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새벽의 빛
(205/210)
205화 새벽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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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새벽의 빛
2023.04.26.
“도착했어. 여기가 펜던트의 중추야.”
줄곧 회랑 안쪽의 빛무리를 바라보던 자이안은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그제야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금 전 나이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오랜 생각 끝에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펜던트의 중추 영역. 그랬다. 나이아의 목적은 이곳까지 도달해 자신의 모든 힘을 전달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나이아는 자이안의 의식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돌발적인 사고, 예기치 못한 우연 같은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자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의 의식이 나이아와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자이안의 시선이 다시 회랑 안쪽의 빛무리로 향했다. 그 안쪽에서는 지금도 빛바랜 추억들이 두서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이안은 그중 하나에 의식을 집중했다.
‘저 때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지.’
실패와 성공, 만족과 불만족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고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었다.
자이안의 주재로 시작한 그 토론 속에서 자이안은 어설프게나마 최선을 다해 논리를 펼쳤다. 나이아는 때로는 긍정하고, 때로는 부정하며, 때로는 그의 어설픈 논리를 보강해 주었고.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이안. 가장 중요한 건 항상 이상을 바라는 거란다.”
소리 없는 영상 속에서 나이아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하나를 구하고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일 때, 둘 모두를 구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거야.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 이상을 이루지 못했을 때 받는 상처도 클 거야. 다음에 또 같은 일을 겪게 될 때, 이전에 받은 상처가 두려워서 다시 도전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
자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때의 추억을 되새겼다.
‘명검은 오랜 시간 자신의 몸을 때리는 고통을 견딘 끝에 완성되는 법.’
나이아가 말하는 것과 같은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 모든 경험을 양식으로 성장해 끝내 이상을 그려 내는 그런 사람.
정작 그때 나이아는 자이안이 그런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녀의 심정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이 이상적인 영웅이 되었으면 하는, 그러나 동시에 너무 큰 고통과 실패를 겪지는 않았으면 하는 이율배반적인 심정. 어머니의 당연한 마음.
‘어머니. 저는…….’
자이안은 지금껏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나이아가 떠난 뒤 8년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저택에 고립되어 있던 유년기.
프레이를 만나며 손에 넣게 된 인생을 바꿀 기회.
공화국에서의 실패. 제국에서의, 그전보다는 좀 더 나은 실패.
성국과 보석탑에서의, 그전보다 더 나은 실패.
그리고 세계수의 숲에서. 다시 돌아온 알레프 영지에서.
그 모든 순간 그녀가 말했던 것과 같은 이상적인 영웅이 되고자 노력했다.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고통 받는 모든 이를 구하고자 했다.
단 한 번도 뜻대로 된 적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꺾일 것만 같은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자이안은 이제 이곳에 서 있다.
“나이아.”
자이안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이아는 자신이 펜던트의 중추와 융합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힘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이안의 부름에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눈앞의 나이아는, 비록 기억 속의 나이아와 똑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같았다.
과거의 나이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희생해 이상을 이루려 하고 있다.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건 자신의 희생이니까.
‘그게 최선일까?’
자이안은 자신이 그리는 ‘이상’을 생각했다.
타협하지 않고,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라는 말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은 물론이고, 되도록이면 ‘적’이라 인지하게 된 이들마저도.
그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누구와 싸우고 있으며, 무엇을 쓰러뜨려야 하는가.
‘교만의 목적은 찬탈자에게 속아 억울하게 죽고 만 동족들을 부활시키는 것.’
그 역시 어느 의미 나이아와, 자이안과 닮은 존재였다. 그 때문에 자이안에게 그토록 동질감을 느끼고, 친애를 담아 계속해서 자신과 함께해 주기를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결코 자이안 일행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하려 했다.
때문에 교만은 쓰러뜨려야 할 적이었으며, 그의 계획은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사악한 계획이었다.
정말 그런가? 그게 자신이 그리는 ‘이상’인가?
‘모두를, 정말로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면…….’
확실하지 않은 가정의 이야기를 자이안은 머릿속에 펼쳐 보았다. 만약 자신의 손에 그런 방법이 쥐어져 있다면, 그때 자신의 선택은…….
“자이안? 왜 불러 놓고 말이 없어?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알 때까지 알려 줄 테니까 주저 없이 물어봐.”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이안은 나이아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향했다. 펜던트의 중추. 자이안의 의식이 섞여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거대한 수정 기둥의 모습으로 보였다.
기둥 안쪽에서는 따뜻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자이안은 그 빛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형태조차 불분명한 빛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자이안은 그 빛으로부터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
‘어머니.’
자이안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웨코스에서 교만의 분체와 결전을 벌이기 직전, 기이한 공간 속에서 이뤄진 나이아와의 재회를.
그때 자이안은 그것이 자신의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나이아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 발로 걸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라고.
‘그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나이아의 의지, 혹은 영혼. 그리 표현해야 할 무언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펜던트의 내부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어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의사를 나눌 수 있게 되자, 과거의 추억들을 보여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이안의 등을 밀어주려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자이안은 천천히 눈앞의 나이아에게로 걸어갔다.
‘비록 당신께서 보시기엔 아직 어설프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많은 실패를 겪고, 많은 아픔을 받아들이며 나름대로 성장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요. 그때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듯, 저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니까요.’
수정 기둥 내부의 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자이안은 그 모습이 마치 대견스러워하며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아.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제 와서 갑자기?”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시도는 해 봐야죠.”
자이안이 망설임 없이 나이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겹쳐진 두 사람의 손을 수정 기둥의 표면에 가져다 댔다. 흠칫 놀란 나이아가 뒤늦게 그 행동을 말리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회랑 안쪽으로부터, 그리고 수정 기둥 내부로부터 빛이 폭발했다. 두 빛이 형형색색으로 어우러지며 모든 공간을 가득히 채웠다.
수정 기둥과 맞닿은 손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힘이 흘러들어 왔다.
자이안의 온몸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강렬한 힘으로 충만해졌다. 그리고 자이안의 의식이 아득히 높은 곳으로 한계 없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 * *
철퍽. 물기가 섞인 소리와 동시에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안면에 달라붙은 검은 진흙을 거칠게 떼어 던지면서도 크룩스는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포위당해 발이 묶인다. 그렇게 되면 위험해지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정확히 세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았을 터다. 그런데도 벌써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검은 진흙이 서서히 몸을 침식하며 온갖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흡은 물론이고 귀도 먹먹했다. 주먹을 내지르며 검은 인간을 분쇄할 때마다 손에 닿는 감촉도 마치 두꺼운 막에 감싼 듯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체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몸의 기능이 사소한 것부터 하나둘 고장을 일으키는 것 같은 감각.
‘케이가 없었더라면 10분도 못 채우고 순식간에 쓰러졌겠어.’
자만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을 얕봤음을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결계는…… 아직 무사하군.’
죽음을 각오하고 미끼를 자처한 것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검은 인간 대다수가 크룩스를 추적하는 덕분에 결계 주변은 상대적으로 뻥 뚫려 있었다.
꽈르릉! 강렬한 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꽂혔다. 케이가 발한 영롱한 빛의 번개가 조각난 땅을 뒤덮은 검은 번개를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주변의 검은 진흙이 뻥 뚫린 땅을 뒤덮기 위해 흘러 들어갔으나 그 속도는 현저하게 느렸다. 케이의 번개에 담긴 생명의 힘이 검은 진흙과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크룩스에게 잠깐이나마 휴식을 주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크룩스는 검은 진흙이 증발하고 드러난 땅 위로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를 뒤쫓던 검은 인간들은 더 이상 그 안쪽으로 발을 디디지 못했다.
‘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어 둬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크룩스는 저도 모르게 초조한 시선을 결계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크룩스를 쫓던 검은 인간들이 다시 결계 쪽으로 표적을 바꿀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게 벼랑 끝까지 몰리는 건 확실히 오랜만이네. 아니, 처음인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온 검은 진흙이 마침내 발치를 뒤덮기 시작했다. 크룩스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언제든 전력으로 달릴 수 있도록 온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결계의 중심으로부터 찬란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
그야말로 극적이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전율스러운 광경에 크룩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높이 치솟은 빛이 결계를 뚫고, 핏빛 하늘마저 꿰뚫고 무한히 뻗어 있었다.
그 중심에 자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 * *
자이안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펙트럼을 들어 올렸다.
빛의 기둥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요동치며 사방으로 극광의 띠를 흩뿌렸다. 스펙트럼의 칼날 역시 그와 똑같은 색으로 빛나며 점점 더 크기를 늘렸다.
‘성검. 가장 밝은 빛.’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동안 절절하게 의지했던 후각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스펙트럼을 쥐고 있을 손바닥에도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각도 필시 마찬가지일 터.
지금 자이안은 모든 감각을 닫은 채 오직 스펙트럼과 그 안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힘의 제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는 낮. 모든 생물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간. 삶.’
때문에 성검의 백광은 오직 마물과 마족만을 벤다.
죽음이 깃든 존재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생명으로 채워 넣기 위해서. 마물과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찬탈자라는 강대한 괴물을 쓰러뜨리기 위해, 태양과 생명의 의미를 담아 나이아가 직접 빚어낸 빛이다.
‘마검. 가장 깊은 어둠. 자정. 태양이 가장 깊이 가라앉은 어두운 밤. 모든 생물이 잠드는 정적의 시간. 죽음.’
스펙트럼을 감싼 빛이 두 줄기로 갈라졌다. 이윽고 한쪽이 뿌리부터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검은 자이안이 직접 만들어 낸, 성검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빛이다.
때문에 그 흑광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자이안이 베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베며, 베어 낸 모든 것에게 죽음을 고한다.
‘두 시간의 사이에 있는 것. 자정을 지나, 정오가 되기 전에 찾아오는 시간.’
자이안이 남은 손을 마저 들어 올려 스펙트럼의 자루를 붙잡았다. 그러자 두 갈래로 무한정 뻗어 나가던 백색과 흑색의 빛이 하나로 뒤섞이며 기이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새벽.’
그것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 짙은 어둠 속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하는 여명의 빛이었다.
자이안이 눈을 떴다.
까맣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조금씩 색채와 형상을 되찾았다.
깊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동료들의, 친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고마워, 자이안. 마지막 순간에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 하지만…… 난 괜찮아. 이게 바로 내 목적이고, 내가 태어난 이유 그 자체니까.
스펙트럼을 통해 어렴풋이 전해지는 나이아의 목소리.
자이안은 체념을 닮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것. 삶도 아니며, 죽음도 아닌 것. 그 어느 것도 아니며, 어느 것이기도 한, 그 모든 것을 한데 품은 씨앗.’
자이안이 빛을 내리그었다.
‘모든 가능성의 시간. 새벽.’
죽음의 땅에 새벽의 빛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