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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1) (202/210)


202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1)
2023.04.23.


검은 진흙이 풍랑이 몰아치는 해수면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곳곳에서 진흙이 해일처럼 거세게 솟구치더니, 일행들을 덮칠 듯 몰려들었다.

유민이 일행들 중 두 번째로 정신을 차렸다.

이를 악문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결계를 펼쳤다. 프레이 역시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위에 결계를 덧대었다.

“염병하네. 하여간 쉽게 끝나는 법이 없어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프레이의 이마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진흙의 해일이 몰려오며 결계에 부딪힐 때마다 느껴지는 압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나이아.”

“왜, 오빠?”

“뭐 알고 있는 거 없냐? 네 성격에 이런 걸 예상하고 미리 대책을 준비했을 것 같은데.”

“잠깐만…… 생각 좀 하고.”

“너무 오래는 못 기다린다.”

겹겹이 펼친 결계의 바깥 부분이 조금씩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단순히 힘을 못 이겨 부서지는 게 아니다.

결계 자체가 검은 진흙에 침식되어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무언가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아르스의 아티팩트가 있어서 다행이군.’

검은 진흙으로부터 침식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아티팩트가 없었더라면 순식간에 결계가 모두 침식되고 자신들 역시 진흙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좋은 일은 안 일어났겠지.

“도와드릴게요.”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자이안이 나섰다. 그러나 유민과 프레이는 동시에 고개를 저어 그를 말렸다.

“엄한 짓 말고 더 쉬어. 아직 멀쩡해진 것도 아니잖냐.”

“그래, 자이안. 우리가 버티고 있을 테니까 그사이에 스펙트럼을 정비하는 건 어때?”

스펙트럼이 성검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 횟수는 최대 2번. 여기서 ‘견딜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부서지지는 않는다’라는 말과 바꿔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한 전투에서 중간 정비도 없이 성검을 연달아 2번이나 사용한 지금, 스펙트럼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칼날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는가 하면, 안쪽에서는 무언가가 끊어지고 터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변형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 듯 불규칙적으로 형태가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리 와, 자이안. 누나가 같이 봐줄게.”

아르스가 백팩을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아 자이안을 불렀다.

나이아, 그리고 자이안의 손에 여러 번 개조를 거친 지금 스펙트럼은 처음 아르스가 만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가진 해박한 지식으로 정비를 보조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자이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아르스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스펙트럼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자, 백팩이 복잡하게 전개되며 각종 공구들이 부착된 기계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이안 님, 망토를 수선해 드리겠습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다가왔다. 고도의 아티팩트이기도 한 망토 역시 거친 싸움 속에서 곳곳이 헤져 있었다.

스펙트럼과 마찬가지로 정비와 수선이 필요한 상황. 자이안은 자신이 온전히 스펙트럼의 정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두 사람의 의도를 짐작하고 조용히 망토를 벗어 건네주었다.

“스펙트럼…… 그래, 스펙트럼. 스펙트럼과 펜던트.”

정비를 시작한 자이안에게 이번에는 나이아가 다가왔다. 아르스가 흘깃 고개를 들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얘 지금 집중하고 있으니까, 방해하면 안 돼애.”

“나도 도와줄게. 필요한 일이야.”

그 말에 자이안도 잠시 집중을 끊고 나이아를 바라보았다. 아티팩트의 정비를 돕겠다는 것뿐인데도, 나이아는 마치 죽을 자리에 발을 디딘 무사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자이안은 흠칫 놀랐으나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일이란 말씀이시군요.”

“맞아.”

자이안이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이아가 그의 곁에 주저앉아 빠르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응? 이 회로는…… 내가 기억하는 거랑 좀 구조가 다른데. 아, 자이안 네가 개조한 거구나.”

“맞아요. ……혹시 뭔가 잘못됐나요?”

“그런 건 아냐. 뭐, 좀 투박하긴 한데…… 괜찮네.”

“얘는, 누가 누구보고 투박하다는 거야? 이론도 배우다 말고 주먹구구식으로 때려 맞추는 주제에.”

“언니도 참. 나도 내가 돌팔이인 건 아는데 그래도 자이안보단 낫잖아?”

“아티팩트 공학 1인자인 내 눈에는 둘 다 거기서 거기거드은?”

가벼운 분위기의 담소와는 다르게 스펙트럼의 정비는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나이아의 손이 스칠 때마다 과부하로 망가지기 직전인 회로가 수복되고, 뒤틀린 구조가 바로잡혔다. 말은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나이아가 정비를 주도하는 모양새였다.

“잠깐만. 나이아, 방금 회로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별거 아냐. 그냥 간단한 개조.”

“간단한 개조?! 안 그래도 죽어가기 직전인 골골대는 애한테? 너 지금 미쳤니?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 마. 적어도 스펙트럼과 펜던트에 대해서는 언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자이안보다 잘 아느냐…… 고 하면 좀 미묘하긴 한데.”

자이안은 그 작업을 뒤처지지 않도록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때문에 나이아의 말을 듣고 그 뜻을 파악하는 것도 한 박자 늦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나이아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방금 전 내가 건드린 부분. 괜찮을 것 같아?”

그 물음에 자이안은 재차 스펙트럼의 회로를 점검해 보았다. 분명 기존에 없던 회로가 부분부분 섞여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문제를 일으킬 것 같으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거 봐, 언니. 내 말 맞지?”

“내가 말을 말자…….”

아르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아는 자이안을 보고는 어깨를 움츠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셋은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염병. 저건 또 뭐야.”

스펙트럼의 정비가 중반부를 넘어섰을 무렵, 해일처럼 몰려들던 검은 진흙이 변화를 보였다.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거칠게 넘실거리던 표면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그 대신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사람……?”

유민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쑥 튀어나온 그것은 진흙으로 뒤덮인 사람의 손이었다. 아까 전 싸운 교만처럼 터무니없는 크기도 아니었다.

진흙 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크기의 평범한 손이었다.

마치 살려달라는 듯 허우적거리는 손 옆으로 반대쪽 손이 또다시 솟아났다.

이어 머리와 상반신, 하반신이 순차적으로 진흙을 뚫고 솟아났다. 결계를 유지하느라 전신을 적신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유민은 그 모습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사람을 닮은 그 존재는 전신에 검은 진흙을 뚝뚝 흘리며, 뻥 뚫린 눈구멍에서도 진흙을 눈물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코와 입, 귀 같은 다른 기관은 없었다. 아까 전 싸운 교만을 그대로 평범한 크기로 축소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X…….”

프레이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

사방을 뒤덮은 진흙이 일시에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교만을 축소해 놓은 듯한 기이한 존재가 진흙 속에서 헤아릴 수도 없이 솟구쳤다.

진흙 위에 멍하니 서 있던 그들의 뻥 뚫린 눈구멍이 일시에 자이안 일행에게로 모였다.

“최유민! 결계 더 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라고!”

“안 그래도 그러고 있다고요!”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검은 진흙의 인간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유민이 온 힘을 끌어 모아 보강한 결계 위로 철퍽, 소리와 함께 무방비하게 부딪쳤다.

인간처럼 생긴 형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결계를 뒤덮었다. 그러자 결계가 빠른 속도로 검게 침식되기 시작했다.

“이건…… 이런 젠장! 최유민! 질보다 양이다!”

프레이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겹겹이 결계를 전개했다. 그의 말대로 강도는 떨어지지만 그 대신 양을 중시한 결계였다. 유민도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듣고 전술을 바꿨다.

남아있는 검은 인간들이 진흙 위를 내달리며 몰려들었다. 진흙으로 뒤덮인 결계가 빠르게 침식되고, 다시 그 위로 겹겹이 결계가 펼쳐지며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프레이와 유민의 전신이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저씨! 수, 수가 너무 많아요!”

“나도 안다! 일단 버텨! 무한정 쏟아지지는 않을 거 아니냐고!”

그 순간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찬란한 빛이 일행들의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와 결계로 스며들었다.

빛에 휩싸인 결계는 검은 진흙에 침식되기는커녕 거세게 진흙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프레이와 유민은 간신히 숨을 돌리며 빛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다들, 각자 할 일 하면서 내 얘기 좀 들어줘.”

빛의 중심에서 나이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뭔데. 우리 바쁘다. 시답잖은 소리는 들어줄 여유 없어.”

당장은 안전해졌지만 이 안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랐다. 끊임없이 부딪쳐 오는 검은 인간의 숫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마어마하게 수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문제없을 거야. 얘기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고.”

“대책을 찾은 거냐?”

“찾았다…… 라고 하면 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뭐? 그럼 왜 이제까지 닥치고 있었던 거냐?”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나이아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게 하나 있어.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일부러 말을 두루뭉술하게 했다고 해야 하나.”

그 사이 스펙트럼의 정비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나이아는 새것처럼 멀쩡해진 스펙트럼을 자이안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게…… 사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냐.”

“뭐?”

프레이가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그건 네가 아까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넌 나이아가 자신의 일부를 찬탈자에게 일부러 먹여서 태어난, 일종의 분신 같은 존재라고.”

“태어난 방식이 어찌 됐든, 영혼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며 사고하는 존재라면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넌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냐? 그럼 지금 우리랑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넌 뭔데?”

“무기.”

담담하게, 나이아는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했다.

“나이아 알코스가, 찬탈자와 싸우며 그 힘을 직접 목도하고 자기 혼자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모든 역량을 담아 벼려낸 불완전한 무기.”

별것 아닌 얘기라도 하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나이아는 담담하게 웃었다.

“나이아 알코스가 바로 이때를 위해 준비한 안배. 그게 바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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