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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0) (201/210)


201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10)
2023.04.22.


교만은 무덤덤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보다 한참이나 낮은 곳에서 개미보다도 더 조그만 존재들이 뭐라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교만은 날파리처럼 귀찮게 주변을 날아다니는 그들을 벌레라도 쫓듯 손을 휘저으며 떨쳐내려 했으나, 작은 존재들은 집요하게 교만을 괴롭혔다.

그 광경은 마치 스크린 너머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거칠게 손을 휘두르는 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교만은 자신의 의식이 그 모든 광경을 높은 곳에서 부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교만은 인상을 썼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언가 중요한 할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해야만 하며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그러나 정작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교만은 이마를 짚으려 했으나, 검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다.

‘너희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다. 나는, 나는…….’

답이 보이지 않는 불안과 초조가 교만의 의식을 채찍질했다.

마음이 다급해지며 짜증이 치솟았다. 그럴수록 눈앞에서 얼쩡거리며 자신을 귀찮게 구는 작은 존재들에 대한 증오가 솟아올랐다.

교만이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나는…….’

그의 몸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생명을 가진 모든 증오스런 존재들을 죽이고, 파괴하며, 먹어 치운다.’

혹은, 교만의 의지가 그의 내면에 죽은 것처럼 숨어있던 무언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생명을 먹고, 모든 땅과 하늘을 먹고, 모든 차원을 먹고…….’

속으로 중얼거릴수록 감정이 침착해졌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떠오르며, 몸과 영혼이 합치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의 의지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사악한 무언가가 천천히 하나로 뒤섞였다.

‘모든 증오스러운 것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그리고 고향을 되찾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라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교만은 그가 흡수한 찬탈자의 정신을 완벽하게 제압한 상태였다.

완전히 녹아 없어지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테지만, 찌꺼기뿐인 찬탈자의 정신에 반대로 지배당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없어야 했다.

어찌 보면, 운이 나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만이 찬탈자를 흡수하고 그 힘을 자기 것으로 삼았듯, 찬탈자 역시 찌꺼기뿐인 정신이나마 남아 그의 내면에서 그와 힘 싸움을 하며 새로운 것을 손에 넣었다. 자의식.

지극히 원시적인 본능뿐이었던 찬탈자에게 명확한 의식이 싹튼 것이다.

생각을 할 줄 알게 되었고, 기회를 노리며 상대를 기만할 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만은 자이안 일행과 두 차례 부딪치면서 두 번의 죽음을 겪었다.

첫 죽음은 강인한 의지로 극복할 수 있었으나, 두 번째 죽음에서 빈틈이 생기고 말았다. 찬탈자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빈틈을 파고든 찬탈자의 기습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둘의 정신은 진흙탕처럼 어지럽게 뒤섞였다.

‘나는, 나는…….’

그 결과 교만이라고도, 찬탈자라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존재가 탄생했다.

‘나는, 뭐지.’

* * *

“하!”

짧은 기합을 내지른 순간 프레이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빛을 흩뿌리며 펼쳐졌다.

불씨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다가 교만의 거대한 몸에 맞닿은 순간 격렬하게 폭발했다. 불씨는 그 뒤로도 사라지지 않고 마치 점액질처럼 교만의 표면에 달라붙어 끈질기게 불탔다.

“한 방 더!”

프레이의 등 뒤에 또다시 마법진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크게 작았다. 대신 층층이 겹쳐진 복층 구조였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오직 프레이만이 그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고 구현할 수 있는 복잡한 마법진으로부터 번개로 이루어진 손잡이가 비죽 솟아났다.

프레이가 손잡이를 붙잡아 거칠게 뽑자, 불과 번개로 벼려진 거대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찢어질 듯한 부하를 견디며 프레이가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칼날이 교만의 몸에 닿은 순간 엄청난 빛과 굉음이 폭발했다.

이어 칼날이 검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몸을 갈랐다. 놈의 왼팔과 머리를 포함한 상반신 일부가 비스듬히 미끄러져 그대로 공동 안쪽으로 추락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커다란 피해였다.

“이건…… 보너스다!”

마법진이 이번에는 대각선으로 잘린 교만의 절단면 바로 위에 나타났다.

사방으로 번개를 흩뿌리며 백열하던 마법진이, 프레이가 두 손을 맞부딪힌 순간 어마어마한 굵기의 번개를 쏟아냈다. 놈의 절단면이 부글부글 끓으며 검은 연기를 피워올렸다.

“세상에. 오빠 정말 강해졌구나.”

프레이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파괴의 향연을 보고, 극광으로 몸을 감싼 채 포탄처럼 공중을 날아 그대로 교만의 가슴을 뚫고 반대쪽으로 나온 나이아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성기의 프레이보다도 한층 더 강력한 마법이었다.

‘하긴, 내가 죽고 20년 가까이 지났다니까.’

예전과 변함이 없거나 그보다 못했으면 오히려 더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을 감안해도 나이아의 상상 이상으로 프레이가 강력해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지금 컨디션의 오빠하고 맞붙으면…… 나도 장담 못 하겠는걸. 노력 많이 했구나, 오빠.’

“네?! 나이아, 방금 뭐라고 했었나요?”

자이안의 목소리에 나이아는 퍼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방금 전 중얼거린 감탄의 목소리를 스쳐 지나가며 얼핏 들은 모양이었다.

나이아는 전신을 충만하게 흐르는 에너지를 가다듬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이대로 계속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는 건 물론 프레이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행들이 쉬엄쉬엄 하고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크룩스는 숫제 정신지배에 가까운 강렬한 도발로 적의 주의를 끌며 모든 공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놈의 거대한 몸 표면을 거침없이 내달리며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시기적절하게 공격을 방해하고 있고. 그들 덕분에 나이아와 프레이, 케이, 자이안은 반격을 받을 걱정 없이 마음껏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일행들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집중할수록 보조하는 건 아르스와 유민의 몫이다.

모두가 피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는 건 유민의 백마법 덕분. 아르스는 계속해서 찢어지는 불안정한 지면을 단단하게 고정하며, 동시에 넓은 범위에 효과를 발휘하는 아티팩트를 통해 모두가 교만의 몸을 이룬 검은 진흙에 직접 닿아도 무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있다.

쉽지 않은 전투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승산 역시 확실히 보였다. 적어도 나이아는 지구에서도 손꼽히는 다섯 명의 각성자가 모두 모인 지금 실패나 사고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예! 분명 그럴 겁니다!”

희망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자이안이 아르스가 공중에 만들어낸 발판을 디디고 다시 교만을 향해 뛰어올랐다. 나이아는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비록 함께 지낸 건 수 시간에 불과하지만, 몸도 마음도 모두 강한 사람임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미래의 나, 제법 뿌듯했겠네. 저런 아이가 아들이었으니.’

자화자찬이나 다름없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이아 역시 다시 교만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대로라면 그걸 쓸 필요까지는 없겠지. 기껏 준비한 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건 아깝지만, 애초에 안 쓰는 게 좋은 거니까.’

과거의, 혹은 미래의 자신이 남긴 또 다른 안배를 떠올리며 나이아는 교만을 향해 날아올랐다. 사선으로 잘린 절단면 안쪽에서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내며 재생되던 놈의 머리가 극광에 휩싸인 나이아의 주먹에 맞아 흔적도 없이 분쇄됐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의 몸이 공중에서 급격하게 선회해 다시 놈의 등짝을 향해 포탄처럼 내리꽂힌다. 검은 진흙이 사방으로 튀며 놈의 가슴팍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렸다.

‘재생이 점점 느려지고 있군.’

잠재된 모든 MP를 끌어내 쉴 새 없이 마법을 펼치면서도, 한 편으로 프레이는 교만의 상태를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 성검에 당한 머리를 뜯어내 재생하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 재생 속도는 약 80% 정도.

놈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거나 자신들을 얕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현상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죽일 수 없는 존재라. 하여간 과장도 심하지.’

과거 탐욕과 분노와의 협상 중에 들은 내용을 되새기며 프레이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때 프레이는 적잖이 우려를 품었다.

자이안의 최종 목표는 찬탈자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인데, 두 마족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건 결코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직접 싸워보니, 역시 괜한 우려였다.

‘이거 나만 괜히 겁먹은 것 같잖아.’

이날을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까지 했는데, 혼자 호들갑을 떤 것 같아서 어쩐지 빈정이 상했다. 프레이는 그 울분을 철저히 교만에게 쏟아내기로 작정했다.

밤낮의 변화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없는 죽음의 차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전투가 이어졌을까. 5미터에 달하는 대검으로 변한 스펙트럼을 휘둘러 교만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낸 자이안은 문득 든 위화감에 흠칫 놀랐다.

조금 전 떨어져 나간 손가락의 절단면이 섬뜩하리만치 잠잠했다. 원래는 절단 즉시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의 징조가 나타나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거지?’

지금까지 중 처음 겪는 상황에 자이안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무게추가 기울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볼 것인가. 적이 약해졌다고 판단해 더욱 몰아칠 것인가.

‘이건, 기회야.’

무게추가 후자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재생이 멈췄다!”

“힘이 빠진 거야! 쓰러뜨리려면 지금뿐이야!”

연달아 들린 프레이와 나이아의 외침이 그 판단에 더욱 힘을 실었다. 공중에 만들어진 발판에 곧게 서서, 자이안은 심호흠을 하며 스펙트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지금이라면.’

세게 움켜쥔 손잡이를 시작으로 스펙트럼의 곳곳에서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빛의 띠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이윽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해진 칼날이 태양처럼 환하게 빛났다.

‘가라. 가서…….’

자이안이 빛에 휩싸인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완전히 끝내버려.’

뻗어나간 빛의 파도가 교만의 목을 베었다.

“…….”

아주 짧은 순간,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머리가 힘없이 떨어져 공동 안쪽으로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몸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찢어진 대지 위에 검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거체가 몸을 뉘었다. 그 위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프레이의 폭격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나이아 역시 그 틈으로 파고들어 놈의 몸을 흔적도 없이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지금까지처럼 몸이 재생될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잘했어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자이안은 곁에서 들린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크룩스가 바로 곁에 와 있었다. 거대해진 몸을 검은 슈트로 감싼 채 머리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완전히 끝난 것 같네요.”

“…….”

자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교만을, 정확히는 교만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이아와 프레이도 공격을 멈춘 상태였다.

검은 진흙은 더 이상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리듯 퍼져 공동 안쪽으로 떨어지거나, 갈기갈기 찢어진 땅에 스며들었다.

“저희가…… 이긴 건가요?”

“그래.”

공중에서 날아온 프레이가 자이안의 앞에 착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안은 멍하니 프레이를 바라보다가, 돌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네가 이긴…….”

프레이가 쓰게 웃으며 자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아아…… 느으으은…….

그 순간 공동 안쪽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아아아느으으은…… 대체에에에…… 무어어냐아아.

모두의 움직임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그 중심에서, 자이안은 힘없이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코 두 발로 서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땅을 뒤덮은 검은 진흙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일시에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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