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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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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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6)
2023.04.18.
“아, 뭔데 갑자기. 징그럽게 이러지 좀 마.”
픽 웃으며 프레이를 마주 끌어안은 나이아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프레이가 확 고개를 들고 인상을 썼다.
“뭐? 넌 이 자식아, 하나뿐인 오빠가 징그럽냐?”
“아니. 장난친 거야.”
“암, 당연히 그래야지.”
“징그럽진 않고 부끄러워.”
“…….”
프레이가 빈정 상한 표정으로 나이아에게서 떨어졌다.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하는 말은 똑같지만 표정은 조금 전과 딴판이었다. 나이아는 밝게 웃으며 프레이의 어깨를 퍽퍽 쳤다.
“아하하하. 오빠 삐졌어?”
“안 삐졌다. 그냥 내 동생이란 게 원래 이런 꼴통이었지 하고 회한을 곱씹고 있었을 뿐이다.”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장난 좀 쳤어. 오빠 하나도 안 징그럽고 하나도 안 부끄러워. 자, 얼른 다시 안아줘.”
“막차 떠났다. 10분만 일찍 오지 그랬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이안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엄청나게 친해 보여. 남매라기보다는 꼭 오랜 친구처럼.’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는 이런 성격이었구나.’
그가 알던 나이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자이안의 기억 속 나이아는 나긋하고 상냥하며 때때로 엄한, 그런 느낌의 어머니였다.
아마 기억상실과 펜던트 부작용의 영향으로 본래 성격에 비해 다소 얌전해졌던 거겠지.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자이안의 시선을 눈치챈 나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이안은 움찔 놀라며 급히 시선을 피했다. 프레이가 대신 대답했다.
“어. 너 얼굴에 김 묻었다.”
“뭐? 갑자기 웬 김…….”
“못생김.”
섬전 같은 보디 블로가 프레이의 옆구리에 박혔다.
“끄헤에에엑……!”
“오빠는 무슨, 아직도 애야? 그런 재미없는 농담이나 하고.”
“농담 좀 들었다고 진심으로 오빠를 패는 네가 훨씬 더 애야!”
버럭 소리치는 프레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이아가 자이안에게 다가갔다.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이래서는 내가 어머니를 꺼리는 것 같잖아.’
그렇게 생각한 직후, 자이안은 눈을 크게 떴다.
‘꺼리고…… 있는 건가? 어머니를?’
나이아가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에 멈춰 섰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이안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흐음.”
턱을 매만지며 자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본 나이아가 척,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모르는 내 아들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일단 악수나 한 번 할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표시로.”
“…….”
자이안이 주섬주섬 손을 내밀자, 나이아는 강한 악력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겉보기에는 여리고 가느다란, 그러나 직접 만져보면 바윗덩이를 연상시키는 단단하고 각진 손.
“저…….”
단단히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자이안이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안아봐도 괜찮을까요?”
“……응?”
자신과 여유가 넘치던 나이아의 얼굴에 곤혹이 어렸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의식중에 말을 뱉은 자이안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작게 숨을 삼켰다.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는 어머니를 꺼리는 게 아니라…….’
너무 그리워서, 너무 반가워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피하려 했던 것이다.
지금 눈앞에 마주 선 이는 분명 나이아 알코스이지만, 엄밀히는 그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니까. 둘을 동일시해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면 폐를 끼치게 되니까.
“하하. 죄송해요. 제가 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네요. 정신이 없어서…….”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자, 어느 정도 자제력이 돌아왔다.
자이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설프게 얼버무리는 그 말을 들으며, 나이아는 정작 아무 대답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좋아.”
갑자기 나이아가 가볍게 말하며 두 팔을 펼쳤다.
“네?”
“안아봐도 되냐고 했잖아? 그래도 돼. 자.”
얼른 안아보라는 듯 나이아가 가볍게 턱짓을 했다. 자이안은 바람이 이루어졌는데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리기만 했다.
“소심한 아이구나. 그럴 수도 있지.”
“소심…….”
“자.”
나이아가 거리낌 없이 자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두 팔로 그를 크게 끌어안았다.
“기분이 어때?”
“어…….”
어색하게 눈을 굴리던 자이안이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나이아를 마주 안았다.
“‘내’가…… 네 엄마가 어떤 삶을 살다가 죽게 됐는지는 유리아에게 들었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하게 해줘. 잘 견디고, 잘 자라줬어. 훌륭해, 자이안.”
기억과는 다른 가볍고 활기찬 말투. 그러나 여전히, 그 목소리는 나이아의 것이었다.
품안에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을 더욱 선명히 느끼고자, 자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나이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어머니…….”
짙은 그리움을 담아, 그저 조용히 한마디를 뱉었다.
“아하하. 그렇게 불리니까 좀 이상한 느낌인걸.”
자이안을 안은 채 나이아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직접 배 아파가며 낳은 기억도 없고, 자이안과는 지금이 처음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음, 아니…… 나이아.”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 자이안이 나이아에게서 멀어졌다.
가슴이 허전해지는 듯한 상실감에 나이안은 앗,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애 낳아본 적도 없는데 모성애 먼저 싹트게 생겼네.
“이거 가지고 괜찮겠어? 더 원 없이 안아봐도 돼. 얼마든지 안겨줄게.”
“괜찮아요. 불편하실 텐데.”
“엄마라도 불러도 괜찮아.”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자이안은 오래된 미련 하나를 마침내 떨쳐내기라도 한 듯 후련한 표정이었다.
나이아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짙은 친애가 담겨 있었지만, 조금 전처럼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멋대로 떨리지도 않았다.
“……진짜 훌륭하게 컸네.”
나이아는 멍하니 중얼거리고는 프레이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여봐란듯이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무슨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아빠 같은 표정이네.”
“흥. 자이안의 반절은 네가 키웠을지도 모르지만, 나머지는 내가 키운 거다. 자랑 좀 할 수도 있지.”
“한평생 애인 한번 없었던 주제에 큰 소리는.”
“뭐 인마?! 너 죽은 뒤로 내가 여자 생겨서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을 줄 네가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릴 해?”
“오빠가? 나 죽고 나서 여자를 만들어? 풉.”
프레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나 막상 나이아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나이아를 떠나보낸 뒤 지금까지 여자는 고사하고 사람조차 제대로 만난 적 없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오빠. 오빠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아. 오빠 자신보다도 더. 오빠가 나 없는 20년 동안 혼자서 잘 먹고 잘살겠다고 여자를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반드시 그러리라는 법은 없잖냐.”
“아아니이. 난 다른 건 몰라도 오빠에 대해서는 안 틀릴 자신 있어. 나 없어지고 혼자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내 이름 부르면서 찡찡거리기나 했겠지. 아냐?”
“…….”
프레이는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고통을 참는 것 같은, 혹은 화를 억누르는 것 같은 표정.
“미안, 오빠. 힘들었지?”
나이아가 프레이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 마주 섰다. 얼핏 가볍게 들리는 사과. 그러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힘들었냐고? 그야…….”
프레이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지.”
나이아가 사라지고 자이안을 만나기 전까지 프레이의 삶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다. 사는 게 아니라, 죽지 못했을 뿐이었다.
“미안해, 오빠. 오빠 놔두고 혼자 떠나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 하지 마라. 그때로 돌아가면 결국 또 똑같이 행동할 거잖아.”
“역시 오빠야.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네.”
“빌어먹을.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차라리 영영 과거에 파묻혀 있지 그랬냐.”
“못다 한 일을 끝내야 하니까.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꼴통 새끼…….”
프레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거세게 후려칠 듯 날아간 주먹이 급격하게 느려지더니 나이아의 정수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이고 거둬졌다.
나이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가볍고 장난스러운, 친애가 담긴 손길은 남매 사이에 자연스럽게 정해진 화해와 용서의 표시였다.
“그러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빠만 소환된 거야? 다른 사람들은 연결이 끊겼나?”
“지금 내 방에서 펜던트로 다 지켜보고 있다.”
“뭐? 그런 건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아, 오빠 얼굴 보는 거 질렸다. 아르스 언니랑 크룩스랑 유민이 보고 싶다!”
잠시 뒤. 아르스와 크룩스, 유민이 소환되어 나이아와 인사를 나눴다.
20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을 텐데도 그들은 마치 바로 어제 헤어졌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한 명, 유민만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 사이 아르스가 새로 소환된 각성자들 수만큼 식사를 준비했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케이가 일행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케이가 모처럼 식사를 준비하는 김에 여기서 느긋하게 좀 쉬다가 움직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일행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땅 한복판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고 즐기며.
최후의 휴식 시간이 온화하게 지나간다.
* * *
교만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텅 빈 거성을 가로질러 밖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그 안에서 마물의 그림자가 은밀하게 꿈틀거렸다.
성을 나온 교만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근엄하게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땅, 그리고 그 위를 조금의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채운 마물의 무리를.
“가라.”
교만이 나직이 명했다.
“가서 대적자를 찾아, 내 앞에 데려와라.”
마물의 군세가 한 차례 크게 요동쳤다.
검은 파도가 어디랄 것도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