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
백승태의 표정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구겨진다. 몇 년을 같이 일했던 부하 직원이 대뜸 누구냐고 물었으니 당황스럽겠지.
그는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인상을 찌푸린 뒤에야 입을 뗀다.
"누구냐니? 너, 지금 장난쳐?"
"장난이 아니라 진짜 몰라서 물은 겁니다만."
"뭐?"
그의 눈빛이 당황에서 의아함으로 변해간다.
이쯤이면 때가 됐다 싶어서 준비해온 말들을 단번에 쏟아낸다.
"병원에서 말하길 제가 넘어질 때 충격으로 기억 일부의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쪽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상실?"
"의사의 표현으로는 기억 혼란이라는 말을 쓰더군요."
백승태는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내가 혹시 거짓말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다.
"성함이라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럼 뭔가 기억날지도 모르니까요."
"백승태다. 부장이고 네 상사지."
"음... 역시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 상사라고 하셨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내 상태를 다시금 살피다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지금쯤 놈의 머릿속에선 별별 생각이 다 들고 있을 거다.
이놈이 진짜 기억상실이 맞나 싶은 의심부터 먼저 들 것이고. 다음으론 어떤 기억이, 어디까지 날아갔는지도 알고 싶을 거다.
그러다 기억상실이 진짜라는 확신이 든 뒤로는.
'나를 더 확실히 이용하려고 들겠지.'
안 그래도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혈안이 돼 있었는데, 기존에 기억까지 없다면 이보다 더 써먹기 좋은 허수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아는 백승태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놈은 앞으로 더 과감하게 행동할 것이고, 그런 흐름은 내게 기회가 될 것이다.
* * *
KN케미컬 본사에서 두 번째로 큰 개인 집무실은 부사장실이 아니라 전무실로 쓰이고 있다.
박민교 전무.
그는 박철순 사장의 동생으로 사실상 KN케미컬의 실세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본디 회사에 있는 시간보다 골프장에 나가는 시간이 더 많은 그였지만, 오늘은 온종일 집무실에 박혀서 두꺼운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씁... 이 망할 회사는 방법이 없어."
박민교가 보고 있는 서류는 KN케미컬의 분기 결산보고서였다.
서류의 숫자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KM케미컬은 바닥이 뚫린 배나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땜질과 눈가림으로 운행을 계속하고 있으나 다시 가라앉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
살아남는 방법은 빨리 챙길 건 챙겨서 배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박민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누구야?"
-백승태 부장입니다.
박민교는 복도 쪽 창문에 걸린 블라인드를 내리고 직접 집무실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는 그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던진다.
"일은 어떻게 됐어?"
백승태는 떠듬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아, 그, 그게... 계좌 준비 문제로 송금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직도 안 됐다고?"
"이게 원래는 돈이 넘어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요즘 그쪽도 분위기가 안 좋은 터라..."
박민교의 표정이 시시각각 일그러진다. 백승태는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알았기에 얼른 듣기 좋은 말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쓰는 계좌는 케이맨 제도 쪽이라서 절대 사고 날 일은 없습니다."
케이맨 제도는 본래 조세 회피처로 쓰이는 곳인 만큼 검은돈은 숨기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잔금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상해 쪽 브로커를 통해서 달러로 바꿔 달라고 해뒀습니다."
"그건 안 돼. 달러가 더 쌓이면 보관하기 힘들어진다. 기다렸다가 다음번 계좌로 같이 옮겨."
"다음 계좌는 두 달 뒤에 열리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달을 기다리라는 말이 나오자 박민교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진다.
"더 빨리 처리할 방법은 없어?"
"전무님도 아시겠지만, 단기간에 큰돈을 옮기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내 말 못 들었어? 다른 방법이 없냐고 물었잖아."
백승태는 누런 손수건을 꺼내서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목소릴 냈다.
"금괴로 보관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 부하 직원을 보내서 바꿔오면 증거도 만들어질 테니 일거양득입니다."
"그놈은 저번에도 보냈잖아. 자꾸 금을 사 오라고 하면 의심할 텐데."
백승태가 손을 싹싹 비빈다. 그의 입가에는 간악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그놈이 머릴 심하게 다쳤는데 글쎄, 기억상실이 왔답니다."
"기억상실? 아예 바보가 됐단 말이냐?"
"그 정도까진 아니고, 부분적으로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험 삼아서 몇 가지를 물어봤는데 금괴 구매 건은 아예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금괴는 부피가 적어서 돈을 빼돌리는데 최고의 수단이다. 하지만 대량으로 구하려면 신원이 다 까발려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고놈이 금을 사다 준다면 여러모로 좋긴 한데, 영 꺼림칙하단 말이지."
"저도 찝찝해서 병원 쪽에 확인까지 해봤습니다."
"거기선 뭐래?"
"날짜는 물론이고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확인했다고 하면 믿을 법도 했지만, 박민교는 누구보다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다음 달에 그놈 데리고 라스베이거스 찍고 오기로 했지?"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옆에서 자세히 지켜봐. 검증만 확실히 되면 골수까지 뽑아먹을 방법이 있으니까."
* * *
7년 만에 겪는 회사 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무료했다.
그냥 무료한 정도가 아니라 지독한 무료함이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회의와 보여주기식의 보고서 제출, 그리고 타 부서에서 요청하는 잡무를 하다 보니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간다.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됐으나 사무실에서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기억으론 10분 정도 더 앉아 있다가 부장급이 먼저 밥 먹으러 사라지면, 그제야 다른 직원들도 줄줄이 식당으로 내려갔던 것 같다.
저녁을 먹는 것 외에 퇴근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회사 분위기상 정시 퇴근은 농땡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무조건 9시가 될 때까지 일이 없어도 자릴 지켜야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 사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고.
회사에 미련이 없는 나로선 시간 죽여가며 사무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먼저 퇴근합니다."
나는 딱 6시가 되자마자 가방을 들고 일어난다.
사무실에 모두가 내 쪽을 쳐다본다. 다들 목을 쭉 빼고 있는 것이, 무슨 미어캣을 보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던 차에, 누군가 나를 불러세운다.
"신 대리. 오늘 급한 일이라도 있나?"
회계부의 하승찬 과장이다. 여기저기 참견하길 좋아하지만 꽁한 성격이라 찍히면 피곤한 스타일이다.
나도 한땐 저 인간 비위 맞춰준다고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 왜 벌써 가?"
"퇴근 시간이니까요."
하 과장의 표정을 보니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딱히 막아 세울 명분도 없는지 괜히 책상을 살피다가 두꺼운 서류철 하나를 내게 내민다.
"할 일이 없으면 이것 좀 하고 가지?"
"이게 뭐죠?"
"이번에 발주 들어온 제품 결제 명세서인데 엑셀 작업을 해야 하거든. 신 대리가 확인하고 입력 좀 해둬."
"명세서 작업이면 회계부 업무 아닙니까?"
순간, 사무실 온도가 2도 정도는 내려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타 부서인 제가 이 일을 해버리면, 회계부 전체가 제시간에 일도 못 쳐내는 부서가 되는 꼴 아닙니까."
한 바퀴 돌리는 척하면서 몸쪽 꽉 찬 직구를 던졌다.
"지금 뭐, 뭐, 뭐라고?"
하 과장은 내가 이럴 줄 예상 못 한 건지 입을 붕어처럼 뻐금거린다.
여기서 더 들이받았다간 진짜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더 할 말 없으시면 가보겠습니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쯤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뒤에서 하 과장의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저 인간 성격이면 내일부터는 나를 아예 무시할 테니, 오히려 회사 생활이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 * *
회사 주차장을 나와서 차의 방향을 판교 쪽으로 돌린다.
판교에는 새로 구한 사무실이 있다. 당분간은 두 곳을 자주 오가야 했기에, 가까운 장소를 찾다가 정한 곳이 판교였다.
박태식이 찍어준 주소를 따라갔더니 8층짜리 빌딩이 자릴 잡고 있었다.
"신축이라 건물 때깔은 괜찮네."
명목상 우리 회사는 '해외 투자회사'였기에 투자자들의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럴듯한 건물에 입주하는 것이 유리했다.
그래 봤자 겨우 사무실 1개를 임대해서 쓰는 처지지만, 그건 차차 넓혀가면 그만이다.
"오셨습니까, 신우혁 대표님."
사무실에 도착하자 박태식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오, 그래. 잘 지냈는가 박태식 주임. 바닥 걸레질은 끝내 뒀지?"
"걸레질은 물론이고 창틀도 다 닦아 뒀습니다. 여기 반짝반짝한 것 좀 보십시오."
"잘했군. 앞으로도 우리 회사가 번창하려면 이보다 더 열심히 바닥과 창문을 닦아야 한다네."
"맡겨만 주십시오, 대표님."
나는 피식 웃으며 사무실 중앙의 테이블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는 레이저로 각인된 회사 명패가 놓여있었다.
[WHTS 컴퍼니]
내 이름과 박태식의 이름을 이어 붙여서 지은 회사명이다. 이걸 볼 때마다 우리의 네이밍 센스가 처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자, 모든 주주분이 모인 것 같으니 지금부터 WHTS 컴퍼니의 제1회 임시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둘밖에 없는데 무슨 주주총회야."
"주주총회 맞잖아. 주주 참석률 100%의 근본 있는 주주총회."
농담 같은 소리지만 박태식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도 거기에 맞춰서 장난기를 쫙 빼고 진지한 경청 모드에 들어간다.
"남는 시간에 우리가 투자할 가상화폐 시세를 좀 살펴봤거든. 작년에 있었던 거래소 해킹 사건 이후로 약세가 쭉 이어지고 있더라."
2014년 마운트곡스 해킹 사건과 2015년 비트스탬프 해킹 사건.
뛰어난 보안성을 홍보했던 블록체인 기반 가상화폐가 정작 거래소 해킹에는 무력하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 때문에 1000달러에 달하던 비트코인 시세는 단 하루 만에 1/10 수준인 97달러까지 추락하게 된다.
"지금 같은 분위기가 쭉 이어지면 가격 반등은 힘들어. 솔직히 1/10로 떨어진 상품을 선뜻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반대로 생각해봐. 오를 계기만 있으면 예전 가격까지 올라갈 거란 기대로 단숨에 폭등할걸."
"맞아. 그래서 내가 그 계기를 좀 생각해봤는데."
박태식은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꺼내든다. 그 안에는 가상화폐 가치를 올릴 수 있을 법한 아이디어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제안서? 이런 건 언제 만들었냐?"
"네가 커피숍에서 시간이 1년 밖에 없다고 했을 때부터."
박태식이 작성한 제안서는 단순히 아이디어만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주식 방송에서 가상화폐를 홍보한다는 내용이 있으면, 어느 채널의 시청률이 얼마까지 나오며, 담당자 이름과 광고료를 얼마 줘야 하는지까지 상세히 조사돼 있었다.
"단기간에 한 것치곤 디테일하게 조사했네."
"내가 주식 방송 쪽에 아는 사람이 꽤 있어서 일일이 전화 돌려가면서 알아봤지."
나는 제안서를 읽다가 말고 내려놓는다.
"음... 좋은 정보긴 한데, 당장은 홍보할 타이밍이 아니다."
"어째서?"
"우리 수중에 가상화폐가 얼마 없으니까."
회사의 여유자금은 대략 15억 정도다.
이걸로 전부 비트코인을 사들인다 해도 겨우 5000개 남짓.
대형 거래소에 예치된 비트코인이 100만 개가 넘는 현시점에서 비트코인 5000개는 한 줌도 안 되는 수량일 뿐이다.
"보유한 가상화폐도 얼마 없는데, 우리가 돈을 써서 홍보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꼴 밖에 안 돼."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왜 없어?"
홍보한 만큼의 몫을 전부 챙기는 방법.
"우리가 새로운 가상화폐를 만들면 그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