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외전1. 각자의 시간(1) - 세계수의 숲
(208/210)
208화 외전1. 각자의 시간(1) - 세계수의 숲
(208/210)
208화 외전1. 각자의 시간(1) - 세계수의 숲
2023.04.29.
자이안 일행이 모든 준비를 마쳐 다시 여행을 떠나고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세계수의 숲 깊은 곳, 이곳 세계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도의 과학 기술로 세워진 엘프들의 도시는 그 어느 때보다 부산스러웠다.
“항공기 개발은 순조로우냐?”
도시 지하, 대규모 군수 공장 시설. 갑자기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바쁘게 일에 매달리던 모든 엘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오와 열을 맞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각이 잡힌 경례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머니.”
“인사치레는 됐다. 개발은 어느 정도나 이뤄졌지?”
신스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엘프들은 언제 격식을 차렸냐는 듯 다시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엘프의 대표자로서 작업을 관리 감독하던 여성 엘프, 에일레나가 신스에게 다가왔다.
어린 나이에 ‘최고 대표’로 선정되어 장로회보다도 더 큰 권한과 책임을 짊어지게 된 에일레나는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이었다.
“시범형 항공기 개발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앞으로 1주일 이내로 모든 개발을 마치고 시범 비행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 모든 엘프는 신스와 1:1로 얘기하기 전 약식으로 경례를 하는 것이 규율이다. 그러나 에일레나는 그 규율을 무시하고 신스가 원하는 대답만을 빠른 말투로 말했다.
이것이 신스가 그녀를 최고 대표로 선정한 이유였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뇌수술을 받지 않아 융통성이 있고, 자이안 일행과 가깝게 지낸 경험 덕에 그 어떤 엘프보다도 인간적이다.
능력은 좋게 봐도 평범한 수준이지만, 엘프 기준에서 ‘평범’이란 자기 직무를 문제없이 완벽히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니 큰 흠결도 아니다.
“그래. 다른 이상은 없고?”
“현장은 문제없습니다. 모두들 잘해주고 계세요.”
그리 말하는 에일레나의 목소리에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인간 긴장과 동시에 자신감 또한 희미하게 느껴졌다.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리라. 신스는 말없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항공기 개발은 일전에 프레이가 지나가듯 말한 ‘엘프는 항공 전력이 없나?’라는 의문에서 착안한 것이다.
굳이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보지 않아도 항공기라는 건 문명에 어마어마한 혁신을 가져다준다.
신스는 세계수와 숲, 사명에 묶여 오랫동안 정체된 엘프 사회에 이 시도가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신스는 얼마간 에일레나를 곁에 두고 그 자리를 지켜보다가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그녀가 빠른 속도로 향한 곳은 세계수, 그 안에서도 오직 신스에게만 접근이 허락된 중추 영역 ‘심장부’였다.
‘여전하군.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굴면서,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
며칠 전부터 세계수의 용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MP 정화 기능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 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모든 기능을 관리하는 세계수의 심장은 불규칙적인 색으로 요동치며, 맥동 역시 급격히 빨라졌다가 갑자기 느려지는 등 몹시 불안정했다.
신스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아챈 것은 4일 전 가벼운 점검차 들렀을 때였으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이런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후로 매일같이 찾아오고 있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어. 이 상태가 안정적인 건가?’
모자란 지식을 동원해 관리용 패널을 이것저것 만져보며 심장의 상태를 점검했지만, 신스가 아는 선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도 신스는 아무 소득 없이 세계수를 떠나야만 했다.
그런 일이 몇 주 동안 매일같이 반복되었을 무렵, 마침내 변화가 찾아왔다.
그날은 시험 비행에 성공한 항공기의 양산 계획이 세워진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곁에 붙어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에일레나에게 건성으로 화답하며 회의를 지켜본 뒤, 신스는 습관적으로 세계수의 심장을 찾았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관리용 패널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요……?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환청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으나 신스는 다시 한번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목소리는 신스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의 것과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아무…… 없――
목소리가 또 다시 들리다가, 신스가 저도 모르게 패널에서 손을 떼어내자 갑자기 뚝 끊어졌다. 신스는 직감했다.
이 목소리가 패널을 통해 세계수로부터 들려오는 것임을. 그리고 목소리를 익숙하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 또한 착각이 아니었음을.
“난…… 여기 있다.”
-아무도…… 없나요……?
“여기 있다.”
-여긴, 어디죠……? 나는 대체……?
“여기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자란 관리자야.”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나태의 영혼이, 그 의식이 파편이나마 세계수의 심장에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나태와 다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그 이후로 신스는 에일레나에게 최소한의 보고만 받은 채 거의 모든 시간을 세계수의 심장 앞에서 보냈다.
신스의 머릿속에는 까마득한 과거 나태가 재미 삼아 가르쳐준 영혼 공학에 관한 지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스는 이를 토대로 세계수 곳곳에 흩어진 나태의 영혼의 파편을 그러모아 그의 의식을 보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작업은 큰 탈 없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작업 결과 탄생한 것은 ‘나태’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새로운 존재였다.
얼기설기 끼워맞춘 영혼의 파편 사이사이로 세계수의 성질이 스며들어 탄생한 그 존재를, 신스는 과거 인간들의 원시 문화 중 하나인 ‘정령 신화’에서 착안해 세계수의 정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교만이 침략해올 거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다오.”
성공적으로 자아를 확립한 정령이 가장 처음 꺼낸 말이 그것이었다. 자칫 맥락없고 허황된 내용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신스는 이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정령인 그는 세계수의 방대한 연산 능력을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다. 상정할 수 있는 모든 인과와 경우의 수를 철저하게 계산해 내놓는 그 추론은 예언에 가까운 정밀도를 가진다.
-자이안 알코스는 자신이 가장 처음 죽인 마족이 교만이라고 했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나태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시점의 자이안 알코스는 폭식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졌지만, 교만은 그 폭식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힘을 가졌어.
“그렇다면…… 교만은 자이안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을 했을 뿐인 건가?”
-자이안에게 죽은 교만은 클론(clone)일 거야. 의료를 목적으로 한 클론 연구는 교만이 담당했어.
거기서 잠시 정령은 말을 멈췄다. 신스는 조용히 기다렸다. 아마 지금 정령의 내면에서는 한낱 생명체가 그 끝자락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복잡한 연산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교만의 목적은 동족의 부활…… 아니, 복권(復權)이야.
“복권?”
-교만은 찬탈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잡아먹혔어. 혼자 도망칠 수는 있어도, 자신을 따라온 다른 동족들까지 모두 지킬 수는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일부러 잡아먹혀서 자신과 찬탈자 사이에 영혼의 연결을 만든 뒤, 이를 이용해서 반대로 찬탈자를 지배하려는 계획이었어. 찬탈자를 지배해 그 힘을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면, 함께 먹힌 동족들 역시 새로운 육신을 만들어 되살릴 수 있어.
“그럼 부활한 동족들과 함께 마계에서 살면 그만이지 않나.”
-말했잖아. 부활이 아니라 복권이라고. 돌아와야지. 한 번 자기 손으로 버린 고향을 되찾으러.
“……!”
그 뒤로 이어진 정령의 얘기를 모두 들은 끝에 신스는 교만의 계획이 얼마나 위험한지, 왜 그를 막아야 하는지 이해했다.
자신을 믿고 따른 동족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는 그 신념은 군주로서는 분명 이상적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희생당해야 하는 측에서 보면 무분별한 폭력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야겠군.”
-늦지 않도록 내가 도와줄게.
그 때부터 신스의 일상은 그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바빠졌다.
항공기 양산은 본래 수십 년에 걸친 장기 계획이었으나, 신스는 1년 이내에 전투용 폭격기를 최소 1개 편대 이상 완성할 것을 지시했다.
세계수의 정령이 예측한 교만의 침략 시기가 1년 이내였으니까. 엘프의 기술력은 충분히 그 정도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세계수의 정령 역시 아낌없이 자신의 연산 능력을 지원했으므로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와 더불어 신스는 자신의 신체를 더 강인한 기계 골격과 아티팩트 등으로 완전히 개조할 것을 결심했다. 그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자이안의 곁에서 함께 사우며 교만을 상대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정령의 예측이었다.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된 기분은 어때?
“……천년은 젊어진 기분이군그래.”
처음에는 신체 능력이 너무 강해져 적응하는 데 애먹기도 했으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이만한 능력이라면 분명 자이안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쪽의 전력이 교만보다 우세하다면, 교만은 어리석게 패배할 때까지 싸우기보다는 즉시 마계로 철수할 거야. 우리 쪽에서 마계로 건너갈 수단 역시 있어야 해.
정령의 제안에 따라 ‘열쇠’가 만들어지고, 이는 기계로 대체된 신스의 심장 안에 숨겨졌다.
엄밀히 말해 세계수의 숲에서 만들어진 열쇠는 미완성 상태였다.
신스의 심장에 머무르며 하이엘프의 정수가 축적되고, 자이안 일행이 가진 ‘펜던트’가 매개가 되었을 때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혼자서 균열을 여는 아티팩트를 1년 이내에 만들어내는 건 세계수의 연산 능력을 가지고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이의 상태는 어떤가?”
“모든 생명 반응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신스는 자신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했다.
유리벽 너머로 비치는 무균실 안. 철제 침대 위에 인간으로 치면 10살 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 엘프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침대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각도에 따라 찬란한 은빛으로도, 빛바랜 잿빛으로도 보이는 기묘한 색이다.
세계수 내부의 생명 공학 시설, 그리고 신스와 세계수의 정령이 가진 생명 공학 지식을 엘프들에게 모두 공개했다.
수백 명의 엘프가 이 일에 매달렸고, 예상보다도 빠른 시기에 결실이 맺어졌다. 복제 하이엘프. 바로 무균실 안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아이다.
그러나 데이터상의 모든 결과가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하이엘프는 처음 무균실 위 침대에 놓인 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하염없는 기다림 속에서 시시각각 시간만 지났고, 신스가 떠날 날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에일레나. 내가 한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죠, 어머니. 저 분이 눈을 뜨는 즉시 모든 관련 자료를 완전히 폐기할 것. 혹은 어머니께서 떠난 뒤 1년 동안 돌아오지 않으셔도 마찬가지로 모든 자료를 폐기할 것.”
에일레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는 긴장감도 많이 옅어지고, 얼핏 장난기마저 엿보인다. 그녀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자리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다.
노파심에 내린 명령이었다. 평범한 엘프는 머리에 심은 칩 덕분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원리 원칙을 추종하므로, 예상치 못한 일탈을 벌일 염려가 없다.
그러나 최고 대표인 에일레나는 칩을 심은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엘프보다도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는 건, 욕망에 쉽게 타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 잘 부탁한다.”
결국 신스는 자신의 유전자로부터 태어난, 어찌 보면 자신의 쌍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습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세계수의 숲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 사이에 홀로 남겨진 그 아이가 훗날 어떤 파란을 몰고 오게 될지는 조금도 예상치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