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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9) (200/210)


200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9)
2023.04.21.


프레이는 핏빛 하늘 위를 빠른 속도로 날고 있었다.

“좋아. 이제 마지막 한 명이로군.”

지면을 세세히 훑어보던 프레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뿔뿔이 흩어진 일행들을 찾는 작업이 마침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소아레스!”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소아레스에게 프레이가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조용히 고개를 든 소아레스는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거 나한테는 일일이 인사할 필요 없대도 매번 그러네.”

“저도 제 천성이 이런 것이라고 매번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후후.”

매번 나누게 되는 대화를 이번에도 나누고, 프레이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소아레스가 다소곳이 안기자 프레이는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른 분들은 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네가 마지막이다.”

“다행이군요. 자이안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자기가 나이아하고 같이 교만을 상대할 테니 일행들이나 빨리 모아달라고는 하던데.”

교만의 술수로 뿔뿔이 흩어졌다고는 하지만 결국 마계 어딘가일 뿐. 게다가 프레이는 일전보다 훨씬 강해진 MP 지배력으로 문제없이 자이안과 통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이미 한번 지배력에서 밀려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으니, 미리 확실하게 준비를 한 것이다.

덕분에 프레이는 아바타가 아니라 실제 자기 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감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 준비를 한 건지는 자이안에게 비밀이었지만.

“아저씨! 여기예요!”

다른 일행들이 모인 장소에 가까워지자 유민이 크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소아레스와 한 차례 가볍게 눈빛을 나눈 뒤, 프레이는 천천히 하강해 그들 근처에 내려섰다.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 안 질러도 다 보인다.”

“지금 태평하게 굴 때예요?! 얼른 자이안을 도와주러 가야죠.”

“지금 걔 옆에 붙어있는 게 누군지 까먹었냐? 우리가 괜히 호들갑 안 떨어도 별 문제없을 거다.”

프레이의 담담한 말에 유민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20대 후반, 즉 최전성기의 나이아가 자이안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으…… 그래도요! 저희가 가면 훨씬 더 도움이 되겠죠.”

“그거야 뭐.”

프레이라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마계 곳곳을 날아다니며 이미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한 상태. 이대로 자이안을 향해 직진하면 금방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뛸 사람은 뛰고, 날 사람은 날고. 젖 먹던 힘까지 죄다 쥐어짜서 달리…….”

쿠르르릉―!

그 순간 갑자기 땅속 깊은 곳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이어 지면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급히 날아오르며 근처에 있던 크룩스와 소아레스를 붙잡았다. 아르스 역시 유리아와 유민을 붙잡고 백팩을 전개해 날아올랐다.

“이번엔 또 지진이야? 진짜 거지 같은 차원…….”

인상을 팍 쓰며 투덜거리던 프레이가 눈앞의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검은 땅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고 있었다.

갈라진 땅 틈새로 무저갱의 어둠이 얼핏 모습을 보이고,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안쪽으로 굴러떨어졌다.

“이게 대체 뭔…….”

단순한 지진이 아니다. 마치 세계 전체가 조각나 부서지는 것 같았다.

망연히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레이는 불현듯 머리를 스친 한 가지 추측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이안과 나이아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누나하고 자이안이 저희 못 기다리고 먼저 시작했나 본데요.”

크룩스가 하하, 하고 태평하게 웃었다. 그 직후, 멀리서 원망에 찬 섬뜩한 목소리가 불렀다. 일행들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 목소리는 자이안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와오…….”

유리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검은 손이 불쑥 솟아났다. 그리고 조각난 대지를 붙잡아 으스러뜨리며 남은 몸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 광경이 까마득하게 떨어진 일행들에게도 선명히 보였다. 그만큼이나 거대한 존재였다.

“서둘러야겠다.”

프레이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것은 시커먼 진흙 덩어리였다.

-어째서어어어어―

아니, 손가락이었다. 가까이서 봐서는 도저히 그게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손가락.

공동 안쪽에서 솟아난 손가락이 조각난 대지 일부를 붙잡았다. 그대로 과자 조각을 부수듯 가볍게 땅을 으스러뜨리며, 공동 아래쪽에 남아있는 몸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아하하. 더럽게 크네.”

허리에 손을 짚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이아가 말했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는 것 같은 태연한 태도에 자이안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다.

-아아알아주지이이―

검은 진흙으로 뒤덮인 언덕 일부가 공동에서 솟아났다. 아마도 정수리일 것이다. 어쩌면 다른 부위일지도 모르지만.

-아아않느으은 거어엇이냐아아아아―!

“피해!”

나이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자이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정도 높이로는 지면을 휩쓰는 놈의 손가락을 피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았다.

발아래로 디딤판을 만들어 여러 번 더 도약한 뒤에야 간신히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너무 커.’

몸집이 크다는 건 그 자체로 커다란 우위다. MP라는 힘을 이용해 한계를 초월해 강해질 수 있는 각성자에게는 반드시 들어맞는 법칙은 아니지만, 이 정도 크기의 상대를 앞두고서는 각성자 간에 우열 따위는 사소한 오차에 불과하리라.

“보자. 손가락 하나 길이만 각각 300m 정도 될 것 같네. 팔 길이는 대충 3~4㎞ 정도? 팔이 3~4㎞면 총 신장은 넉넉잡아서 10㎞ 정도 되겠고.”

적의 규모를 분석하는 나이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이안은 그게 과연 얼마나 거대한 크기일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마 인간이 먼지 한 톨처럼 보이는 크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하게 상상할 뿐.

“그나마 다행인 건, 좀 멍청해진 것 같다는 점?”

-대애애답해애애라아아아― 자아아아이안 아아알코오오오오스―!

교만, 아니 교만이라고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검은 진흙의 거인은 고장 난 것처럼 자이안의 이름을 부르짖을 뿐이었다.

조금 전의 공격도, 자이안을 노린 의도적인 공격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손가락을 움직이려 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대애애답하지이이 아아않겠다아아는 것이냐아아아―!

마침내 공동 안쪽에서 거대한 머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입도 코도 귀도 없는, 머리카락도 한 올 나지 않은 시커먼 민둥산 같은 머리. 뻥 뚫린 두 개의 눈구멍 안쪽에서는 시커먼 진흙이 꾸물럭거리며 마치 눈물처럼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으으렇다아아며어언―

검은 진흙을 눈물처럼 쏟아내는 두 눈이 어느 순간 똑바로 자이안에게 향했다. 거인의 움직임이 뚝, 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고, 다음 순간.

-이대로 너를 죽이고 고향을 찾아가겠다.

교만이 주먹을 휘둘렀다.

“……!”

거대한 벽, 아니, 성, 아니, 산맥이 통째로 가까워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자이안은 필사적으로 옆으로 이동해 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보다 주먹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 도망치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칠 수 없다!

교만의 말대로였다. 크기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회피라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했다.

자이안은 이를 악물고 스펙트럼을 곧게 들었다. 최대한 몸을 많이 보호할 수 있도록,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가장 거대한 무기로 변형시켰다. 거대한 산맥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그 순간 나이아의 등이 자이안의 눈앞에 나타났다. 찬란한 빛이 넓게 펼쳐지며 둘을 보호하듯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교만의 주먹이 그 위로 내리꽂혔다.

-그런 보잘것없는 초라한 빛으로 나를 막아설 수는…… 음?!

가소롭다는 듯 소리치던 교만이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주먹과 맞부딪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깜빡거리던 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꺼지기는커녕 점점 더 밝고 강해졌다.

“누가 보잘것없고 초라한 빛이라고?”

오로라로 전신을 감싼 나이아가 교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제야 교만은 여태까지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나이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계의 주인이며 마계 자체이므로 마계 내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전지전능에 가까운 교만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죽음으로부터 빚어진 생명이었고, 의지만으로 확립된 영혼이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데 멀쩡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

-너는…… 너는 대체 뭐냐……!

“나? 내가 뭐냐면…….”

도발하듯 웃으며 나이아가 입을 열었다.

“자이안!”

그녀의 등 뒤에서 자이안이 튀어나왔다. 두 손으로 거머쥔 스펙트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백색으로 빛났다.

자이안이 성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빛의 파도가 핏빛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처음에는 교만과 비교해 보잘것없는 크기에 불과했던 그 빛은, 그러나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졌다.

이윽고 교만의 한쪽 팔만으로는 다 가릴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해진 빛이 검은 진흙으로 뒤덮인 머리를 불태우려는 것처럼 휘감았다.

-으오오오오오……!

두 팔과 머리, 상반신 일부가 공동 밖으로 드러난 교만이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를 때마다 조각난 땅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무저갱 속으로 가라앉고 검은 진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이안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펙트럼을 고쳐 쥐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힘을 담은 성검이었지만, 놈을 쓰러뜨릴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인간과 닮은 모습이었던 교만조차도 성검의 힘을 거스르며 자이안을 죽일 뻔했었으니까.

-고작 이런 걸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교만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가 싶더니, 성검의 빛으로 불타고 있는 얼굴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뿌리채 뽑힌 머리가 그대로 공동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 뜯어져 나간 절단면에서 진흙이 부글거리더니, 조금 전과 똑같은 머리가 불쑥 솟아났다.

‘역시…….’

예상 그대로의 광경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내심 입맛이 썼다. 성검은 일반적으로는 마족, 마물에 대해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공격이다.

‘성검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검?’

마물에게만 강한 위력을 보이는 성검에서 한층 더 나아가, 마검은 자이안이 원하는 것만을 택해 벨 수 있는 검이다.

처음 마검을 사용해 크룩스에게 휘둘렀을 때, 자이안은 그의 몸에는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않고 오직 ‘수라’만을 베었다. 크룩스는 이를 디스펠 효과라고 오해했지만, 실제로는 자이안이 ‘수라’만을 베고 싶다고 생각하며 휘둘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제는…….’

자이안은 두 팔을 휘두르며 날뛰는 교만을 암담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어떻게 베어야 저걸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망토를 통해 유리아의 마안을 빌려봤지만 약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알기 쉬운 약점 따위는 없다는 뜻이리라.

‘죽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할지도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탐욕과 분노에게 찬탈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그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가. 찬탈자는 죽일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거지만.’

자이안은 괜히 부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수렁에 빠뜨리는 대신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 커다란 몸을 계속해서 잘라내고 떨어뜨리다 보면 언젠가는 작아지겠지. 그렇게 되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스펙트럼을 최대한 거대한 무기로 변형시켰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잘라내려면 그만큼 큰 무기가 필요하겠지.

그리고 자이안이 교만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하늘 저편에서 날아온 백염의 구슬이 놈의 관자놀이를 후려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내가 오면서 구경을 좀 했는데, 1라운드는 우리 쪽 판정패인 거 같더라고.”

머리 위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자이안이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2라운드는 TKO승을 한번 노려보자고.”

등 뒤로 수백 개에 이르는 마법진을 동시에 전개하며 프레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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