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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2) (203/210)


203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2)
2023.04.24.


“MP라는 에너지가 정확히 뭐고,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행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과거 시기나 나태를 비롯한 선주 인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찬탈자에게서 비롯된 힘이죠.”

크룩스가 나서서 대답했다. 나이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면 찬탈자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예? 그건…… 흐음.”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러나 직접 찬탈자와 싸웠으며 한 번 패배한 나이아의 생각은 달랐다.

“찬탈자는 죽지 않는 존재야. 정확히는 ‘생물학적인 기준의 죽음’이 없는 존재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죽일 방법이 아무것도 없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어. 생각해봐. 거대한 바위도 오랜 시간에 걸쳐 풍화되어 조그마한 자갈이 되고, 하다못해 우주를 수놓은 항성들조차 천문학적인 시간에 걸쳐 서서히 빛을 잃고 죽어가는 법이잖아.”

그것은 천체보다도 훨씬 더 거시적인, 차원과 우주를 아우르는 절대적인 개념이기도 했다. 모든 존재에는 시작이 있으며, 시작이 있는 존재에게는 반드시 끝이 있다.

찬탈자를 죽일 수 있는 올바른 방법. 나이아는 바로 그 방법을 알고자 했다.

펜던트를 통해 미지의 차원으로 도망치기 전, 나이아는 여러 번 찬탈자와 교전을 거듭하며 그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해하고자 했다.

당연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찬탈자가 가진 MP, 혹은 마나라 불리는 미지의 에너지. 그 에너지가 바로 열쇠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거기까지 알게 된 나이아 알코스는 한 가지 도박을 하기로 했어. 바로 나를 탄생시키는 거였지.”

어느 순간부터 나이아는 과거의 ‘나이아 알코스’와 스스로를 구분해서 칭하고 있었다. 그녀의 얘기에 집중하면서도 프레이, 그리고 자이안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런 도박을 한 거죠?”

“MP라는 에너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서. 사실 나이아 알코스는 자신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를 찬탈자에게 먹이로 줄 생각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지. 말 그대로 이건 도박이었으니까. 재기의 여지를 남기는 대신 도박이 성공할 확률을 낮추느냐. 확률을 높이는 대신 아예 뒤를 없애버리느냐. 결국 나이아 알코스가 택한 건 전자였고.”

도박은 성공했다. 그녀의 예상보다도 더. 나이아 알코스의 일부를 제물로 바쳐 찬탈자로부터 빚어진 그 존재는 강인한 의사로 자의식을 유지한 채, MP라는 에너지의 본질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나이아의 몸에서 찬란한 극광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자유자재로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순수한 상태에 가까운 MP.

“순수 MP라…….”

프레이는 턱을 매만지며 그 말을 따라 했다. 마안으로 살펴보니, 과연 그랬다. 사방을 뒤덮은 검은 진흙과 유사한 형태의 에너지였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찬탈자가 다루는 검은 진흙과 동일한 힘이라 봐도 무방했다.

“차원과 차원 사이에는 무한 우주, 혹은 허수 우주라고도 부르는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고 MP는 바로 그 공간에서 비롯된 에너지인데…… 뭐,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지. 찬탈자가 어쩌다 그런 힘을 손에 넣게 됐는지도 알 필요 없는 일이고. 중요한 건, MP는 순수에 가까운 상태일수록 영혼을 가진 존재의 강한 의지에 반응한다는 거야. 생각 없이 그대로 쓰면 순식간에 생명을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우는 극독이지만,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찬탈자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

“그렇다면 왜…… 그냥 네가 직접 찬탈자를 죽이면 그만 아니냐.”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오빠? ‘영혼을 가진 존재’의 의지에 반응한다니까.”

프레이는 신음을 뱉으며 침묵했다. 그 말은 마치, 눈앞의 나이아는 영혼을 가지지 않은 존재라는 뜻으로 들리지 않는가.

“원래 계획은 이랬어. 내가 여기에서 MP를 다루는 데 익숙해지는 사이, 나이아 알코스는 미지의 차원에 도착해 힘을 회복해. 그다음 펜던트로 지구와 교신해서, 이번에는 모두 다 같이 마계로 우르르 몰려가서 이번에야말로 찬탈자를 때려잡는 거지. 바로 나를 무기로 삼아서.”

“대체 너를 뭐 어떤 식으로 무기로 쓴다는 거냐?”

“이렇게.”

나이아가 프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팔뚝이 환한 극광으로 뒤덮이더니, 이내 실타래가 풀리듯 풀어지며 프레이에게 날아갔다.

빛의 띠가 자신의 주위를 감싸며 휘도는 광경에 프레이는 인상을 썼다.

“너, 그 몸은…….”

“이렇게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고는 있지만, 나는 엄밀히 말하면 그냥 MP 덩어리에 불과해. 그나저나…….”

풀어 헤쳐진 빛의 띠가 프레이의 온몸에 접촉했다가 떨어져 나갔다. 나이아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오빠는 안 되겠네. 나를 다루기엔 너무 허약하다니까. 탈락.”

빛의 띠가 남은 일행들을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나이아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자이안이 남았다. 나이아가 돌아보니, 자이안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나이아의 표정도 덩달아 진중해졌다. 빛의 띠가 그의 몸을 세심하게 뒤덮었다가 멀어졌다.

“응. 너도 안 돼. 탈락.”

나이아가 회심의 장난을 성공시킨 악동처럼 히죽 웃었다.

“네? 저, 저도 안 된다고요?”

“응. 안 돼. 그런 눈으로 봐도 허락 안 해줄 거야.”

“야 인마, 그러면 아무도 안 된다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누가 나를 다뤄도 찬탈자를 죽일 수는 있을 거야. 대신 그 뒤에는 순수 MP의 독성을 이기지 못해서 무조건 죽고 말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들 나만큼 MP를 다루는 게 익숙하지는 않으니까. 자이안이라면,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아. 난 승산도 낮은 도박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칩으로 걸고 싶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나이아의 시선이 자이안이 쥔 스펙트럼으로 향했다.

“그 녀석한테 맡겨볼까 해.”

“……스펙트럼?”

자이안의 반문에 나이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 아까 보여준 그 공격, 제법 인상적이었어.”

성검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이아가 아닌 과거의 나이아가 간접적으로나마 순수 상태의 MP를 다루기 위해 실험적으로 고안한 기술. 그러나 나이아는 제때 그 기술을 완성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자이안의 차원에 불시착한 뒤 대부분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본래대로라면 미완성인 채로 방치되고 말았어야 할 기술을, 자이안이 극적으로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생전의 나이아가 봤더라면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고 나이아는 장난스럽게 생각했다.

“내 모든 힘을, 그러니까 나 자신을 전부 스펙트럼에 담을 거야. 자이안 너는 그 힘을 이용해서 아까 그 기술을 비슷하게 사용하면 돼. 너는 이 중에서 MP 이해도가 가장 높으니까, 어떤 식으로 힘을 다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해서 일이 성공하면…… 그 뒤에 너는 어떻게 되는 거냐?”

프레이의 물음은 기습적이었다. 그런 질문을 듣게 될 것임을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아는 제때 대답하는 데에 실패했다.

“너, 설마…….”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담담한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프레이는 질문의 대답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꼴통 새끼가! 남의 목숨으로 도박하는 건 싫다는 새끼가 자기 목숨을 칩으로 걸어대?!”

“아까 말했잖아. 여기 있는 나는 엄밀히 말하면 나이아 알코스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그런 거지 같은 개소리가 어디 있어! 옛날 모습 그대로, 이렇게 나랑 말하고 있잖아!”

“오빠. 자꾸 고집부리지 마. 안 되는 거 알면서.”

나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일행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표정이 아니라, 신념으로 가득 찬 무거운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나한테서 졸업해. 나 없으면 못사는 약한 사람도 아니잖아, 오빠.”

“그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니까 할 수 있는 거야. 오직 나만이 오빠에게 할 수 있는 말이지.”

나이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이에게 다가갔다. 프레이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를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자이안에게는 그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오빠. 고생 많이 했잖아. 나랑 같이 있을 때에도, 내가 죽은 뒤에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

“너어……!”

나이아가 프레이를 부드럽게 안았다. 아까 전 둘이 만났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판이하게 달랐다. 재회의 포옹이 아니라, 이별의 포옹이었다.

“그만 매달리고 푹 쉬어, 오빠.”

말없이 주먹을 치켜든 프레이가 나이아의 등을 쾅, 세게 때렸다. 아야야, 하고 나이아는 쓰게 웃었다.

“아하하하. 얼마나 쌓인 감정이 많았으면 이렇게 아프게 때리실까?”

“쌓인 감정, 아직 한참 남았다. 이 자식아.”

“괜찮아. 얼마든지 더 때려도 돼.”

“필요 없어, 이 자식아. 필요 없다고. 졸업…… 하라면서.”

프레이가 먼저 나이아에게서 떨어졌다. 눈물이 한 방울, 주변을 둘러싼 극광을 반사하며 밝게 빛났다.

“이제 나이아 오빠 프레이 알코스는 졸업하고, 그냥 프레이 알코스로 편하게 살아. 알았지?”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나이아가 손을 뻗어 프레이의 눈물을 닦았다. 프레이는 그 손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스스로에게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래, 노력해보마.”

“그거면 충분해. 오빠, 지금까지 노력해서 못한 일 하나도 없었잖아?”

“널 못 이겼지.”

“아하하. 지금도 못 이기겠지?”

“망할 자식.”

프레이가 나이아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꽁 두드렸다. 나이아는 이마를 문지르며 크룩스와 유민, 아르스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나 이제 두 번 다시 못 보는데, 다들 그동안 불만 쌓인 거 있으면 지금 말해봐.”

“진짜? 그럼 네가 생전에 멋대로 부숴 먹은 아티팩트 시제품 전부 배상해줘.”

“아르스 언니, 그건 자이안한테 달아둬.”

“언니,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내가 나 희생하는 거 한두 번 보니? 새삼스럽게.”

“전 딱히 할 말 없네요. 누나를 이렇게 다시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만족해서.”

“그래. 크룩스 넌 항상 그렇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지. 네 덕분에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어.”

“아,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보고는 싶은데.”

“아하하. 얼마든지.”

나이아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프레이를 제외한 세 각성자가 그녀를 둘러싸고 강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자이안, 너는 따로 할 말 없어?”

다시 자이안에게 돌아온 나이아가 물었다. 얼핏 담담한 표정이지만 눈시울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지금이 마지막이야. 얼마든지 들어줄게.”

“전 괜찮아요.”

자이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의외의 대답에 나이아는 눈을 조금 치켜떴다.

“정말 강하구나.”

“주변에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거든요.”

“아하하. 부럽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부러움인지는 밝히지 않고, 나이아가 두 손으로 스펙트럼을 붙잡았다.

“그럼…… 시작하자.”

자이안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아는 지그시 눈을 감고 내재된 힘을 끌어올렸다. 자이안도 그에 동조하듯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찬란한 빛이 자이안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자이안의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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