 가게를 빠져나간다.

"..."

렌터카 업체 직원은 한참이나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다 그들이 탄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가 돼서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동양인 셋이 다녀갔소. 입금되는 즉시 계좌정보와 CCTV 데이터를 보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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