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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3) (204/210)


204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3)
2023.04.25.


따뜻한 물 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자연스럽게 이완되고, 줄곧 마음을 괴롭혔던 긴장과 강박감이 양지에 내린 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느낌.

잠에 취한 듯 몽롱한 의식 속에서 자이안은 이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희미한 잡음이 끼어들었다. 노이즈 섞인 전파음을 연상케 하는 불쾌한 소리. 그리고 그 안에 섞인…… 아마도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

날 내버려 둬.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완전히 이완된 입술은 조금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자이안, 자이안?

이제는 또렷해진 목소리가 명백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대신, 불쾌한 잡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자이안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아직 이렇게 느긋하게 쉬어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는 것을.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

온몸에 힘이 돌아온다. 손가락 끝이 움찔, 그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자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무언가가 만져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 아마도 사람의 온기.

“잠은 푹 잤어? 자이안.”

익숙한 목소리에 자이안은 눈을 떴다.

그리운 얼굴이 가까운 곳에 보였다. 자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아의 얼굴이었다. 20대 중후반, 젊은 시기의 나이아가 아니라, 자이안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던 바로 그 모습.

“……어머니?”

인상을 쓴 자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얼이 빠진 채로 잠시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아하하.”

쾌활한 웃음소리. 나이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이안은 위화감에 다시 한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달랐다. 겉모습은 추억 속에 남은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몸짓이나 말투를 비롯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내면은 다른 사람 같았다.

“아.”

자이안이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나이아?”

“오.”

‘나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눈썰미가 좋은데? 금방 깨달았네.”

“제가 당신을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나이아와, 짧은 시간이나마 전우로서 함께 한 ‘젊은 나이아’를 동시에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말문이 막혀 눈을 동그랗게 뜬 나이아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죠?”

자이안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검은 진흙이 엄습하는 마계 한복판이 아니라 회색빛의 거대한 회랑 한가운데였다.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예? 이건 나이아가 시작한 일이잖아요.”

“그렇지. 원래는 내 의식을 펜던트의 심층으로 가라앉혀 거기서 펜던트의 중추와 융합될 생각이었는데…….”

나이아의 시선이 자이안에게 향했다. 자이안의 의식이 그녀와 깊이 동조되었고, 그 결과 그의 의식도 그녀와 함께 펜던트의 심층 영역으로 가라앉았다.

회랑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심층 영역이 자이안의 의식에 영향을 받아 그려낸 허상 같은 것이었다.

“이름이 없으면 불편하니까…… 그래. 임시로 ‘기억의 회랑’이라고 부르자.”

“기억의 회랑? 왜 하필…….”

“저거 네 기억 아냐?”

나이아가 회랑을 둘러싼 기둥 너머의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리로 시선을 향한 자이안은 눈을 부릅떴다.

회랑 안쪽, 여러 색깔의 빛무리가 뭉쳐 일렁이는 기이한 공간 일면에 마치 낡은 영사기로 쏘아낸 듯한 빛바랜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저택 안뜰, 티 테이블, 울고 있는 어린아이, 그를 가슴에 보듬어 안은 여인.

자이안의 입술 새로 억누르지 못한 신음성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 * *

“자이안!”

유리아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자이안의 몸을 다급히 붙잡은 사이,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이아의 몸은 빛으로 화해 녹아들듯 펜던트 안으로 사라졌다.

크룩스의 시선이 프레이에게 향했다. 잡학 다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론은 그의 특기였으나, MP에 관련된 신비한 현상은 프레이의 영역이었다.

“문제가 생긴 건 아냐.”

두 눈을 황금색으로 물들인 프레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눈에 자이안의 미간과 펜던트를 잇고 있는 MP의 선이 보였다. 잔잔한 강물처럼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다. 조만간 멀쩡히 깨어날 거야.”

이어 프레이의 시선이 펜던트로 향했다.

“나이아가 일을 그르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프레이는 나이아가 실패할 거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이안이 아니라…….”

프레이는 자이안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이아가 펜던트 속으로 사라졌다. 즉, 일행을 지키던 순수 MP의 장막 역시 사라졌다.

철퍽, 검은 인간이 프레이가 만들어낸 결계에 부딪혔다. 결계 일부분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순수 MP의 보호를 받던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시간 싸움이 되겠군.”

남은 일행들도 문제를 깨달았다. 자이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대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공격을 막기만 해서는 끝이 없어요.”

크룩스가 프레이의 곁에 나섰다. 그의 온몸은 아직도 얼굴을 제외하고 모두 검은 슈트로 뒤덮여 있었다.

“섣부른 짓 하지 마라.”

“누군가는 나가서 놈들의 수를 줄이고,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너 그런 짓 하는 성격 아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적을 도발하고, 유인하고, 그렇게 해서 아군을 지키는 게 제 일이잖아요.”

검은 슈트가 크룩스의 얼굴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붉은 안광이 일렁거리며 피어나고, 그의 호흡이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서서히 거칠어졌다.

“슈트로 보호받는 동안은 검은 진흙에 쉽게 침식되지 않을 겁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버틸 겁니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나도 도와줄게.”

이번에는 케이가 나섰다.

“마나에 쉽게 침식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라 별의 화신이니까. 그 대신…….”

케이가 상의를 조금 걷어 올리고 상반신을 절반가량 뒤덮은 문신을 가리켰다.

“이것 좀 지워줘. 이게 있는 상태로는 불가능해.”

“그랬다간 자이안이 슬퍼할 거야.”

자이안과 함께 케이에게 문신형 아티팩트를 새겼던 아르스가 조용히 반론했다. 케이는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건 너희 중 누군가가 힘이 다해 죽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

이번에는 반론하지 못했다.

“별의 힘을 빌리면 침식으로부터 완전히 몸을 지킬 수 있어. 만약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나야.”

케이가 아르스에게 다가갔다. 입술을 깨문 아르스가 고개를 떨어뜨린 순간, 백팩이 전개되며 기계 팔들이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을 지우기 시작했다. 고작 수 분 만에, 자이안이 케이를 위해 만든 최저한의 보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난 준비 끝났어.”

케이의 시선이 프레이와 크룩스에게로 향했다. 프레이는 머뭇거렸으나, 크룩스는 아니었다. 크룩스는 케이에게 다가가 그를 등에 업은 뒤 프레이와 유민을 돌아보았다.

“제가 신호를 하면 아주 잠깐 결계의 위쪽을 열어주세요. 저희 둘이 나가면 바로 닫아 주시고요.”

“저도……!”

유리아가 뒤늦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 전에, 소아레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유리아 님은 자이안 님의 곁에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 그게 낫겠군.”

잠시 생각한 프레이가 소아레스의 말에 동조했다.

“유리아, 네 일은 그 녀석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얼굴을 보여주고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웃어주는 거다. 설령 우리 중 누군가가 잘못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

어찌 보면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리아에게 제격인 일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자이안의 동료가 되었고,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함께 하며 많은 교감을 나눈 유리아만이 할 수 있는 일.

“형. 유민 씨.”

크룩스의 부름에 프레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민은 금방이라도 슬픔이 흘러넘칠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끝내 단 한 번도 고개를 젓거나 약한 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셋. 둘. 하나.”

결계의 윗부분이 둥그렇게 열렸다. 기도를 틀어막는 것 같은 탁하고 무거운 공기가 결계 내부로 훅 들어오고, 동시에 케이를 업은 크룩스가 바깥으로 뛰어올랐다.

“바로 닫아요! 공기조차 치명적이에요!”

크룩스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케이를 위로 던졌다. 높이 떠오른 케이가 천룡으로 변하며 밝은 빛을 내뿜었다.

빛이 온몸을 쬐는 순간 크룩스는 호흡이 한결 편해졌음을 느꼈다. 케이가 뿜어내는 별의 힘, 생명의 힘이 검은 진흙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30분이 한계야.

크룩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진흙 위에 착지했다. 진흙이 사방으로 높이 치솟으며 탁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시야를 가리는 진흙 사이로 검은 인간의 무리가 보였다.

크룩스는 진흙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두 발을 강하게 앞으로 굴렀다.

빨아들이는 것만 같은 강한 흡입력을 떨쳐내며 진흙 위를 달리는 그의 발걸음을 중심으로 MP의 파동이 쉴 새 없이 퍼져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텅 빈 눈구멍들이 크룩스를 향했다.

크룩스는 안도했다. 도발이 통하는 상대다. 그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잠시, 크룩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로 보이는 구형 결계는 마치 풍랑 속에 고립된 작은 섬처럼 보였다.

크룩스가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검은 인간들 사이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 * *

나이아는 끝없이 이어진 회랑 내부를 마치 자기 집 안뜰을 거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자이안은 그 뒤를 쫓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번번이 걸음을 멈췄다. 나이아는 그럴 때마다 재촉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로 그를 기다려 주었다.

‘이건…… 5살 때구나.’

이제 빛바래버린 행복했던 시간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여럿 있었다. 회랑 너머의 빛무리 속에서 떠오르는 광경은 모두 그 추억들이었다.

‘처음으로 실패의 의미, 그 단어가 가지는 무거움을 깨닫고,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야.’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간간이 찌그러지고 흐릿해지는 빛바랜 광경. 그러나 자이안은 그때의 대회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소중하고 둘도 없는 기억들이었다. 이 기억들이, 어머니와 나눈 대화들이 하나하나 쌓이고 단단히 굳으며 자이안 알코스라는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잠깐. 뭔가…… 이상해.’

그런 식으로 몇 개의 추억을 지켜보았을 즈음. 자이안은 한 가지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느끼지 못한, 그러나 한 번 알아차리고 나니 왜 이제껏 몰랐나 싶을 만큼 명확한 위화감이었다.

빛무리 사이로 보이는 추억 속. 나이아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어린 자이안이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깊은 눈빛으로 방을 나선다.

귀족다운 호사스러움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간소한 방 안에 나이아가 홀로 남아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자이안이 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자이안은 저 순간 나이아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지 못했다, 당연하다. 저 때 자이안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이건…… 이건 내 추억이 아니야.’

자이안은 정수리로부터 떨어진 벼락이 몸 전체를 꿰뚫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어머니의 추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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