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
그녀는 강연을 마치고 힘없는 걸음으로 단상을 내려간다. 어두운 표정과 아래로 깔린 시선에서 상심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나는 그녀가 강연장 뒤로 사라지기 전에 얼른 달려가서 불러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그녀는 다가가는 나를 보고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요?"
"예, 방금 강연하신 그쪽요."
그녀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몇 번 더 눈을 깜빡거린다.
단상에선 커다란 안경 때문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눈이 굉장히 크다.
"무슨 용무 신지..."
나는 그녀가 말을 맺기 전에 얼른 명함부터 건네준다.
"저는 WHTS컴퍼니의 대표인 신우혁입니다."
"어... 이소영이에요. 아직 대학생이라 명함은 없어요."
"아하, 이소영 씨였군요. 그런데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데 한국어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어머니가 한국인이세요. 그런데 제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제 외모만 보고는 다들 모르시던데요."
"느낌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실은 님블 코인 뉴스에서 본 거다. 원래 국내 언론은 유명인이 한국계거나 한국 핏줄이 섞이면 특별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
"방금 발표하신 가상화폐에 관한 이야길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새로운 접근 방식의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어, 어, 어..."
이소영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 한참이나 말을 내뱉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은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무시하기만 했거든요."
"원래 범인들은 천재가 내놓은 발상의 깊이를 이해 못 하는 법이죠."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천재로 불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손사래까지 쳐가며 부정하는 그녀.
그러나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는다.
"아뇨. 대단한 게 맞습니다. 소영 씨의 강연을 지켜본 제 안목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군요."
"진심이신가요?"
"물론이죠. 100% 진심입니다."
이젠 그녀도 진지하게 눈을 빛내기 시작한다.
"제 강연에서 어디가 인상적이었나요?"
"초반부에 언급했던 가상화폐 1개가 투표권 1개를 갖는다는 부분부터 흥미롭더군요."
"아, 그건 투표가 가능한 디앱(DApp)으로 이해당사자에게 권한을 주는 식이에요. 이때 모든 토큰 보유자는 PUE 응용방식의 제안서를 제출하고..."
음.
"최종 결정에는 인센티브 요인이 생겨서 더 많은 참여자가 생기는 구조라서..."
으음.
"아, 물론 고래 홀더를 막는 방법도 개발 중이에요. 일단 여러 가지 방안을 계획했는데요. 그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일단 설명을 듣고 있긴 한데 반 이상은 못 알아먹겠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가상화폐의 기술적인 부분은 반이 아니라 9할 이상은 처음 접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그게..."
여기서 잘못 말했다간 그녀의 기대하는 눈빛이 실망으로 뒤바뀔 거다.
나는 신중히 이어질 말을 고르고 고른다.
1번. 솔직하게 구조를 이해 못 했다고 말하고, 다시 설명해달라고 한다.
2번. 이해한 부분을 언급하며 적당히 아는 체하고 넘어간다.
3번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내가 어떤 선택지를 택해도 그녀가 만족할 것 같지 않다. 나는 고민 끝에 선택지에 없던 '일단 칭찬부터 하고 본다'를 골랐다.
"정말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하하하..."
칭찬하면서 열심히 박수까지 쳤더니 그녀가 처음으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임기응변이 통한 걸까?
"이해를 못 하셨나 봐요."
임기응변이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 못 한 게 들통나서 웃은 거였구나.
"어, 음... 티가 많이 나던가요?"
"조금요."
"사실, 저는 개발자가 아니라서 기술적인 부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가상화폐의 미래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예측하는 분석가일 뿐이죠."
"그럼 분석가의 시각에서 가상화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이소영의 눈이 아까처럼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번은 의미가 달랐다.
'나를 테스트하고 있군.'
예상했던 흐름이었기에 나는 속내를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지금의 가상화폐는 사기입니다. 사기 중에서도 굉장히 악질인 다단계 금융사기죠."
다단계 금융사기는 가상화폐 투자와 흡사한 점이 많아서 이쪽 업계에선 금기어나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현재 가상화폐의 용도는 단순한 이체 서비스가 전부입니다. 사실상 은행들이 쓰는 스위프트 방식과 다를 바 없죠."
"가상화폐를 사용한 이체는 스위프트 방식보다 빠르고 수수료도 적어요.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요."
"고작 가상화폐의 이체 기능만 보고 투자금이 몰리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소영은 입술을 질끈 깨문다. 내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 눈치챈 것 같다.
"가상화폐 개발자들은 언제 구현될지도 모르는 허황된 로드맵을 제시하며 투자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상화폐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거예요."
"제가 장담하는데 지금 존재하는 가상화폐 중에 제대로 기능이 구현되는 가상화폐는 1%도 안 될 겁니다."
솔직히 1%도 많이 쳐 준거다. 현실은 0.01%의 가상화폐만 용처가 있고 나머지 99.99%는 사기다.
"지금의 가상화폐는 한 가지 중대한 요소가 결여된 상태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 없이는 앞으로도 가상화폐는 단순 투기 상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중대한 요소가 뭔가요?"
"가상공간에 있는 가상화폐와 우리가 속한 현실을 이어주는 통로죠."
"통로...?"
나는 더 설명해주지 않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그녀가 어색하게 쥐고 있는 명함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서서 이야기할 주제는 아닌 것 같군요. 관심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주세요."
* * *
이소영과 대화를 마친 뒤.
나는 강연장을 빠져 나서면서 급하게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태식아, 차 끌고 한국대 앞으로 와라."
-갑자기 뭔 소리야?
"설명은 만나서 해줄 테니까 빨리 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오케이. 바로 날아간다.
내 다급함이 전화 너머까지 전해졌는지, 박태식은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거리를 30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진짜 날아오기라도 한 거냐?"
"여의도 쪽에 일이 있어서 가다가, 네 전화 받고 바로 틀었지.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그리 재촉을 해댔어?"
"개발자 구했다. 그것도 최고의 인재로."
박태식은 휘파람을 불며 핸들을 툭툭 친다.
"누군데?"
"이소영이라고, 아직 대학생이지만 가상화폐로 강연까지 하는 실력자야."
"오우, 여대생. 예쁘냐?"
녀석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차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송파구로 바꾼다.
"야, 그렇게 말을 씹어버리면 농담한 내가 무안하잖아."
"엄청 예쁘더라."
"진짜?"
나는 한심함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서 눈빛을 보낸다.
"농담이라며?"
"아, 아니..."
"장난 칠 시간 없으니까. 네비 찍은 대로 바로 가줘. 진짜 한시가 급하다."
네비게이션에 표시된 도착 예정시간은 25분.
나는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시트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박태식의 질문 공세가 끊이질 않아서 잠자긴 글러 먹은 거 같다.
"능력 있는 사람 구했으면 된 거지. 왜 그리 급하다고 난리를 치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로 불러서 같이 일하자고 하면 상대가 오케이 하겠어? 제대로 꼬시려면 뭐라도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냐."
"그렇긴 한데, 그게 뚝딱 되는 건 아니잖아."
"회사 하나를 인수할 거야."
박태식은 전방을 보다가 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장 가상화폐 살 돈도 부족한데 회사까지 인수하는 건 무리수 아냐?"
"장기적으로는 비트코인 몇 쪼가리 사는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이 될 거다. 그러니까 믿고 따라와."
"곧 대박이라도 터지나 보네."
"아니, 그 반대야. 완전 쫄딱 망해."
잘 달리고 있던 차가 갑자기 한쪽으로 휘청거린다. 옆 차선에서 같이 달리고 있던 차가 놀라서 빵빵거릴 정도였다.
"야! 망하는 회사를 사들여서 어쩌려고 그래?"
"그런 회사라도 쓰임새는 있으니까."
"불안한데. 어디 귀퉁이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를 사는 건 아니지?"
"유명한 것만 따지면 탑 급 회사야. 아마 대한민국에서 시골 사는 어르신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대체 어디길래?"
2000년대에 등장한 국내 최대 회원 수를 자랑하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업체.
"싸이클럽."
끼이이이이익!
이번은 차가 휘청거리는 게 아니라, 아예 급정거 수준으로 멈춰 서버린다. 그나마 도로변이라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십중팔구는 사고가 났을 거다.
"진짜 싸이클럽을 인수한다고? 우리가?"
"일단 그쪽이랑 연락은 해뒀어. 최종 결과는 협상을 진행해봐야 알겠지."
"이름만 비슷한 회사는 아니지? 알고 보니 술집 이름이 싸이클럽이었다거나."
멈췄던 차가 다시 출발한 뒤로도 박태식은 자기가 알던 싸이클럽이 맞냐며 몇 번이나 질문을 반복한다.
"미니홈피 있고 도토리 팔던 싸이클럽 맞으니까 그만 좀 물어봐 줄래?"
"도무지 실감이 안 나서 그래. 너도 알잖아. 내가 고딩 시절에 싸이클럽을 얼마나 열심히 했었는지."
"그랬었나?"
"한땐 겜방 가서도 게임은 안 하고 싸이만 쳐다보고 있었잖아. 미니홈피 꾸미기에 꽂혀서 알바비를 전부 도토리 사는 데 썼던 적도 있었는데..."
"으이그. 자랑이다."
"그땐 그게 자랑 맞았지."
나도 학창시절엔 박태식처럼 싸이클럽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당시엔 싸이클럽을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다 흘러간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스마트폰 시대 이후로는 페북이나 트윗 같은 후발주자에 밀려서 지금은 사용자가 거의 없는 유령 서비스가 돼 있었다.
"싸이클럽은 한국인 30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잠들어 있는 곳이잖아. 그걸 코인 마케팅에 쓰면.... 오호라, 벌써 그림이 딱 나오네."
"나는 단순히 마케팅 효과만 보고 인수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네가 가상화폐라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싸이클럽 도토리가 떠올랐던 거 기억나지?"
박태식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린다.
"그 도토리를 사뒀더니 한 달 뒤에 가격이 2배가 됐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떻게 되겠냐?"
"오... 그거면 가상화폐를 모르는 사람도 귀가 솔깃하겠는데?"
"대중에게 친숙한 도토리와 투자 상품인 가상화폐의 연계. 나는 그 시너지를 노리고 이번 인수 건을 진행하는 거다."
"듣고 보니 그럴 싸 해. 진짜 굿 아이디어잖아!"
박태식은 이번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 동안 핸들을 두들기며 재잘거림을 이어갔다.
"그런데 싸이클럽은 데이터 규모가 장난 아닌 곳이잖아. 거길 돌리려면 유지 보수 비용도 만만찮은 거 아냐?"
"제법 많이 들더라. 서버 유지비만 2억 정도라고 하던가."
"유지비가 2억이면 월 1600만 원 정도인가? 생각보다 많이 쓰는 건 아니네."
"연 2억이 아니라 월 2억이래."
이번엔 일부러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 말을 꺼내서 차가 휘청거리지는 않았다.
"미친! 월 2억?"
"순수 서버 유지비용만 2억. 거기에 사무실 임차료, 인건비, 기타 잡비도 더해야 해."
"2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감당해? 서버 유지비만 내더라도 반년 안에 거지꼴이 될 거라고!"
나도 비용 문제가 부담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분을 적당히만 가져와야지. 싸이클럽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다 사측이 떠안고, 우리는 과실만 챙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