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귀환
(20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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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화 귀환
2023.04.27.
따뜻한 빛이 세계를 감싼다. 죽음의 땅을 부드럽게 품어 안는다.
땅을 뒤덮은 검은 진흙이 녹아 없어지듯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엄밀히 말하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세계를 뒤덮은 따뜻한 새벽빛에 녹아 들어가, 한 데 섞이며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찬탈자로부터 비롯되어 모든 생명을 증오하며 거절하는 악한 힘이, 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진흙이 씻기며 재로 뒤덮인 듯한 검은 땅이 드러났다. 새벽빛은 그 역시 공평하게 품에 안았다.
풀잎이 하나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한, 검게 물들어 스러질 것만 같은 작은 생명이었다.
그러나 풀잎은 허망하게 꺾이기는커녕 점점 더 자라나며 자신의 주변을 생명으로 물들였다.
검은 땅이 녹이 벗겨지는 금속처럼 새로운 색으로 물들었다. 식물이 자라기에 부족함 없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온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씻어 내리듯 머나먼 곳에서부터 밝은 빛이 짓쳐 들었다. 천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왜소한 세계에 태양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아래. 진흙이 씻겨 사라지며 드러난 땅 위에, 평온하게 몸을 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교만은 나직하게 탄성을 뱉었다. 다른 감정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탄이었다.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 아니,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광경이, 작디작은 필멸자 한 명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교만은 고개를 돌려 빛의 기둥 속에 서 있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물론 모든 기적이 자이안의 힘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인간 한 명이 온전히 다룰 수 있는 마나의 크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거시적인 규모로 보면 티끌만 한 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자이안은 자신이 직접 다룰 수 있는 힘 대신, 마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힘을 이용했다.
자신의 힘을 매개로 하여 일종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찬탈자의 의지에 따라 모든 생명을 증오하며 거부하던 마계의 온 마나가, 자이안의 의지에 감응하여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는 연쇄를 시작했다.
그 연쇄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찬탈자가 먹어치우고, 교만이 그로부터 강탈했던 선주 인류의 영혼. 거대한 마나가 일으킨 생명의 연쇄는 그 영혼들이 자리 잡을 새로운 육신 또한 만들어냈다.
찬탈자의 힘으로부터 태어난 왜곡된 죽음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진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서. 교만이 그토록 염원한 선주 인류의 부활이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이뤄진 것이다.
“정말이지…… 분에 넘치는 선물이로구나.”
교만은 허탈한 듯도, 만족한 듯도, 안심한 듯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의 빛은 아직도 지칠 줄을 모르고 뻗어 나가고 있었다. 곧 마계 전역이 빛에 휩싸여 새로운 생명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시대에 교만의 자리는 준비되지 않을 것이다.
교만의 말대로, 분에 넘치는 선물이었다. 자이안의 그 선한 의도와 배려를 받아들이기에는 그동안 그가 쌓은 죄업이 너무나 많고, 또 무거웠다.
지금 자신은 찬탈자와 다르지 않은 존재다. 새로운 새벽의 빛은 결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환한 빛이 마침내 교만을 완전히 감쌌다.
온몸이 불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교만은 그저 평온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짊어진 죄업에 비하면 이런 고통은 형벌이라 부르기라도 부끄러웠다.
“잠깐…… 기다려요.”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교만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빛의 기둥 속에서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포기하지 말아요. 당신 역시 살아날 수 있을 거예요.”
교만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온몸을 불사르는 빛이 이내 교만의 얼굴마저 완전히 뒤덮었다.
‘고맙다, 자이안 알코스. 그리고…….'
아마도 자이안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나이아 알코스.’
교만의 육신과 영혼이, 그가 가진 모든 힘과 정신이 녹아내려 흩어지며 새벽빛의 일부가 되었다. 그 힘 역시, 마계를 새로운 세계로 재탄생시킬 거름의 일부로 쓰일 것이다.
“거봐. 내가 저럴 거랬지?”
곁에서 들린 쾌활한 목소리에 자이안은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교만이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고 목숨을 버린 것 역시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슬픈 일은 따로 있었다. 자이안은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나이아의 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반대편이 그대로 비쳐 뵈는 반투명한 모습이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요?”
되도록 태연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볼썽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음…… 그걸 굳이 대답해야 할까? 자이안,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는 일이잖아?”
다소 장난스러운 그 말에 자이안의 표정이 참지 못하고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나이아는 구할 수 없다.
선주 인류와는 달랐다. 그들의 영혼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기에, 그에 알맞은 육체만 새로 만들면 되었다. 그러나 나이아에게는 영혼이 없다.
교만과도 달랐다. 교만은 구원의 여지를 스스로의 판단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나이아에게는 여지 자체가 없다.
그녀는 의지를 가진 마나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힘은 이 땅에 새로운 새벽을 밝히기 위해 거의 대부분 소모되었다.
“그건 너무해요.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를 희생하기만 할 뿐이라니…….”
“아하하.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니?”
“…….”
“그리고, 자이안. 난 이미 충분히 보답을 받았어.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자이안의 눈빛에 의문이 어렸다. 나이아는 밝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거칠지만 친애가 가득한 손길이었다.
“이런 멋진 아들을 만났잖아.”
입술을 깨문 자이안이 참지 못하고 나이아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신기루처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몸. 그마저도 점점 감촉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네가 자랑스러워.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네가.”
그 말이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품에 안은 감촉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프레이는 자이안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나이아를 눈앞에서 잃고 견디지 못할 슬픔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가도,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며 결의에 찬 시선을 높이 들어 올리는 자이안을.
‘나 따위는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군. 몸도, 마음도.’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한편으로는 허전했다. 프레이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펜던트가 만든 임시 육체 따위가 아닌, 본래 지구에 있어야 하는 자신의 진짜 몸.
‘여차하면 이 목숨, 거리낌 없이 바칠 생각이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탐욕과 분노가 쓰러진 뒤 찾아온 짧은 휴식기에 온갖 핑계를 대며 자이안에게서 펜던트를 빌린 것이었다.
소환 메커니즘에 손을 대, 아바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몸을 불러오기 위해서. 성공은 했지만, 정작 선을 보일 기회는 없어지고 말았다.
‘쫓아가기 벅찰 지경이네.’
거기까지 생각한 뒤 프레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제 내가 쫓아가서 뒷바라지를 할 필요도 없겠군.’
암흑 속에서 단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며 도움을 구하던 소년은 이제 없다.
어느덧 훌쩍 자라 청년이 된 조카는 설령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의 신념을 방향키 삼아 혼자서 망망대해를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프레이는 자이안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검은 땅이 씻겨나가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적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안을 열고 봐도 그 원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현상이었다.
그래도 자이안의 의도 자체는 이해가 됐다. 그는 나이아와는 다른 길을 고른 것이다. 나이아는 아마 찬탈자를 죽이고 그대로 마계 역시 통째로 멸망시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적이라고 인지한 상대에게는 결코 자비도 연민도 베풀지 않으니까. 그러나 자이안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가능한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풀고자 했다.
“잘 된 거냐?”
프레이가 자이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를 중심으로 높게 솟아오른 빛의 기둥이 처음과 비교하면 제법 가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빛의 기둥이 가늘어진 만큼 푸른 하늘과 녹음이 우거진 땅은 면적을 넓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자이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모든 현상은 자이안의 의지에 감응한 MP가 제멋대로 일으킨, 거대한 생명 연쇄 반응의 결과였다.
자이안이 한 일은 비유하자면 수로를 만들어 특정한 방향으로 물길을 비튼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싸울 일도.”
하나둘, 잠들어 있던 선주 인류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그들은 몽롱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조용히 기쁨을 나눴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의문을 품은 이들은 없었다. 마치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벅찬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이안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는 일행들을 모두 불러모아 선주 인류가 온전히 되살아났으며, 마계는 그들을 위한 땅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설명했다.
“그럼…… 다 끝난 거야?”
유리아가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듯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이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끝난 건 아니죠. 아직 돌아가는 게 남았잖아요.”
이제 빛의 기둥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가늘고 흐릿했다. 자이안은 얼마 남지 않은 그 힘을 마지막으로 온전히 자기 뜻대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아예 경험이 없었더라면 힘들었겠지만…….’
자이안에게는 펜던트, 그리고 열쇠의 힘을 이용해 한 차례 차원을 도약한 경험이 있었다.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감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순수 MP를 다룰 때에는 복잡한 원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강한 의지뿐.
‘길을 열어라.’
빛의 기둥이 자이안의 눈앞에 응축되었다. 이윽고 빛이 쐐기처럼 뾰족해지더니, 공중에 꽂히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원래 세계로 통하는 푸른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 유지되지는…… 윽. 않을 겁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빠르게 설명하던 자이안이 신음을 삼키며 한 차례 크게 비틀거렸다. 그동안 체내를 충만히 채우던 순수 MP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탈력감이 찾아온 것이다.
프레이가 재빠르게 그를 부축하며 다른 일행들에게 어서 들어가라는 듯 턱짓을 했다. 모두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은 자이안은 그들을 안심시키듯 강하게 웃었다.
“모두가 들어가는 걸 보고 마지막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시간을 못 맞춰서 혼자 여기 남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어서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유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밝게 말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케이와 소아레스가 뒤따라 균열 너머로 사라지고, 프레이를 제외한 각성자들은 소환을 해제해 지구로 돌아갔다.
“……삼촌은 왜 안 가고 계십니까?”
혼자 남은 프레이를 보고는 자이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프레이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을 머뭇거렸다.
“이건…… 그게…… 크흠. 조금 이따 설명해주마.”
마치 도망치려는 듯 프레이가 균열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황당해하며 바라보던 자이안도 곧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으로 균열에 발을 디디기 전, 자이안은 잠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의식을 되찾은 선주 인류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자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사이.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눈이 마주치자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의도는 선했을지언정 그 수단은 잘못되고 만 교만을 대신해 진정한 의미로 자신들을 구원한 자이안에게, 가능한 모든 감사의 마음을 담아.
꾸벅 고개를 숙여 화답한 뒤,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균열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