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KN케미컬 1800억 원 횡령 사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뉴스는 액수도 액수지만 일개 직원의 단독 소행이라는 점이 더 큰 화제를 모았다.
18억도 아니고, 180억도 아닌, 무려 1800억 원을 혼자서 횡령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나 역시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놀라서 뉴스를 몇 번이나 다시 돌려봤을 정도다.
그도 그걸 것이 뉴스를 탄 KN케미컬은 내가 다니는 회사였다. 직원인 나도 모르는 사건이 뉴스를 타고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런데 진짜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1800억 원을 횡령한 범인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그게 누군가하고 보니.
통합관리부 팀장 신 모 씨.
참고로 통합관리부 소속의 팀장은 나 혼자였고, 신 씨 성의 직원 역시 내가 유일했다.
처음엔 수사 과정에서 착오로 내 이름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서에 자진 출석했으며, 구치소에 갇힌 뒤, 재판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무죄를 받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누가 봐도 억지였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내 직급은 팀장이 아니라 대리였다.
이런 말단이 무슨 재주로 회삿돈 1800억 원을 빼돌린단 말인가.
오해나 착오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꼭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내 믿음은 판결을 받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피고인 신우혁을 징역 10년 및 벌금 173억 원에 처한다. 피고인이 위 벌금을 납입하지 아니하는 경우, 3년간 피고인을 노역장에 유치한다.
* * *
뿌연 미세먼지가 지독히 낀 날이다.
그럼에도 내 눈엔 하늘이 이보다 더 맑아 보일 수 없었다.
"흐읍. 하..."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바깥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숨 쉬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바닥에 닿는 땅의 감촉도 낯설다. 심지어 매일 봐왔던 교도소의 콘크리트 외벽마저도 어색할 지경이다.
7년 2개월.
정말 영겁처럼 긴 시간이었다. 이것도 도중에 가석방을 받아서 줄어든 거지, 아니었다면 3년을 더 갇혀 있을 뻔했다.
"지긋지긋했고 다신 보지 말자."
교도소 정문을 향해 다짐하듯 중얼거린 뒤 몸을 돌려세운다.
그런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뭐 그리 궁상떨고 있어? 그동안 정이라도 든 거냐."
내 20년 지기 친구 박태식이다.
지인 중에 유일하게 면회를 와줬고, 영치금도 넣어줬으며, 어머니 장례식도 챙겨준 고마운 녀석이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속으로 꾹꾹 밀어 넣고서 입을 뗀다.
"춥다. 빨리 가자."
박태식이 내 앞을 막아선다. 그의 손에는 팩에 담긴 마트 표 두부가 들려있었다.
"두부는 먹고 가야지."
"뭔 두부 타령이야."
"그냥 먹어. 이래야 다신 안 온다더라."
나는 무심하게 두부를 한 입 넣었다. 콩 비린 맛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 조각을 더 떠서 입에 넣자, 이번엔 확실히 맛이 느껴진다.
짠맛.
그건 두부가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쌓여 있던 눈물의 맛이었다.
* * *
우리는 차를 타고 근처 도심지의 조용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막상 술이 나오니 정신없이 먹게 되더라.
내가 술을 마시고, 술이 나를 마시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솟아도 꾸역꾸역 술을 밀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학창 시절 이야기, 친구들 근황 이야기, 군대 이야기, 대학 이야기 등. 안주로 삼을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때 창렬이가 학주 선생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잖아. 기억나지? 엉덩이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서는..."
"그래놓고 다음 날 또 지각했지."
"아, 맞아. 진짜 대단한 놈이라니까."
낄낄거리며 옛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나왔지만, 우리는 한 가지 주제만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KN케미컬 1800억 횡령 사건.
나도, 박태식도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부터는 절대 웃을 수 없다는 것을.
애초에 나 같은 일개 서민 나부랭이에겐 승산이 없던 싸움이었다.
증거는 조작됐고, 증인은 위증을 읊었으며, 검사는 물론이고 판사, 심지어 내 편을 들어야 할 변호사까지 놈들과 한통속이었으니까.
"자, 마시자! 마시고 죽자!"
그렇기에 더 술을 퍼붓는다. 그 날의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은 취해서 잊어버리는 것이 유일했다.
마시고 토하고 마시고 또 토하고.
우리는 그 짓도 반복할 수 없을 때가 돼서야 술집을 나섰다.
"야, 신우혁. 같이 우리 집에 가자니까. 내가 너 온다고 일부러 이불도 하나 사뒀어."
"됐어. 인마."
박태식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나 같은 놈이 그런 집에 얼굴을 비추는 것 자체가 민폐다.
"자꾸 빼기냐? 나 진심 섭섭하다."
"빼는 게 아니라 빵에서 맨날 부대끼면서 잤더니, 오랜만에 혼자 자보고 싶어서 그런다."
같이 가자는 녀석을 억지로 보내고 나도 택시를 잡아탔다.
일단 택시에 타긴 했는데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젠 집도 회사도 없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 * *
눈을 뜨니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던 것 같긴 한데, 내가 어디로 가달라고 했더라?
'아, 맞아. 수원역으로 가달라고 했었지.'
그런데 창밖을 내다봐도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밤이라도 수원 근처면 가로등 정도는 있을 텐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뭘 물어보고 싶어도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차를 세워두고 담배라도 사러 갔나?'
일단 차에서 내릴 생각으로 손잡이를 당겨보는데 문이 안 열린다. 운전석 쪽으로 넘어가봤지만 이쪽 버튼도 전부 먹통이다.
"좀 이상한데."
창밖을 다시 살피니 도로 한 가운데였다.
술이 확 깬다. 이젠 창문을 깨서라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한 물건을 찾으려고 택시 안을 뒤지던 도중, 갑자기 눈이 시릴 정도의 환한 빛이 쏘아진다.
부아아아아앙.
뒤에서 커다란 화물차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급한 대로 창문을 주먹으로 때려보고, 발로 걷어차기도 했지만 실금도 가지 않는다.
"제발 깨져라! 제발! 제발!"
그러는 동안에도 화물차는 점점 거리를 좁혀온다.
이 정도로 가까워졌다면 택시를 보고도 남았을 텐데, 어째선지 화물차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었다.
"설마...?"
헤드라이트의 빛이 택시 안을 가득 메운다. 이젠 화물차 운전기사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주마등 같은 현상은 없었다.
그저 귓가에 울리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어둡게 덧칠된다.
* * *
눈앞이 온통 새카맣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어도 몸뚱이가 움직이지 않아서 방법이 없다.
텅 빈 바닷속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쭉 이어진다.
이런 상태라도 다행히 생각은 계속할 수 있었기에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서 시간을 보낸다.
'아까의 화물차는 뭐였을까? 진범이 내 입막음을 하려고 보낸 건가? 망할, 그 정도 충격이면 난 죽었겠지. 이후엔 어떻게 되는 걸까. 저승사자라도 찾아오나? 아니면 이대로 끝?'
그러다 몸이 움찔하며 경련이 일었고, 이어서 무언가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느낌이 전해진다.
"신우혁 씨. 신우혁 씨."
저승사자치곤 멀쩡한 남자 목소리다. 옆에서 수군거리는 여자 목소리도 따라온다.
그 소리 덕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정신이 드십니까?"
저승사자는 새하얀 가운과 청진기를 걸치고 있었다. 내 상상 속의 저승사자는 좀 더 시커멓고 갓을 쓴 이미지였는데 말이다.
시선을 돌려보니 하얀 침구와 수액, 그리고 간호사 차림의 여자가 보인다.
'저승이 아니라 병원이구나.'
화물차에 치일 땐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운 좋게 살아남았나 보다.
내가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의사가 다시 말을 건다.
"환자분은 넘어지면서 후두부에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해 계셨어요."
"넘어지다뇨? 저는 화물차에 치였는데요."
내게 질문하던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트를 살핀다.
"환자분 이름은 기억나십니까?"
"신우혁입니다."
"나이와 오늘 날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36살. 날짜는 아마... 10월 25일일 겁니다."
의사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트에 뭔가를 필기하고서 말했다.
"환자분 나이는 28살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저는 분명히... 윽!"
"오, 아직은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환자분은 뇌진탕 초기증상과 미세출혈이 있습니다."
의사가 만류했으나 나는 억지로 고갤 치켜들고 내 몸을 살폈다.
다행히 팔다리는 멀쩡히 붙어 있었다. 화물차에 치이고 이 정도면 정말 신이 도왔다고 볼 수 있다.
"에... 뇌진탕에는 단기적인 기억 혼란이 올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서 컨디션을 지켜보세요."
"제가 기억 혼란이라뇨?"
"아까 나이를 잘 모르셨잖아요. 36살이라고..."
"저는 36살이 맞습니다."
의사는 쥐고 있던 차트를 다시 한번 훑고서 말했다.
"신우혁 씨는 88년생 아닙니까?"
"88년 7월생입니다."
"그럼 28살이 맞는 거지요.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올해는 2023년이고 저는 36살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의사는 얕게 한숨을 내쉰다. 그 옆에 서 있던 간호사도 비슷한 반응이다.
이 사람들이 단체로 짜고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진짜 올해가 2015년이 됐다거나.
어느 쪽이든 명확해지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죄송한데, 거울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간호사가 거울을 가져온다. 친절하게도 직접 내 얼굴 앞에 대고 비춰주기까지 했다.
"어...?"
1800억 횡령 재판이 있던 날.
나는 판결 결과가 너무 억울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턱 아래쪽이 길게 찢어지는 상처가 났었다.
그런데 거울 속 내 턱엔 그 상처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혹시 싶어서 손으로 턱 아래를 훑어도 봤지만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얼굴이 꽤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띵해진다. 내가 2015년, 8년 전으로 회귀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사고를 당했으면서 살아있는 것도 기적인데, 과거로 회귀까지 했으면 더 좋은 일이잖아.'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박이 터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2023년까지의 미래를 다 겪고 왔던 만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훤히 꿰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주식이나 부동산, 각종 투자 상품, 여기에 가상화폐 등등.
이런 정보를 이용해서 미리 투자해둔다면 부자가 되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의사와 간호사가 자릴 비운 뒤.
나는 머리맡에 있던 내 휴대폰에다가 기억나는 사건들을 입력했다.
굵직한 투자 건은 물론이고, 시시콜콜한 이슈라도 일단 떠오르는 것은 몽땅 기록하고 본다.
수감 중에 꼬박꼬박 읽어오던 신문이 이런 식으로 도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잠깐만, 수감?'
회귀했다는 기쁨에 잠시 잊고 있던 사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른다.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충격으로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했던 KN케미컬 1800억 원 횡령 사건.
지금으로부터 딱 1년 뒤인 2016년 8월이면 사건이 경찰에 접수되고 뉴스까지 타게 될 거다.
'내가 돈을 아무리 긁어모은다 해도 횡령 누명을 쓰면 전부 범죄 수익으로 추징당하고 말 거다. 거기에 7년 2개월짜리 징역은 덤이고.'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을 그렇게 헛되이 날려 버릴 순 없었다.
횡령범 누명을 벗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진범을 잡아서 내가 겪었던 시궁창보다 더한 불구덩이에 처넣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