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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새로운 가상화폐?"
놀란 박태식의 목소리 톤이 두 단계 정도 올라간다.
"그걸 우리가 만들 수도 있는 거였어?"
"가상화폐는 원래 국가 통제를 벗어나는 게 목표야. 그러니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지."
"허... 그건 전혀 몰랐네."
나는 이후에도 가상화폐 발행에 관한 설명을 간략하게 정리해줬다.
가상화폐 개발과 발행, 그리고 상장.
특히 거래소 상장 쪽은 주식 거래소를 그대로 모방해서 만들어졌기에, 박태식도 쉽게 상장 구조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가상화폐를 우리가 만들어내면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해서 판매할 수 있는 구조구나?"
"맞아. 주식 상장 과정과 흡사해. 상장 전에도 ICO라는 방식으로 초기 투자자를 모을 수 있고."
ICO는 가상화폐 개발 초기에 비트코인으로 투자금을 받는 방식을 뜻한다.
"나는 ICO의 이점이 뭔지 모르겠다.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받는 것과 특별한 차이점도 없는 것 같은데."
"차이가 왜 없어. 벤처캐피털은 겨우 기관 한 곳에서 투자받는 식이잖아. 그것도 지분까지 내주면서."
"지분을 내주는 건 아쉽긴 해."
"ICO는 가상화폐만 주면 그만이야. 게다가 불특정 다수에게 비트코인으로 투자받는 방식이니 투자자가 한 곳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되는 거지."
처음엔 물음표에 가까웠던 박태식의 표정은 서서히 느낌표를 넘어, 스마일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설명해준 것은 ICO의 밝은 면만 부각한 것이다.
그 외의 어두운 면은 부작용이 너무 심각해서 미래엔 ICO를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는 나라도 있었다.
"어쨌든, 새로운 가상화폐를 찍어내면 그 뒤로 우리는 딱 하나만 잘하면 돼."
"그게 뭔데?"
"네가 아까 하려고 했던 거."
나는 박태식이 가져다준 제안서를 툭 치며 말을 잇는다.
"우리가 발행한 신규 가상화폐를 홍보해서 구매자를 늘리는 거야. 그렇게 가격이 오르면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구매자가 몰리겠지."
"그거라면 내게 맡겨. 국내에도 가상화폐 투자를 홍보해주는 곳이 좀 있더라고."
"그럼 가상화폐 개발 쪽은 내가 알아본다."
앞으로 몇 년 뒤, 가상화폐가 투자처로 주목받게 되면서 너도나도 새로운 가상화폐를 찍어내게 된다.
난립하는 가상화폐 중엔 수준 미달이거나 아예 사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상화폐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투자자들도 점점 신규 가상화폐 투자를 피하게 되는데.
'2015년은 아직 신규 가상화폐가 난립하기 전인 시기다. 이때 먼저 흐름을 탈 수 있다면...'
억 단위를 넘어, 조 단위의 자산가가 되는 것도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 * *
가상화폐의 대표는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비트코인이다.
하지만 비트코인은 규모가 커질수록 전송 속도가 느려지는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 비트코인의 단점을 보완해서 출시된 가상화폐가 이더리움이다.
이더리움은 출시 당시에 투자금을 모으는 방식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현금으로 투자금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더리움을 비트코인으로 교환해주는 ICO(initial coin offering : 가상화폐공개) 방식으로 투자자를 모았다.
그 결과, 이더리움은 1800만 달러에 달하는 투자금을 모으며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나는 이더리움이 성공한 패턴을 그대로 따라갈 계획을 세웠다.
참고로 이더리움이 ICO를 진행한 것은 작년이고, 정식 상장절차를 끝낸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니 시기상으로도 그리 늦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가상화폐를 만들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문 개발자 구인이다.
하지만 아직 가상화폐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이 시기에, 가상화폐 전문 개발자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외 상장을 앞둔 서울 코인 0.002BTC 교환합니다. 상장 직후 바로 급등합니다. 저가 매수의 마지막 기회.
-가상화폐 만들어 드립니다. 업계 최고 속도. 하루면 발급 가능.
-ICO를 목표로 같이 달릴 개발자 구함. 이더리움 기반. 경험자 우대.
-신규 가상화폐 독도 코인 ICO 곧 시작합니다! 한국 최대 규모. 수익은 독도 지킴이에 사용됩니다.
내가 찾은 곳은 국내 최대의 가상화폐 사이트인 '비트코인러브'였다.
사이트 이름부터 비트코인이 들어가는 곳인 만큼, 게시판 곳곳에서 가상화폐 개발과 ICO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범람하는 개발자 중에 옥석을 어떻게 가리느냐였다.
비전문가인 내가 개발 코드를 뜯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력을 확인하자니 그게 진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놈은 사짜 냄새가 나고, 이놈은 경력부터가 다 가짜네. 여긴 전부 사기꾼밖에 없는 건가?"
내가 둘러본 비트코인러브의 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탕 제대로 먹고 빠지려는 사기꾼과 그 사기꾼을 등치려는 가짜 개발자의 복마전.
이런 마굴에서 제대로된 개발자를 구하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개발자를 구할 바엔 내가 직접 코딩을 배우는 게 낫겠네."
너무 답답해서 해본 말이다.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내겐 코딩을 처음부터 배울 시간이 부족했다.
잡생각을 버리고 다시 게시판을 찬찬히 훑어간다.
오물로 가득한 쓰레기통을 뒤지는 심정이었지만 당장은 이것 말곤 개발자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구인·구직 게시판을 다 둘러보고, 개발자 전용 게시판까지 살폈으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순 없었다.
거의 반쯤은 포기한 심정으로 일반 게시판을 살피던 도중, 내 눈길을 확 잡아끄는 소식을 발견하게 된다.
[가상화폐 '에테리움'의 개발자 비탈릭 뷰테린 한국대학교 화랑학습관서 강연 예정]
처음엔 에테리움이 뭘 뜻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비탈릭 뷰테린'이라는 이름을 보고 저것이 이더리움의 잘못된 표기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 이더리움 개발자가 한국에 온다는 뜻인가?"
비탈릭 뷰테린이 한국에 와서 강연한다면 전국에 있는 가상화폐 개발자들이 대거 몰려들지 않을까?
내 예상이 맞다면 이번 강연은 내게 기회였다.
인터넷 글만 보고 개발자를 뽑는 것과 강연장에서 직접 보고 개발자를 뽑는 것은 천양지차일 테니까.
그리고 개발자 구인 외에도 비탈릭 뷰테린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들었다.
17세에 비트코인 잡지를 창간하고, 19세에 이더리움을 만들어낸 천재 개발자.
그가 개발한 이더리움은 미친 듯이 가치가 폭등해서, 미래에는 보유한 가상화폐 재산만 3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 기적과 같은 인물의 과거는 어떤 모습일까.
* * *
-저는 7번의 테스트 과정을 거쳐서 지난달 이더리움의 정신 버전을 출시했습니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의 블록체인을 응용한 가상화폐이며...
-이더리움은 가상주식시장 등 차세대 금융모델을 제작할 수 있는 언어이자 플랫폼으로 개발됐습니다.
한국대학교 화랑학습관에서는 비탈릭 뷰테린의 강연에 한창이다.
이더리움 창시자가 직접 하는 강연이다.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나는 당연히 강연장 분위기가 뜨거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강연장에 와보니, 분위기는 미적지근하다 못해 차가울 정도였다.
"아이고, 교수님. 저번에 신경 써주셨던 물건 잘 받았습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들다마다요. 오늘 끝나고 밥이나 한 끼 하러 가시죠."
강연장의 자리는 다 찼지만 집중해서 그의 강연을 듣는 사람은 몇 없었다.
특히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잡담을 떠들어대는 교수와 기자들의 행태는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비탈릭 뷰테린이 아직 20살밖에 안 된 어린 개발자라서 무시하는 건가?'
그런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에서 아직 가상화폐가 낯설다는 점이 더 큰 요인 같다.
가상화폐는 본래 개념을 이해하기 힘든 분야인데, 여기에 관심도까지 떨어지니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연 중인 비탈릭 뷰테린의 표정도 썩 좋지만은 않다.
-이상으로 비탈릭 뷰테린의 기조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으로 도쿄대 과학기술학과의 코지마 나키지마 교수님의 강연이 있겠습니다.
진행자의 안내방송이 나오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비탈릭 뷰테린의 강연 때는 강당이 조용하더니 도쿄대 교수가 나온다니까 반응이 쏟아진다.
미래에 가상화폐가 가질 위상을 아는 나로선 정말 적응이 안 되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내겐 기회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비탈릭 뷰테린을 따라서 무대 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경호원도 없이 혼자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비탈릭 뷰테린 씨, 방금의 강연 잘 들었습니다."
"그쪽은 누구신지?"
억센 러시아식 영어 때문인지 몰라도 목소리가 호전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며칠 전에 만든 명함을 내밀었다.
"가상화폐 투자 기업인 WHTS의 대표 신우혁입니다. 뷰테린 씨와 가상화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그 어떤 여지도 없이 너무 깔끔하게 거절당해서 말을 이어가지도 못하겠다.
뷰테린이 그대로 떠나려고 하던 차에, 커다란 카메라를 짊어진 사내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머니피커의 장한찬 기자입니다. 잠시 인터뷰 가능하시겠습니까?"
방금까지 심드렁했던 비탈릭 뷰테린의 반응이 180도 달라진다.
"마침 시간이 좀 비는군요. 조용한 곳으로 자릴 옮기고 진행하시죠."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뷰테린과 기자는 나를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두 사람 모두 먼저 대화 중이던 나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대단한 기업가도 아니고, 기자나 셀럽도 아닌, 이름도 생소한 신생 투자사의 대표일 뿐이었으니까.
'내가 이런 취급 당하기 싫어서라도 성공하고 만다. 딱 1년만 기다려라.'
나는 그들이 떠난 방향으로 주먹 감자를 한 번 날려주고는 다시 강연장으로 돌아왔다.
강연은 초청된 해외 교수들 차례가 끝나고 이젠 한국대 학부생들이 이어받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제, 제, 제가 소개하는 가상화폐는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투, 투표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렇기에... 어... 가상화폐 1개는 투표권 1개가 되는 식이며...
이번 발표자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손을 덜덜 떨면서 발표하고 있었다.
긴장으로 목소리는 떨리고, 억양도 조금 특이한 데다가, 발표 주제도 인기 없는 가상화폐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제대로 듣는 사람이 없었다.
-블록체인 형태의 완벽한... 보안성으로 검열이나, 감시 걱정 없는 메, 메시지 전송이 가능합니다.
그래도 발표 내용만 놓고 보면 꽤 흥미로웠다.
가상화폐 본연의 기능은 물론이고, 검열과 감시가 없는 메시지 전송과 토큰으로 익명 투표까지 가능하다니.
"아이디어는 좋네. 하지만 저런 가상화폐가 생기면 중국시장에서 제1순위로 퇴출 명단에 오르겠지."
실제로 저런 특성 때문에 중국시장에서 퇴출당한 가상화폐가 있긴 있었다.
님블 코인.
한때 가상화폐 시가총액 11위까지 올라갔다가, 중국에서 퇴출당하는 바람에 40위권 밖으로 이탈, 홍콩과 러시아 등지에서 수요가 폭발하면서 다시 6위까지 치고 올라갔던 가상화폐다.
'그러고 보니 님블 코인의 핵심 개발자가 한국대 출신이라는 뉴스를 봤던 것 같은데...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