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
어머니가 챙겨주신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복합 쇼핑몰이다. 내일부터 정식으로 회사에 출근해야 할 테니 그전에 간단히 걸칠 거리라도 사둘 생각이었다.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건 아니다만, 내 옷장에 있는 옷들은 좋게 말하면 너무 멋을 부렸고, 나쁘게 말하면 날티가 심하게 났다.
명품 지갑과 벨트, 셔츠는 백화점의 고급 브랜드에다가 신발도 비싸기로 유명한 V사 제품이다.
당연히 직장인 월급으로 이걸 다 살순 없으니 대부분 짝퉁이나 중고였고, 그나마 신발 정도만 해외직구로 샀던 기억이 난다.
'나도 참, 철이 없었지. 이땐 왜 이렇게 입고 다녔을까.'
아마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얕보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났지 싶다.
쇼핑몰에서 가장 저렴한 옷가게에 들러서 셔츠와 바지를 몇 벌 사고, 바로 옆 폐업정리 중이라는 잡화점에서 지갑과 벨트도 구했다.
고급 브랜드의 물건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은 한 푼의 투자금도 아쉬운 사업 초창기 아닌가.
'어머니께 쓰는 돈은 몰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무조건 아껴야 해.'
최단거리로 쇼핑을 마쳤음에도 피로감이 장난 아니다.
잠시 앉아서 쉬려던 차에, 휴대폰이 울린다.
-뭐 하냐.
수화부에서 박태식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침 나도 통화를 하려던 참이라 잘 됐구나 싶다.
"쇼핑몰에 뭐 좀 사러 나왔다."
-잘됐네. 나온 김에 같이 점심이나 먹자. 논현동으로 가면 되는 거지?
"여길 온다고? 회사는 어쩌고?"
-그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금방 가니까 거기서 딱 기다려.
요놈이 말하는 걸 보니 왠지 사고를 친 것 같다. 일단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어때? 빨리 왔지?"
박태식은 통화가 끝나고 10분이 채 안 돼서 도착했다.
여기서 녀석이 일하는 H은행까지 거리가 못 해도 한 시간인데, 이렇게 빨리 온 걸 보면 답이 바로 나온다.
"너, 회사 때려치웠냐?"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진짜 귀신이네, 귀신이야."
먼저 나오는 깊은 한숨. 이어서 욱하고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대책 없는 놈아. 회사를 그냥 때려치우고 나오면 어떡해?"
"내가 이번은 진심으로 믿겠다고 했잖아."
"아니..."
"그리고 내가 어제 자기 전에 가상화폐가 뭔지 좀 알아봤는데, 단순한 게임 화폐 수준이 아니던데?"
박태식은 저 혼자 신이 나서 가상화폐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 댄다.
블록체인과 보안의 우수성을 시작으로 탈중앙화가 어쩌고, 미래 화폐가 어쩌고, 전부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읊어대는 레퍼토리였다.
내겐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의 내용인지라 커피나 홀짝거리며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흠흠."
박태식은 내게 잘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한다.
"가상화폐의 가치가 초창기보다 3000배나 올랐더라고? 그걸 보니까 느낌이 빡! 오는 게, 이거다 싶더라. 만약 우리가 투자 시기만 정확히 알 수 있으면..."
"이미 알고 있어."
녀석은 그 말을 듣더니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당연히 '쾅!' 하는 소리가 났고, 덕분에 커피를 마시던 다른 테이블 손님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아이고, 다리에 쥐가 났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들 보세요."
박태식은 나를 억지로 흡연실 쪽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 와중에 절뚝거리는 연기까지 하는 꼴을 보니 웃겨서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저놈 저거, 은행원이 아니라 개그맨 시험을 봤어야 했는데.
"야, 그거 진짜야?"
"당연히 진짜지. 그 시기가 지금이 아니라서 문제지만."
가상화폐의 급등기는 2017년 말부터다. 그러니 지금 시점으로부터 따지면 2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가상화폐는 투자할 시기가 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야 해. 그러니까 허튼 생각하지 말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싹싹 빌어."
"안 돼. 이미 사직서까지 냈단 말이다."
"사직서를 오전에 냈으면 아직 수리까진 안 됐을 거 아냐?"
"그게... 그..."
더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그냥 사직서만 내고 온 게 아닌 것 같다. 맨날 욕하던 과장 얼굴에 직접 집어 던지기라도 한 건가.
"으휴, 이 못난 놈아."
"야, 그렇게 따지면 너도 회사 그만둔 건 마찬가지잖아."
"뭔 소리야? 난 병가라서 내일부터 정상 출근인데."
순간, 박태식 얼굴에 망했다는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회사에서 어쨌길래 그러는 거야?"
"아침에 과장 놈 면전에 사직서를 명중시키고 왔지."
"어째서 너는 내 예상을 한 치도 못 벗어나냐."
"따지고 보면 네가 더 나쁜 놈이야. 바람은 잔뜩 불어넣었으면서, 저 혼자 살겠다고 계속 출근하는 게 어디 있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어쨌거나 법인까지 만들어서 같이 일해보자고 이야길 꺼낸 건 나였으니까.
"태식아, 실은 나도 좋아서 회사에 나가는 게 아니야."
나는 KN케미컬의 현 상황과 누군가가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직원 하나가 어떻게 천억대 돈을 횡령할 수 있어?"
"증거는 만들기 나름이야. 그리고 돈 먹인 증인으로 위증을 시키고, 법원 쪽도 매수하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했으면 당장 그만둬야지!"
"그만두기엔 너무 늦었어. 내가 퇴사하는 즉시 회삿돈 빼먹고 도망갔다고 범인 몰이를 시작할걸."
그때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욱하고 감정이 격해진다.
나는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비워내고 남은 얼음까지 씹어 먹으며 냉정을 유지했다.
"천억대를 꿀꺽할 정도면 진범도 보통 놈은 아닐 거 아냐?"
"일단 부장은 확정이고, 뒤에는 최소 임원급 이상이 있겠지. 아니면 아예 사장이 꾸민 일일 수도 있고."
"허... 영화보다 현실이 더 막장이라더니 그게 틀린 소리가 아니었네."
박태식은 이후에도 누명을 벗을 여러 가지 의견을 내줬다.
공익 신고, 언론 제보, 인터넷 여론으로 공론화 등등.
그러나 방금 언급된 방법들은 이쪽에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나 가능한 수단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결론은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면서 증거를 모으고, 뒤로는 힘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체급을 키우는 수밖에 없겠구나."
"문제는 그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없다는 거야."
"얼마나 남았길래?"
"최대한 길게 잡으면 1년 정도."
박태식은 어찌나 놀랐으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린다.
"뭐, 뭐? 1년? 잠깐만. 네가 말한 가상화폐 투자는 한참 기다려야 한다며?"
나도 시간이 부족한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시기를 1년 이상 앞당길 수 있는 편법을 쓸 생각이었다.
* * *
우리는 원활한 투자를 위해 해외 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법인 설립 장소는 싱가포르였다.
세금이나 금융 인프라만 따지면 홍콩이 더 유리했지만, 차후에 중국 정부의 개입을 생각하면 무조건 싱가포르가 답이었다.
싱가포르 법인 설립에 필요한 현지 대리인과 사무실 주소는 브로커를 통해서 해결했다.
법인의 초기 자금은 내가 13억, 박태식이 4억을 넣어서 총 17억 원을 만들었다.
지분은 투자금만큼 배분했으며, 현지 법인 자금은 나중에 증자처리로 조달할 거라서 일단은 1달러만 넣어뒀다.
복잡한 법인 설립 건을 마무리 짓고, 우리가 쓸 사무실까지 보러 돌아다녔더니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그렇게 바빴던 하루가 저물고, 7년 2개월 만에 맞이하는 출근 날이 찾아왔다.
* * *
언제나 그렇듯 아침 6시가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제로 이 시간에 일어나다 보니, 이젠 억지로 더 자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된다.
샤워하고 옷을 걸친 뒤 느긋하게 캔커피까지 마셨음에도 시간은 6시 30분이다.
집에서 회사까지 대략 40분 거리니까 아직도 출근하긴 이른 시간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조금만 더 쉰다고 미적거리다가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섰겠지만,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출근하는 곳은 돈을 벌러 가는 회사가 아니라, 정보를 캐기 위해 잠입하는 적진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
KN케미컬은 경기도 용인에 본사가 있다.
이른 시간인지라 도로는 한적했고, 덕분에 10분이나 일찍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삑.
사원증과 지문을 찍고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오는 회사라서 길을 기억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출근하던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때 당시엔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겠다고 밤낮을 안 가리고 일만 했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리 힘들게 살았나 싶다.
"어? 신 대리님? 출근하셨네요."
본관 3층으로 올라서자 누군가 내게 아는 척을 해온다.
옆 부서 소속인 여직원이다.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걸 보면 그리 친하게 지내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좋은 아침요. 그런데 몸은 좀 괜찮으신 거예요?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는데요."
"괜찮습니다. 가벼운 뇌진탕이 왔다고 하더군요."
"아... 그렇구나. 그럼 회사에 연락이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백 부장님이 병가 중에 보고 한번 없다고 엄청 뭐라 하시던데요."
백 부장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억지로 끌어 올렸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백승태 부장.
내게 현금을 대량의 달러로 바꿔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거나, 해외 도박장에 데려가는 등. 갖은 개 짓거리로 나를 횡령범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러고는 재판장에 뻔뻔하게 증인으로 나타나서 위증까지 지껄였었지.
꽈악.
나는 뒤로 숨긴 주먹을 꽉 말아쥐어서 간신히 원래의 표정을 유지한다.
그러는 동안 여직원은 나를 다시 한번 위아래로 쳐다보고는 물어온다.
"며칠 쉬다가 오셔서 그런지 몰라도 분위기가 확 바뀌셨네요."
"그렇습니까? 저는 모르겠는데요."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는데... 확실히 다른 느낌이네요. 아, 당연히 긍정적인 쪽이에요. 호호호."
분위기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내 껍데기는 28살의 신우혁이지만, 속은 감방에서 7년이나 숙성된 신우혁이었으니까.
"그럼, 가보겠습니다."
본관 3층 복도를 따라서 쭉 걸어가면 재무팀 사무실이 나온다.
내가 속한 통합관리부는 인원이 적어서 재무팀과 같은 사무실을 쓴다.
끼익.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출근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 가방만 던져두고는 곧장 사무실 한 바퀴를 쭉 둘러본다.
어디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미리 파악해둘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 자리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이 떠오른다.
'내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었네. 아니면 몸뚱이는 8년 전의 나라서 그런 건가.'
사무실을 다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파티션 너머에 있는 자리였다.
저기가 백승태가 앉는 곳이다. 책상 위에는 한가득 쌓여있는 서류철과 신형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저길 뒤져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잠시 욕심이 앞섰지만 이내 고갤 흔들어 흩어버린다.
범죄 증거를 꼭꼭 숨겨둬도 모자랄 판에, 대놓고 책상에 올려두고 퇴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괜히 의심받을 짓은 하지 말자. 자연스럽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만 움직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가래 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거기서 뭐 해?"
뒤를 돌아보니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중년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직속 상사인 백승태 부장이었다.
제발 꿈에서라도 만나길 기도했었다. 저 간악한 혀를 뽑고, 두 손으로 목을 비튼 뒤,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씹어 먹어버리고 싶어서.
만약 내게 지킬 사람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그 망념을 실현했으리라.
스윽.
나는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수백 번이나 연습했던 대사를 읊는다.
"실례지만 누구 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