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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8) (199/210)


199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8)
2023.04.20.


“그래. 자이안 알코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으로 교만이 지면에 발을 디뎠다. 그러자 주위의 마물들이 그 자리에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수백, 수천만, 어쩌면 수억을 넘을지도 모르는 마물들이 일시에 부복하는 압도적인 광경에 자이안은 숨을 삼켰다.

“……함정일 줄 알았는데.”

자이안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말했다. 속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사실에 잠시 동요했으나, 정작 교만은 자칫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 말을 듣고서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함정이라니?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구나.”

“내가 네 궁금증을 해결할 의무는 없지.”

“그래. 그 말이 맞지. 너는 나의 대적자. 네게 나는 쓰러뜨려야 할 적에 불과하니.”

최후미에 있던 유민과 아르스를 포함해 모든 일행들이 한곳에 모였다. 저마다 적의로 가득한 시선이었다.

교만은 느긋하게 그들을 둘러보았다. 나이아를 제외한 모두와 한 번씩 시선을 맞춘 뒤, 그는 빙긋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교만이 작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자이안과 나이아를 제외한 일행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자이안이 섬전 같이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정확히 목을 노리는 날카로운 공격. 그러나 교만은 갑주로 감싸인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막아냈다.

“일행들을……!”

“너무 흥분하지 말거라.”

“일행들을 어떻게 한 거야!”

“너와의 대화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이안은 이를 악물고 교만을 노려보았다. 그때 나이아가 자이안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떤 자이안이 격앙된 감정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일전에 교만과의 싸움에서 프레이의 아바타가 죽었을 때 느낀 강렬한 상실감. 지금은 그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죽이지는 않았다는 교만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드디어 내게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교만이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가족을 바라보는 것 같은 친근함이 깃든 눈빛. 마주 선 자이안은 어디까지나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그래서 적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스펙트럼을 휘두를 것이다.

“내가 너를 해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해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와는 대조적으로, 교만의 말은 은근한 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스스로를 찬탈자라 칭하며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하던 반쪽짜리 초월자. 그 존재를 완전히 녹여 없애지는 못했지만, 힘을 다루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네가 발을 디딘 그 땅은 나의 세계이며, 곧 나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 땅에 발을 디딘 너와 네 동료를 해하는 건…… 그래, 손을 움직여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과 다름없는 아주 손쉬운 행위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으나, 자이안은 속으로 작게 신음했다. 나태가 예상한 대로, 교만은 찬탈자를 흡수해 그 힘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네가 온전히, 그 몸과 정신 모두 완전한 상태로 나와 마주하게 되기를 바랐지. 왜인지 아느냐?”

“…….”

자이안은 침묵했다.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얼핏 들으면 자애로운 듯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한없이 얕잡아 보는 말투였다.

“너와 내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움찔, 자이안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알고 있느냐? 나는 내 동족들이 되살아나,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 그랬던 것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를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불사할 것이며,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수 있지. 단 하나의 대의를 위해, 그보다 덜한 다른 모든 것을 잘라낼 수 있는 각오. 한없이 올곧은 그 신념. 그것이 너와 나의 공통점이다.”

“…….”

자이안은 또다시 침묵했다.

“마치 납득할 수 없다는 것 같은 표정이구나. 그러나 너 역시 사실은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네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증명이 아니냐? 떠올려 보거라. 이곳에 서기 위해,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잘라냈는지.”

“…….”

자이안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나와 닮았다는 사실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러나 혼자서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한다 한들 현실이 네게서 멀어지지는 않는다. 아니면 이리 주장할 셈이냐? 너와 함께 이곳으로 온 네 동료들은, 조금의 강요도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너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너는 아무것도 희생한 게 없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것이야말로 교만이다, 자이안 알코스.”

자이안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 대신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나이아의 손바닥의 감각을 조용히 마음에 담았다.

“너는 착각을 하고 있다. 나와 닮았다는 것.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지. 평범한 이들은 결코 가지지 못하는 각오, 그리고 신념. 희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숭고한 의지. 문명의 발전, 진화의 계기는 바로 그런 이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이안 알코스, 너는 내게 인정을 받고, 찬사를 들을 권리가 있다.”

“…….”

“자이안 알코스. 나와 함께하며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할 말은.”

마침내 자이안이 침묵을 깨트렸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들었다. 그리고 칼끝을 조용히 교만에게로 겨눴다. 그 모습을 보며 교만은 못내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어찌하여 부정하는지 모르겠구나. 아니면, 내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그것 또한 교만이다.”

“네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어. 그리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어.”

“그렇다면…….”

교만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자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교만. 네 동족들이 되살아나면, 그래서 우리 차원으로 넘어와 살게 되면 본래 살아가던 우리들은 어떻게 되지?”

“…….”

“얼버무리지 말고,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봐.”

“죽게 된다.”

교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일을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 고향은 너무나도 많은 생명이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차원이 되었다. 찬탈자의 힘으로부터 비롯되어 되살아난 나의 동족들은 그 넘치는 생명의 힘을 견디지 못할 테지. 때문에 나는 우리 고향을 이곳과 똑같은 환경으로 뒤바꿀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고향에는 나와 동족들을 제외한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게 될 테지.”

“그걸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그 희생을 ‘잘못’이라고 폄하하는 것 역시 교만이다, 자이안 알코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자이안의 표정이 삐뚤어졌다.

차라리 다른 방식의 대답이었다면. 잘못임을 알고 있지만, 동족들의 생존을 위해 죄를 짊어지겠다는 태도였다면. 그렇다면 타협이나 대화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아냐.’

자이안은 눈앞의 마족의 이름이 어째서 ‘교만’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교만. 너는 나를 대적자라고 불렀지.”

“그래. 나와 닮은, 나와 동등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나를 대적하기에 적합한 존재.”

“내가 너의 대적자인 이상, 네게 도움을 줄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휘둘렀다. 교만은 옅은 한숨을 뱉으며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팔이, 그의 온몸이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붙잡힌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이안, 지금이야!”

교만의 등 뒤에서 그의 몸을 붙잡은 나이아가 외쳤다.

조금 전, 교만의 술수에 의해 자이안과 나이아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사라져버린 직후 나이아가 한 말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 마족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마 내가 본래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그녀의 말대로, 교만은 자이안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나이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나이아가 자이안의 곁에 서서 손을 흔들어도, 교만의 코앞까지 다가가 이리저리 기웃거려도.

자이안이 대화 내내 침묵을 고수한 것은, 그런 그녀와 작전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슬쩍 뒤로 가서 붙잡고 있는 동안 네가 목을 베면 되겠다.”」

그리고 지금.

자이안은 망설임 없이 스펙트럼을 휘둘러 교만의 목을 베었다.

교만의 목이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다가 낭떠러지 너머 공동 안쪽으로 떨어졌다. 자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숨죽이며 교만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마찬가지로 잠시 사태를 지켜보던 나이아가 회색 피를 쏟아내기 시작한 교만의 시체를 공동으로 휙 내던졌다.

“끝!”

나이아가 손을 탁탁 털며 가볍게 말했다. 자이안은 잔뜩 굳은 자세인 채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멍청한 표정이야? 교만은 죽었어.”

“아니, 그게…….”

자이안이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교만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죽은 건 죽은 건데?”

자이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반년 전 저택 부지에서의 싸움의 양상을 얘기했다.

그때 자이안은 가까스로 교만의 목을 베었지만, 교만은 그 자리에서 검은 진흙을 쏟아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났다.

“게다가 여긴 마계잖아요. 그때와 달리, 지금은 놈의 힘이 제한되지 않아요. 이걸로 끝날 리가…….”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갑자기 땅속 깊은 곳에서 커다란 굉음과 울리고, 이내 땅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이안은 넘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낮췄고, 나이아는 훌쩍 뛰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고도를 높이며 주변을 파악했다.

땅이 찢어지고 있었다. 단순히 지반이 무너지며 지표면이 갈라지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계 전체가 뒤흔들리며 조각나는 것이다.

조각조각으로 찢어진 땅 틈새로 무저갱을 연상시키는 깊은 어둠이 드러났다. 부복한 채 꼼짝도 않고 있던 마물들이 깊은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오우…….”

굳은 얼굴로 탄성을 뱉으며, 나이아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거 자이안 네가 잘못한 거야.”

“예?”

“너 소설 같은 거 안 읽어? 원래 악당 두목을 다 잡아놓고 괜히 불길한 소리를 하면 더 세져서 되살아난다고.”

“…….”

자이안은 어이가 없어져서 멍청한 표정으로 나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 의도를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한 농담으로 긴장을 덜어내려는 것이다.

“그럼 다행이네요.”

“뭐?”

“그런 소설에선 악당이 얼마나 강해져서 돌아오든 결국 더 강해진 주인공 앞에 쓰러지게 되잖아요.”

“…….”

이번에는 나이아가 자이안을 보며 멍청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 말이 맞지.”

나이아가 씩 웃으며 붕괴의 근원, 거대한 공동을 바라보았다. 자이안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스펙트럼을 들었다.

-자이아아안 알코오오오스――!

공동 깊은 곳에서, 원망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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