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외전2. 어머니의 존재
(210/210)
210화 외전2. 어머니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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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외전2. 어머니의 존재
2023.05.01.
나이아 알코스의 인생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더 강하지 못했다는 후회. 더 빠르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후회. 더 똑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후회. 더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했다는 후회. 그녀가 겪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한 후회.
생전, 나이아 알코스는 다소 비인간적이라는 평가를 자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웅은 인간이 아니니까. 초인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니까. 민중이 그녀에게 바란 것은 오직 완전무결한 영웅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후회하지 않는다.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미처 구하지 못한 이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절망이 아닌 그 너머의 희망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계속해서 빛을 향해 나아가며, 스스로가 등대가 되어 비탄에 빠진 이들을 인도한다.
보통의 정신력으론 견디지 못할 일이었다. 민중이 그녀를 비인간적이라 평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아 본인은 제법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참아볼 만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그게 허황한 착각이었음을, 나이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영혼을 가진 생명체가 죽은 뒤, 영혼은 어찌 되는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해결되지 않고 되풀이될 물음일 것이다.
그 근원적인 의문의 해답을 나이아는 죽은 뒤에 알았다.
생명이 죽은 뒤, 영혼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의 흐름에 휩쓸려 순환의 고리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에서 생전에 쌓은 업을 모두 씻어내며 깨끗한 영혼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순환의 고리가 빨아들인 업은 우주를 확장시키기 위한 에너지로서 소모된다.
그렇게 하여 생명은 죽고, 다시 태어나며, 우주는 무한히 넓어지는 것이다. 선악의 심판 따위는 필요치 않은, 아주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이치.
나이아의 영혼은 그 이치를 거슬렀다.
강력한 인력이 그녀의 영혼이 순환의 고리에 휩쓸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인력의 근원지는 펜던트. 사후 한차례 흐릿해졌던 자아를 조금씩 되찾은 나이아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깨닫고 탄식했다.
그녀의 영혼은 산산이 찢어져 결코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지구에서 각성자로서 살아가며 쌓은 후회가 영혼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고, 찬탈자와의 싸움 뒤 패주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 일부를 한 움큼 찢어 놈에게 미끼로 주었다.
미지에 차원에 불시착한 뒤에는,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펜던트를 개조하며 자신의 영혼을 분리해 옮겨 담는 작업을 했다.
‘아니. 무의식이 아냐. 그건…… 내 미련이었어. 못다 한 일에 대한 미련이 기억을 잃은 나를 채찍질하고 무모한 일을 시도하도록 몰아붙인 거야.’
어찌 되었든, 복잡하게 찢어진 그녀의 영혼을 순환의 고리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것으로 인식했다. 말하자면 펜던트에 구속된 지박령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뭘 해야 하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가, 나이아는 영혼만 남은 상태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뭘 해. 이 상태로 뭘 할 수 있다고.
펜던트의 기능에 간섭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도 못하고, 하다못해 폴터가이스트 같은 심령현상도 못 일으킨다.
가능한 거라고는 펜던트를 중심으로 주변을 지켜보는 것뿐. 펜던트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들을 지켜보는 것뿐.
관찰이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은 채로 프레지오를 만나고 그의 구애에 어물쩍 넘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름대로 변경백의 안주인으로서 현명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신의 속박을 떨쳐내고 모든 기억이 온전해진 나이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허술한 점이 많았다.
불치병에 걸렸으면,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가장 먼저 자신이 죽은 다음을 대비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이아 알레프’는 그 점을 소홀히 했고, 그 빈틈은 가문에 적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3왕녀 미오네가 새로운 안주인이 되고, 나긋나긋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냉혹한 정치력으로 삽시간에 주인 없는 가문을 휘어잡았다.
-……능력은 좋네. 잘 타일러서 아군으로 삼았어야 했는데.
짧은 감탄 뒤, 불같은 분노가 찾아왔다.
‘저 개 같은 년이 감히 자이안을?!’
미오네의 수법은 교묘했다. 결코 직접적으로 자이안을 해하지 않았다.
고립시키고, 입지를 좁히며, 철저하게 혼자서 말라 죽어가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나이아는 그 모든 과정을 자이안의 곁에서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홀로 무거운 시련을 짊어진 아들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꿈꾸는 그 모습이 대견했다.
-그럼, 누구 아들인데. 누가 키웠는데!
그러나 제아무리 견고한 신념을 가졌어도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후계자로서의 모든 권한을 사실상 박탈당한 상태에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던 자이안을, 암살자의 비수가 강제로 꺾으려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적도 일어났다.
-오빠!
주인의 MP를 마냥 빨아먹기만 할 뿐이던 펜던트가 수십 년 만에 제 일을 했다.
사용자가 위급할 때만 발동하는 긴급 소환 기능. 솔직히 말하면 나이아는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나이아는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심지어 찬탈자와 싸웠을 때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자이안,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울고 웃으며, 나이아는 아들의 생존에 기뻐하고 그가 입었을 커다란 상처에 슬퍼했다. 한 번 마음이 꺾여버린 자이안은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은거하는 삶을 택하려는 아들을 보고, 나이아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가고자 하는 길을 부모가 강제해서는 안 된다. 욕심이고, 폭력이다.
-그래, 자이안. 힘들면 쉬자. 괜찮아.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이안 자신이었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며 완전히 꺾인 것만 같았던 신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밝게 빛났다.
영혼이기 때문에 물리적이지 않은 것까지 볼 수 있는 나이아의 눈에, 자이안은 밝게 빛나는 등대 그 자체였다.
나이아 알코스는 후회도 좌절도 몰랐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
한 번 알아버리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망쳤다. 그런 나이아가 보기에, 절망을 알고서도 끝내 제 다리로 다시 일어선 자이안이야말로 영웅이고 초인이었다.
-자이안…….
나이아는 기뻐하며, 동시에 슬퍼했다.
-미안해. 엄마가 짐을 떠넘기고 말아서.
웨코스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가 있었다.
마족 ‘교만’이 나타났고, 강력한 정신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펜던트가 펼친 방어 프로그램의 반동으로 자이안이 의식을 잃었다. 정확히는 펜던트의 중추 영역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나이아는 펜던트에 빙의된 지박령 비슷한 존재. 계속해서 의지를 투사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이안과 대화를 나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이안의 의지를, 신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뒤로도 자이안과 함께 하며, 많은 일이 일어났다.
유리아 알즈레드, 어쩌면 미래의 신부감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와 동행하게 됐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였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자이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높았다. 특히 자이안의 내면을 잘 캐치했고, 그가 흔들리거나 고민할 때마다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었다.
-저런 아이가 몇 명만 더 있으면 내가 걱정하면서 지켜보지 않아도 될 텐데.
신기하게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자이안의 곁에는 하나둘 동료가 늘어갔다.
프레이가 아르스, 크룩스, 유민을 다시 불러 모으고 소아레스와 케이가 합류했다.
동행하지는 못하지만 자이안을 친우나 은인이라 여기는 클라비수스 황제, 신생 성녀 퀴나스, 카펜트리 상회장 페시스 등.
-크룩스 넌 어째 더 덩치가 커진 것 같아. 유민이는 아직도 애구나. 예전에도 그랬지만, 너무 여려.
그렇게 자이안의 곁에 사람이 보이며 북적일수록,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이아는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도 저 사이에 함께 있었더라면.
그 이름은 외로움이었다.
-하하……. 나이아 알코스, 이제 보니 정말 약한 사람이었구나. 그런 주제에 영웅이니 뭐니 나대고 다녔던 거구나.
자이안의 여행은 대륙 최북단까지 이어졌다. 그곳에는 나이아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스 웰플레인. 스스로를 하이엘프라 칭한 정체불명의 존재.
-신스라면, 어쩌면…….
돌이켜보면 생전 신스와 나눈 대화 중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많았다. 기억을 잃은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스는 나이아가 다른 차원에서 비롯된 존재임을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신스조차, 끝내 나이아가 자이안의 곁에 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아니, 정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나이아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가끔씩 눈이 마주치는 것 같기도 했고, 신스가 나이아를 보며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말을 섞지는 못했다.
숲에 1년 넘게 머무르며, 마침내 숲을 떠나는 그 날까지.
-그래. 어차피 난 죽은 사람인걸. 자이안이 중요하지, 나 같은 게 중요하겠어.
많은 고민과 시련 속에서 성장을 거듭한 자이안은 한두 해 만에 놀랄 만큼 의젓해졌다.
올곧은 신념을 가졌음에도 방황하는, 어수룩한 소년은 이제 없었다.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기 길을 나아가는 청년이었다.
마침내 자이안이 모든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찬탈자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목표를 잡았을 때. 나이아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이었다.
자신도 한 번은 실패한 일이다. 자이안마저 실패하면 어쩌지? 제아무리 강하게 성장했어도 자이안은 나이아의 아들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갖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말리고 싶은 마음 역시 있었으나, 설령 대화가 통하는 상태였더라도 나이아는 끝내 그를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찬탈자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자이안은 마계로 넘어가 게이트 재해의 원흉을 쓰러뜨리자는 계획을 말하던 과거 나이아 자신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프레이가 그때 나이아를 말리지 못했듯, 이번에도 자이안을 말리지 못했다.
그 대신 프레이는 펜던트를 빌려 한 가지 비밀스러운 작업을 했다. 지박령인 나이아가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빠, 설마…… 죽을 생각이야?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굳은 각오가 깃든 무거운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오빠, 그러지 마. 자이안은 잘 해낼 거야. 자이안을 믿자. 응?
나이아의 애원은 끝까지 닿지 않았고, 결국 프레이는 은밀하게 작업을 끝마쳤다. 어쩌면, 하고 나이아는 깨달았다.
이게 자신을 떠나보냈던 프레이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렇다면 생전의 자신은 프레이에게 정말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교만이 다시 나타나고, 신스가 찾아왔다. 교만의 계획이 명명백백해지며 마계로 역습을 할 준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마침내 모두가 마계로 향하고, 나이아는 그곳에서 자신의 파편, 혹은 분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와 마주했다.
-이건…….
강력한 인력, 그리고 동화. 나이아가 오랫동안 펜던트에 묶인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두 존재가 그 자리에서 합쳐져 새로운 자아를 가진 나이아가 태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나이아가 펜던트의 지박령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함께 따라올 수 있을 리도 없었겠지만.
나이아는 그 자리에서 분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마계에서 이들을 기다렸는지, 그 시간을 어떤 식으로 보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근본적으로는 서로 동일한 존재이니 자연스럽게 기억이 하나가 된 것이다.
반면 분신은 나이아가 거기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동화 작용 역시 처음 보는 자이안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는 정도로 어렴풋하게만 나타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파편, 분신. 완전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불완전한 파편뿐인 영혼에 순수 MP가 달라붙어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조금이라도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와해되어 흩어지는 존재다.
분신은 길잡이인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의 역할을 했다. 찬탈자를 찔러죽일 수 있지만, 동시에 집어 든 자의 손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순수 MP라는 건 그만큼이나 위험한 힘이었다. 나이아로서도 되도록 이용하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만약 반드시 그 힘을 이용해야 한다면,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아는 기억을 잃은 채 어이없이 죽어버렸고, 이제 아들이 역할을 이어받으려 한다.
마계 전역을 검은 진흙으로 뒤덮고, 자신의 품은 동족의 영혼까지 이용해가며 폭주하는 교만을 막기 위해. 나이아의 분신과 자이안이 펜던트의 중추 영역으로 가라앉았다.
나이아에게는 두 번째 기회였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개인적인 감정을 아꼈다. 다만, 자이안에게 과거를 보여주며 그의 등을 조용히 밀었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본래 나이아의 최종 목적은 단순했다. 찬탈자를 말 그대로 죽이는 것. 그 죽음으로 인해 마계가 붕괴하건 말건, 그에게 희생당한 선주 인류가 어찌 되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자이안이라면 어쩌면 다른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시도는 해 봐야죠.”
최후의 순간, 분신을 붙잡고 스스로의 생각을 설명하는 자이안의 모습을 보며 나이아는 웃었다.
성검도 마검도 아닌, 순수 MP를 이용하는 새로운 검을 빚어내 그 힘으로 마계를 죽음의 땅이 아닌 생명의 땅으로 정화해 보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 정작 이를 설명하는 자이안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두 나이아는 그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그리고, 죽음의 땅에 새벽빛이 밝은 그 때.
자이안과 작별 인사를 나눈 분신이 빛으로 화해 흩어지는가 싶더니, 극히 작은 일부가 나이아에게 흡수되었다.
다른 부분은 마계를 정화하기 위한 힘으로 쓰였다. 나이아는 이해했다. 지금 흡수된 부분은 그녀가 과거에 떼어낸 영혼의 파편. 마계를 정화하는 데는 필요 없는 부분이다.
모두가 마계를 떠나 돌아오고, 평화가 찾아왔다.
프레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됐음을 밝히고, 자이안의 동생이 새로운 나라의 국왕이 되는 등 크고 작은 일이 있었다.
나이아는 여전히 자이안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이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기적의 매개체가 되었던 펜던트는 마계에서 돌아온 직후 그 부하를 이기지 못해 완전히 침묵했고, 그에 따라 나이아와 펜던트 사이의 구속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졌다.
언젠가 둘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면, 나이아의 영혼은 그대로 순환의 고리로 빨려 들어가리라.
-안 돼. 그건…… 싫어.
나이아는 처음으로 미련을 말로 표현했다.
-조금만 더. 하다못해 펜던트가 고쳐질 때까지만…….
펜던트는 완전히 파손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부의 자가 수복 기능이 미약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넉넉잡아 100년 정도만 지나면 기초적인 기능은 수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아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적었다. 나이아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자이안,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내 아들.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고, 마음을 졸이게 만든 적도 많았지만, 결국 훌륭하게 자라 나를 뛰어넘었어. 괜히 우중충한 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저, 그냥…… 언젠가 우주의 이치를 뛰어넘어, 어떠한 형태라도 상관없으니,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한 그 순간. 강렬한 힘이 나이아의 영혼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이아는 눈을 감았다. 미련도 후회도 모두 내려놓고, 새롭게 맞이하게 될 다음 생을 위해.
그리고, 나이아는…….
“으, 으으……?”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육성으로 목소리를 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
환한 불빛이 보였다. LED 전등의 인공적인 빛. 나이아는 저도 모르게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딱딱한 철제 침대 위에 올라타 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작아.’
어린아이, 아마도 10살 정도? 그렇게 스스로의 상태를 인식한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복잡한 지식이 휘몰아쳤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던 많은 지식들이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가며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인 듯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나이아는 지식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나이아 알코스. ‘과거’의 이름. 지금은 이름 없는 하이엘프. 신스의 유전자를 채취해 이를 기반으로 태어난 복제 하이엘프. 복제, 하이엘프…….
“신스!”
나이아가 눈을 빛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멋진 하이엘프 같으니! 이런 선물을 준비해두고 있었구나!”
엄밀히 말하면 의도된 선물은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우연이 셀 수 없이 겹쳐 만들어진 기적이었다.
새벽의 빛이 마계를 뒤덮은 그 순간. 나이아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이아의 영혼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당시 자이안이 바란 것은 두 가지였다.
마계를 정화해, 무고하게 희생된 선주 인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지막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스스로를 희생한 나이아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그 강한 의지에 순수 MP가 감응했다. 분신의 영혼이 나이아와 합쳐짐에 따라, 그 의지의 대상은 나이아 자신이 되었다.
그리고 펜던트의 구속력이 약해져 마침내 그녀의 영혼이 자유로워진 순간, 그 의지가 이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주인 없는 알맞은 육체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만약 신스가 미리 준비한 그 육체가 없었더라면,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꼼짝없이 갓난아이부터 새로 태어나야 했을 것이다.
신스가 복제 하이엘프가 눈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 엘프들의 딱 한 걸음 부족한 생명 공학 기술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이 모두 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소리를 했네. 자이안이 못 들어서 다행이다, 진짜.’
얼굴을 매만지며 열을 식힌 나이아가 침대에서 훌쩍 내려왔다.
무균실 유리창 바깥에서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엘프들이었다. 저도 모르게 반가움이 솟았다가, 위화감에 살짝 인상을 썼다. 엘프들에게 반가움을 느끼는 건 ‘나이아’의 감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신스도?’
나이아는 알레프 저택 부지에 묻힌 신스를 떠올렸다.
애초에 이 몸은 신스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의 영혼이, 아주 작은 일부나마 순환에 휩쓸리지 않고 스며들었다 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나이아 본인의 자아만 명확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정말 작은 일부분뿐인 것 같지만.
‘아니…….’
나이아는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내면에 의식을 집중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아주 작은 자아의 파편을 느끼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히려 잘됐네.’
나이아가 엘프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여긴 얼른 정리하고 자이안 보러 가야지!’
지금부터 나이아의 막무가내에 어울리게 될 자신들이 앞으로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엘프들은 새로 모시게 될 하이엘프에게 존경을 담아 경배를 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