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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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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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7)
2023.04.19.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일 얘기를 해보자고.”
야영지를 정리하는 일행들을 보며 프레이가 말을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맥 빠지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우리는 교만이고 찬탈자고 마계 어디쯤에 박혀있는지 전혀 몰라. 이대로는 기약도 없이 마계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할 판이다.”
“나, 나나, 나나나나!”
나이아가 손을 번쩍 들고는 장난스럽게 흔들어댔다. 프레이는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턱짓으로 나이아를 가리켰다.
“그래, 나이아 학생. 한 번 발표해보세요. 틀리면 뒤질 줄 알고.”
“찬탈자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알아. 한 번 싸워봤잖아.”
프레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 사실 자체를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크룩스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형답지 않은 실수네요.”
“아니, 거 좀 까먹을 수도 있지.”
“근데 사실 나도 문제가 하나 있어.”
나이아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 우리 위치가 마계 어디쯤인지 모르겠어.”
“그럼 처음하고 달라진 게 없구만.”
프레이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뭔가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되련만, 일면이 굴곡 하나 없는 평지였다. 산도 계곡도, 바다도 강도 없이 그저 끝없이 퍼진 검은 땅.
“일단…… 날아서 좀 봐야겠다. 나이아, 너도 같이 와라. 그래도 나보단 네가 마계의 지리를 더 잘 알 거 아니냐.”
잠시 뒤, 프레이와 나이아가 비행 마법을 사용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빠르게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보며 자이안은 소리 없이 작게 감탄했다.
비행 마법은, 그러니까 단순 부유가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비행 마법은 터무니없이 어렵고 복잡한 마법이다.
자이안도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공중에 발판을 만들어 그걸 밟고 도약하는 식으로 편법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 나이아는 프레이의 속도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비행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겠지.’
몇 분 뒤, 프레이와 나이아가 하늘 높은 곳에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자이안. 잠깐 펜던트 좀 보여줄래?”
나이아가 굳은 표정으로 자이안에게 다가갔다. 자이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펜던트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손바닥에 놓인 펜던트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이아가 이내 빠른 속도로 펜던트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자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이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작 방식이었다.
뒤이어 발생한 펜던트 내부의 MP 흐름 역시 도저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자.”
나이아가 다시 펜던트를 내밀었다. 자이안은 얼떨떨해하며 펜던트를 목에 걸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달라진 게 없지만, 2년 넘게 펜던트의 주인으로 지낸 자이안은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안해하지 마. 너한테 해가 될 일을 한 건 아냐.”
자이안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애초에 그런 의심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다만, 펜던트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지 순수하게 궁금하기는 했다.
“비이미일.”
나이아가 히죽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린아이 같은 그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힌 자이안도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자, 모두 주목.”
그러는 사이 프레이가 다른 일행들에게 상황을 전했다.
“곧 마물이 들이닥칠 거다. 각자 미리 무기 꺼내고,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자고.”
“어느 쪽에서 오고 있는데요?”
유리아의 물음에 프레이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대답이라고 하기 뭐한 그 동작에 유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부야.”
자이안의 펜던트를 손본 나이아가 뒤이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전부라뇨?”
“전부라고.”
나이아가 손가락을 펴고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전후좌우. 그리고 대각선 네 방향까지, 모든 방위를.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굳었다.
“수는…… 글쎄다. 잘 모르겠다. 얼핏 봐서는 못 세겠더라고.”
프레이가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단 만이나 십만, 뭐 이런 단위는 확실히 아니다.”
“징그럽게 많네요.”
“그래. 징그럽게 많지.”
크룩스의 말을 받은 프레이가 곧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래서, 무서운 사람?”
대답은 없었다. 그저 각자 무기를 꺼내고 조용히 전투를 준비했다.
“많기야 한데, 솔직히 그 정도는 예상 범주죠.”
“그렇지이. 다른 곳도 아니고 마계, 적진 한복판이니까.”
“다들 다치지 않도록 제가 뒤에서 확실히 지켜줄게요.”
각성자들이 자신감이 깃든 목소리로 한마디씩 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의 몸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거대해졌다.
자이안이 스펙트럼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 프레이가 양손에 낀 장갑을 세게 조였다.
“어디 한 번 날뛰어보실까.”
프레이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나이아가 마지막으로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집주인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개판을 내는 거야!”
* * *
검은 땅을 뒤덮은 마물, 마물, 그리고 마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마물들이 마치 하나의 생물체처럼 유기적으로 꿈틀거리며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몰려오는 것 같다.
“비켜라! 비켜어어!”
오색찬란한 극광이 그 움직임을 거스르듯 정면으로 부딪친다.
버티지 못하고 해일이 좌우로 갈라진다. 물살을 가르며 날렵하게 헤엄치듯, 찬란한 빛이 좌우로 찢어진 마물의 해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른다.
나이아가 하고 있는 일은 단순했다. 온몸에 극광을 두르고, 그저 한 방향으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운 나쁘게 그녀와 부딪친 마물은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흔적도 없이 불타거나, 투포환처럼 날아갔다가 피떡이 된 채 지면에 처박혔다.
“얼마든지 와 봐라! 네놈들 시체를 모조리 불태워서 퇴비로 만들어주마!”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박살내며 나이아가 길을 만들면, 프레이가 공중에서 바짝 뒤쫓는다.
그의 등 뒤로 마법진의 빛이 셀 수도 없이 연달아 반짝이고, 그때마다 땅을 뒤덮은 마물들 일부분에 뻥 뚫린 듯 휑한 구멍이 만들어진다.
그 위로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먹구름 사이로 비늘로 덮인 몸이 번개의 빛을 반사해 청백색으로 번뜩인다.
이어 먹구름으로부터 쏟아진 낙뢰가 기껏 만들어진 길을 다시 틀어막으려는 마물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약한 마물은 그 자리에서 온몸이 불타 절명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한 마물들 역시 그대로 마비되어 석상처럼 굳어버린다.
셋이서 길을 만들어내면,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넓히고 정비하는 것은 남은 일행들의 몫이었다.
유리아와 소아레스가 케이의 번개로 마비된 마물들을 암습하고, 자이안과 크룩스가 둘의 안전을 호위한다. 마지막으로 아르스와 유민은 후미에서 백마법과 아티팩트로 적을 약화시키고 아군을 축복하는 등 보조에 주력했다.
-좀 이상한데요, 이거.
통신 마법을 통해 크룩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마물들이 적극적이지가 않은 것 같아요.
-그러게. 꼭 우릴 죽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프레이가 크룩스의 말에 동의했다. 마물의 본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마물의 본능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우릴 어딘가로 유도하려는 것 같아.
아르스가 통신 마법에 끼어들었다. 마물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며 계속해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가, 프레이와 크룩스의 말을 들은 순간 명확해졌다.
-우리를 유도한다고? 함정인가?
만약 함정이라면, 누구의 의도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찬탈자, 혹은 교만이 꾸민 것이리라.
-유도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억지로 뚫고 가려고 하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저항이 거세지겠죠.
-어차피 저희는 지금 교만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차라리 잘된 일 아닐까요?
유민의 말에 다른 각성자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함정인 걸 알아차렸다고 해서 할 일이 바뀌는 건 아니다. 목적은 최대한 빠르게 교만, 혹은 찬탈자를 쓰러뜨리는 거니까.
-자이안의 의견도 들어보자고. 리더는 그 녀석이니까.
프레이가 각성자들이 추측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통신 마법으로 자이안에게 전했다. 자이안은 잠시 속도를 늦추며 주변을 돌아보고, 이내 가장 선두에 선 나이아에게 시선을 향했다.
-나이아와 한 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제 위치를 이탈한 자이안이 나이아에게 바짝 다가갔다. 짧은 대화 뒤, 자이안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며 통신 마법으로 대답했다.
-교만의 의도에 따르도록 하죠.
모두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나이아는 지금까지보다도 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오로라가 길게 꼬리를 그리며, 마치 혜성처럼 검은 땅을 가로질렀다. 일행들도 뒤처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그 뒤를 쫓았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마물들의 저항이 거세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약해졌다. 숫자도 밀도도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급하게 달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이아는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빨라졌다.
-이 근처야. 확실해.
나이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쭉 가면 찬탈자가 있던 장소야.
그 말에 다른 일행들도 각오를 다잡았다. 곧 적의 본거지에 가까워진다.
이제 마물들은 그들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마치 길을 만들어주듯 좌우로 갈라진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정신없이 달리던 자이안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멈춰섰다.
땅 한복판에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공동이었다. 직경이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공동 안쪽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 기묘한 양식의 거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동의 가장자리로부터 뻗어 나온 두꺼운 사슬들에 연결되어 공동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것이다.
“저기 봐, 자이안.”
공동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 앞에 먼저 도착한 나이아가 거성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거성의 위쪽, 작은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향해. 그 모습을 본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긴 숨을 내뱉었다.
작은 점처럼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자이안은 확신했다. 조금 전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거라, 자이안 알코스.”
작은 점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교만.”
스펙트럼을 들어 올리며 자이안이 그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