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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클럽은 한때 국민 SNS로 불렸을 만큼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었다.
하지만 2015년인 지금, 싸이클럽의 위상은 과거의 털끝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추락해 있었다.
"여기가... 내가 알던 싸이클럽의 본사라고?"
사무실 앞에 도착한 박태식은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가 도착한 사무실의 풍경은 오래된 창고처럼 낡고 어두웠다.
"주소로 보면 여기가 확실해."
"내 예상과 회사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
"작년 초에 대기업에서 분사됐으니 그 뒤로는 쭉 이런 상태였을걸. 간신히 호흡기만 달고 있는 셈이지."
지금껏 싸이클럽 경영진이 해왔던 헛짓거리를 생각하면 아직 회사가 살아 있는 게 대단한 거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입구 근처에 앉아있던 말총머리 사내가 우릴 맞이한다.
"혹시 오늘 온다고 하셨던 투자자분들이신가요?"
"맞습니다."
"아이고, 귀하신 분들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와주셨네요. 싸이클럽의 대표인 정지승입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안내받은 응접실로 들어가는 동안, 슬쩍 사무실 분위기를 살펴본다.
컴퓨터가 놓인 자리는 약 30개 정도.
밖에서 봤던 것보다는 사무실이 크다. 그러나 비어 있는 자리도 많은 걸 보니 퇴사자도 상당한 듯했다.
탁.
우리 앞에 자판기 커피 2잔이 나왔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마침 원두커피가 다 떨어져서..."
"괜찮습니다. 커피 마시려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서, 여러모로 어수선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요? 그게 뭡니까?"
정지승은 이 말이 나올 걸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몇 장을 앞에 내놓는다.
"기존에 싸이클럽 시스템을 싹 갈아엎고 런칭하는 싸이클럽 플러스입니다. 기존의 싸이클럽이 PC 환경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의 싸이 플러스는 모바일에 최적화된 형태입니다."
그걸 2015년이 돼서야 하고 있다고? 라는 말이 속에서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옆에 앉아있는 박태식도 표정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듯하다.
"이미지만 봤을 땐 전체적으로 페북이랑 비슷한 형태네요?"
"요즘 트랜드가 그쪽이라 그리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음... 메인이 이렇게 바뀌면 기존에 있던 방명록이나 미니홈피 같은 서비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방명록과 일촌 메뉴는 삭제됩니다. 그리고 미니홈피는 다른 페이지의 하위 카테고리로 간소화될 예정이고요."
방명록과 일촌이 없고 미니홈피가 간소화되면 싸이클럽을 하는 이유가 있을까?
가만히 있다간 고사하게 생겼으니 뭐라도 손대는 게 맞긴 하다만, 가는 방향이 잘못된 건 확실했다.
프로젝트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시시콜콜한 주제로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본론으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애피타이저였다.
그러다 상대측에서 먼저 화제를 전환한다.
"그나저나 해외 투자사에서 투자를 하신다고 했을 땐 깜짝 놀랐습니다."
"유망한 투자처를 찾던 도중 싸이클럽이 딱 눈에 들어오더군요. 국내 최고의 SNS 서비스였잖습니까."
"최고였죠. 미니홈피가 없으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있었으니까요. 하하하하핫..."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던 그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WTHS컴퍼니에서는 싸이클럽 지분 49.9%를 원한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측에서 시행한 기업 평가 금액은 50억입니다. 그러니 지분 49.9%면 최소 25억은 투자하셔야 할 텐데요."
거주자가 다 떠나고 무너질 날만 기다리는 폐가를 25억이나 주고 사라고?
다행이다. 너무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싸이클럽이 기업 평가를 받은 시기가 작년 초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1년이 조금 넘었지요."
"1년이라... 1년... 이게 보통 기업의 1년과 IT 기업의 1년은 느낌이 좀 다르단 말이죠."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겨우 1년입니다."
"제가 단언컨대 겨우는 아닙니다. 그사이에도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나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여서 그와의 거리를 좁힌다.
"2012년도 싸이클럽의 SNS 시장 점유율은 17%였습니다. 그런데 2013년엔 5.5%가 됐더군요. 말씀하신 겨우 1년 만에 점유율 차이가 이렇게 큰 폭으로 벌어졌습니다."
"..."
"상황이 이렇다면 기업 가치에도 큰 변화가 있으리란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요."
정지승은 미간의 주름으로 언짢음을 드러낸다. 아픈 곳을 찔린 모양이다.
"가급적이면 싸이클럽에 투자하고 싶습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금액으로는 힘들 듯하군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기업 평가 금액을 낮추는 건 불가능합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투자는 싸이클럽의 평가 금액인 50억을 기준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상대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다만, 리스크 헤지 차원에서 방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이신지..."
"우선해서 5억을 투자하고, 나머지 20억은 신규 프로젝트가 진행된 이후에 기업 평가를 다시 받아보고 투자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정지승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신규 프로젝트에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뻗는다.
"신규 프로젝트가 성공했으면 좋겠군요."
"분명히 잘 될 겁니다. 하하하."
* * *
싸이클럽 지분 인수 건은 협상 당일에 전문변호사까지 불러서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WHTS컴퍼니는 싸이클럽에 5억 원을 투자하고 지분 12.99%를 획득한다.
*WHTS컴퍼니는 차후 기업 평가를 다시 시행하여 20억 원을 추가로 투자한다.
*싸이클럽은 WHTS컴퍼니가 제안하는 신규 결제수단 도입과 홍보 활동에 협력한다.
업무를 마치고 싸이클럽 사무실을 나선다. 그러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딱 올라탄 순간, 박태식이 꾹 참았던 말을 쏟아낸다.
"이거, 우리가 덤터기 쓴 거 아냐? 지분 12.99%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박태식은 차 주변에 누가 있는지 한 번 살피고는 목소릴 작게 내리깐다.
"일단 5억을 넣고 추가 투자로 20억을 더 투자한다고? 우리가 그런 돈이 어디 있어?"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까 괜히 열 내지 마."
"무슨 계획?"
내가 출발부터 하라는 뜻으로 손짓하자 박태식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시동을 건다.
"태식아, 잘 생각해봐. 지금 우리에게 싸이클럽 지분이 중요한 거 같아?"
"중요하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냐?"
"그게 아니지. 우린 싸이클럽의 지분이 아니라 이름을 빌리려고 온 거야. 한때 국민 SNS라고 불렸던 그 이름 말이야."
"겨우 12.99%의 지분만으로 그게 가능해?"
"싸이클럽은 대기업에서 분사될 때 직원에게 지분을 균등하게 분배해줬어. 관리자급은 6%, 평사원은 4%, 이런 식으로."
박태식은 이제야 내 의도를 이해하고 이마를 '탁' 친다.
"그럼 12.99%를 지닌 우리가 싸이클럽의 최대주주가 됐다는 뜻이네?"
"바로 그거야."
우리가 지닌 12.99%로 싸이클럽의 경영을 좌지우지할 순 없다.
하지만 수치상으론 싸이클럽의 최대주주가 맞았기에 앞으로 회사를 홍보할 때면 그 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오케이. 12.99%를 가져온 이유는 완벽히 이해했어. 그럼 나중에 투자할 20억은? 싸이클럽 플러슨가 하는 신규 프로젝트가 성공한다고 보는 거야?"
"내가 오기 전에 말했잖아. 쫄딱 망한다고."
"그럼 어째서... 앗!"
신규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싸이클럽의 가치는 단박에 치솟게 된다. 그렇게 되면 20억을 투자하고도 내게 들어오는 지분은 크게 줄어들겠지.
하지만 반대로 신규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그냥 실패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처참하게 말아먹게 된다면?
"그땐 20억이 아니라 푼돈에 모든 지분을 토해내게 되겠지."
* * *
토요일 아침.
주말은 KN케미컬이 있는 용인으로 갈 필요가 없었기에 바로 판교 사무실 쪽으로 출근한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 콧노래가 끊이질 않는다.
가상화폐 사업에서 가장 큰 난관이라 생각했던 싸이클럽 지분을 손쉽게 따낸 탓이다.
흥얼거리며 사무실에 도착했더니 아직 박태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무 일찍 출근했나 보다.
녀석이 오기 전에 커피라도 사 올 생각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차에, 후드 티 차림의 여인이 사무실 앞에서 서성이는 게 보인다.
"어? 혹시 이소영 씨?"
그녀는 나를 보고 놀란 건지 반 박자 정도 늦게 고개를 풀썩 숙인다.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소영 씨가 맞았네요. 그때와 분위기가 달라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강연장의 이소영은 정장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캐주얼 차림이라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 보인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게... 저번에 말씀하셨던 통로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요."
"아하, 그것 때문에 오셨군요.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직접 마중 나갔을 텐데요."
"아, 아니에요."
이소영은 과할 정도로 손을 내젓는다. 깊이 엮이기 싫다는 뜻인가? 어쨌든 좋은 징조는 아니다.
나는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기 전에, 얼른 사무실 안으로 데려 들어온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안 계신가요?"
"주말이라 좀 늦나 보군요."
올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지만, 그래도 다 안 왔다는 점을 적극 어필했다.
그럼에도 이소영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사무실 모습이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사무실 상태가 어설픈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는 우리 회사의 강점을 바로 내놓기로 했다.
"소영 씨는 싸이클럽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학교 다닐 때 많이 했었죠. 페북을 시작한 이후로는 안 들어가 봤지만요. 그런데 갑자기 싸이클럽을 왜 물어보시나요?"
"저는 SNS가 현실과 가상을 이어주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 싸이클럽은 도토리라는 가상화폐까지 이미 쓰고 있죠."
"도토리와 저희가 논하던 가상화폐는 개념이 달라요."
나는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갤 끄덕여 준 뒤에 말을 이어간다.
"질문을 바꿔보죠. 만약 도토리가 블록체인 기반의 가상화폐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야..."
그녀는 1분이 넘도록 혼자서 고민하다가 고개를 크게 가로젓는다.
"제 머리로 정확한 예측은 무리예요. 하지만 가상화폐 계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리란 건 확실해요."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가상화폐의 사용처와 구조가 명확해지는 거잖아요. 그게 가능만하다면... 일반인 수준에서도 가상화폐가 활발히 사용될 거고, 가상화폐의 유행이 찾아올지도 몰라요!"
말을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에 흥분감이 서려 있다.
"아! 그래서 대표님이 SNS가 가상과 현실을 잇는 통로라고 하셨군요. 이제 완벽히 이해했어요! 정말 기발한 발상인 거 같아요!"
"벌써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뭐가 더 있나요?"
나는 노트북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곳엔 어젯밤 올라온 뉴스가 떠 있었다.
[싸이클럽 부활의 서막? 싸이클럽이 해외투사자 WHTS컴퍼니와 지분투자 및 사업협력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투자로 싸이클럽은 신규 프로젝트...]
인터넷 뉴스를 본 이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뉴스에 나온 WHTS컴퍼니가 여긴 가요?"
"맞습니다. 저희가 싸이클럽의 최대주주가 됐죠. 그러니 이제 가상화폐를 만들어줄 개발자만 있으면 아까의 발상이 이뤄질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이소영의 눈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
"저요! 제가 할게요! 저 가상화폐 개발 쪽은 자신 있어요!"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꾹꾹 눌러놓는다.
마음 같아선 얼른 이력서를 받아서 도장까지 찍어 버리고 싶었으나 아직은 OK 할 때가 아니었다.
"소영 씨 정도의 전문지식이 있는 개발자는 언제나 환영입니다만,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라서요."
"어떤 절차가 필요한가요?"
"채용 전에 실력 확인 정도는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실력 확인이라는 말에, 살짝 움츠려 있던 이소영의 어깨가 펴진다.
"좋아요. 제게 딱 2시간만 주세요."
"집에라도 다녀오시려고요? 그거라면 제가 태워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앞에 놓인 노트북을 가까이 끌어다 놓고 후드 티의 소매를 걷어붙인다.
"여기서 새로운 코인을 만드는 걸 보여드릴게요. 딱 2시간이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