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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5) (196/210)


196화 죽음의 땅에서 피어나는(5)
2023.04.17.


아무래도 자신이 판단을 그르친 것 같다. 반쯤 무의식 상태로 스펙트럼을 휘두르며 자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물이 많았다. 정말 끔찍하리만치 많았다. 세계수 북쪽 산맥 너머에서 균열의 뒤처리를 하며 이보다 더 많은 수의 마물을 상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토당토않은 착각이었다.

“정신 놓고 있지 마!”

프레이가 머리 위를 날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작은 그림자가 자이안을 지나치고, 이어 불과 번개가 폭우처럼 쏟아지며 마물들을 불태웠다.

일격에 반경 수백 미터의 공간이 뻥 뚫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마물의 그림자로 다시 꽉 들어찼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네, 진짜!”

프레이가 치를 떨며 외쳤다. 질린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다. 물론 그는 이런 비슷한 경험이 적어도 두 손 두 발로 헤아릴 만큼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야 일면이 오직 마물만으로 가득 채워지는 광경이 쉬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익숙해져서도 안 될 일이고.

‘더 신중하게 움직였어야 했나.’

차라리 움직임이 더뎌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물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이동해야 했던 거 아닌가 하는 후회. 그러나 자이안은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서 마물들의 주의를 끌면 그만큼 다른 분들은 안전해지겠지.’

선택의 단점을 떠올리며 후회하기보다는, 장점을 되새기며 희망을 가져라. 단순한 진리를 떠올리며 자이안은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마물의 수도 무한하지는 않을 거야.’

마물은 찬탈자가 스스로의 육신을 떼어내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물을 죽인다는 건 놈의 힘을 미세하게나마 깎아내는 것. 본진 한복판에서 이렇게 날뛰다 보면 놈의 본체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놈을 상대할 준비는 아직 안 됐는데. 게다가 교만의 행방도 마음에 걸려.’

신스가 가져온 나태의 전언에 따르면, 교만은 찬탈자의 힘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교만의 목적은 동족들의 완전한 부활. 칠종주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가 이끌고 그 결과 찬탈자에게 잡아먹혀 멸망하고 만 모든 선주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교만은 한때 가장 강하며 가장 지혜로운 칠종주였고, 때문에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큰 발언력을 가진 대표자로 여겨졌다.

민중에게 자주 모습을 보인 것도 교만이다. 왕과 비슷한 위치라 할 수 있다.

교만은 그 위치에 큰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가졌다. 그런 성격이니, 제 손으로 동포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에 크나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리라는 게 나태의 분석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후회를 바로잡기 위해서, 찬탈자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교만이 분체가 아닌 본신으로 직접 나타났다는 건, 놈이 찬탈자를 완벽히 제압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 최악의 경우는 이미 교만이 찬탈자를 완전히 흡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나태는 그 가능성의 높고 낮음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했다. 세계수와 융합하여 초월적인 연산 능력을 가지게 된 그조차도 추론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찬탈자의 힘은 필멸자가 감히 측정할 수도 없이 거대하지만, 동포들의 목숨으로부터 비롯된 교만의 집착과 의지 또한 그에 비견될 거라고. 그 때문에 직접 보지 않고서는 뭐라 말할 수가 없다고.

‘아니면 반대로 교만이 찬탈자에게 완전히 지배당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자이안은 그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반년 전, 저택 부지에서 싸운 교만은 명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찬탈자를 떠받들거나 하는 언동 또한 전혀 하지 않았다. ‘반쪽짜리 초월자’라며 비꼬기나 했지.

‘반쪽짜리 초월자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교만이 거리낌 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찬탈자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아마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싸워야 할 건, 찬탈자의 힘을 가지게 된 교만.’

또한 동포를 되살리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집착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만약 공존이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선주 인류와 현생 인류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오랜 연산 끝에 나태가 단호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찬탈자를 완전히 흡수한 교만이 그 힘으로 동족들을 되살린다면. 그렇게 부활한 선주 인류는 근본적으로 마물과 다를 것 없는 존재다.

영혼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의 차이는 있으나, 죽음의 차원에서 태어난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마계가 생명을 거부하듯, 부활한 선주 인류 역시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계하게 생명을 거부하고 만다.

부활한 선주 인류가 자이안의 세계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멀쩡히 살고 있는 현생 인류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가 죽음에 내몰린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선주 인류만 남게 된 세계는 점차 빛을 잃고 마계와 같은 환경으로 변질되고 말리라.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동족들을 되살리고, 고향을 되찾고자 하는 심정. 이해해.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제아무리 숭고한 의지라도, 이를 위해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순간 그 가치는 땅에 떨어진다.

‘그러니까 지금은…….’

자이안이 스펙트럼을 들고 크게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마물들의 팔다리가 가차 없이 잘려 나가고 사방을 둘러싼 벽에 큰 공백이 생겼다.

재차, 자이안은 스펙트럼을 거검으로 변형시켜 세차게 휘둘렀다. 우악스러운 힘에 벽이 더 크게 벌어졌다.

‘다른 분들과 합류하는 것 먼저.’

동작을 최대한 크게 하며 적들에게서 충분히 거리를 벌린다. 성검을 사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검의 빛에는 마물을 멸하는 특수한 힘이 담겼다.

남발할 수 없다는 약점이 존재하지만, 마물의 떼를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프레이의 마법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물리적인 파괴력만 보면 비교할 수도 없이 프레이가 압승이지만.

“삼촌! 성검을 쓰겠습니다!”

“뭐? 쯧, 어쩔 수 없나. 알았다. 내가 시간을 벌어…….”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던 프레이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더니 공중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어느 한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에 곤혹이 담겼다.

“뭔가 온다.”

“예?”

“마물이 아닌 뭔가가. 아니,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데.”

프레이가 혼란스러워하며 중얼거린 직후. 하늘에서 오로라가 떨어졌다.

멀리 떨어진 마물의 무리 한복판을 보고 자이안은 숨을 삼켰다. 극채색으로 번쩍이는 그 빛은 자이안에게 있어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스펙트럼을 변형시키거나 힘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내 성검을 사용할 때마다 나타나는 바로 그 빛이었다.

“자이안! 여기 있는 거 맞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그림자가 적진을 외곽에서부터 파고들어 빠른 속도로 종횡무진 누볐다. 단검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정확히 마물 한 마리가 절명해 쓰러졌다.

비슷한 그림자가 치맛자락을 우아하게 나풀거리며 뒤이어 적진에 침투했다.

유령처럼 기척을 죽인 그림자가 적진을 가로지르고, 암습을 가하거나 적들의 공격을 서로에게 유도하며 혼란을 조장했다.

-안녕, 자이안! 잘 지냈어?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이안은 자세를 풀고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 사이로 푸른 비늘을 두른 크고 기다란 몸이 언뜻 모습을 비쳤다.

그리고.

“호오.”

자이안의 앞에, 처음 보는 여성이 나타났다.

“네가 바로 그 ‘자이안 알코스'란 말이지?"

“…….”

자이안은 대답이 없었다. 그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분명 처음 보는 여성이다.

처음 보는 여성인데, 그 모습은 자이안의 기억 속 가장 그리운 얼굴을 빼다 박은 채 빛바랜 추억을 걷잡을 수 없이 불러일으켰다.

“어, 어머ㄴ…….”

간신히 자이안이 입을 떼려는 순간, 하늘에서 프레이가 둘 사이에 툭 떨어졌다.

충격으로 굳은 자이안의 표정이 얌전해 보일 정도로,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경악, 반가움, 기쁨과 슬픔 등 온갖 감정으로 뒤섞여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이아?”

프레이가 너무나 많은 감정을 담은 나머지 오히려 침착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이아냐?”

여성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히죽 웃었다.

* * *

모두가 모이자 끝이 없을 것 같던 마물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거리낌 없이 천룡의 힘을 발휘하게 된 케이의 활약이 특히 도드라졌다.

프레이의 대마법과 별 다를 바 없는 규모의 기상 이변을 숨 쉬듯 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정작 케이 본인은 영 만족스럽지 못한 기색이었다.

-힘이 너무 제한됐어. 아무래도 내 고향 차원이 아니라 그런 것 같아.

천룡은 행성의 의사를 대행하는 존재. 당연히 그 힘은 행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광활한 우주를 건너 다른 차원에 머물고 있는 지금은 기반이 되는 행성과 아주 미약한 연결이 남아 있을 뿐. 말이 천룡이지, 엄밀히는 그냥 더 큰 힘을 쓸 수 있게 된 성룡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태다.

“덕분에 천룡의 힘에 의지가 잡아먹힐 일도 없게 됐잖아? 어떻게 보면 다행인 거지.”

-이 힘으로 자이안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

“여기 함께 와준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케이와의 얘기를 마치고, 자이안은 다른 일행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아레스가 준비한 음식을 앞에 두고 유리아와 소아레스, 프레이, 그리고 나이아를 꼭 닮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소아레스는 초연한 표정. 유리아는 자리가 어색한 듯 눈치를 살피고 있고, 프레이는 심각한 표정이다. 그리고 프레이와 마주보고 앉은 나이아를 닮은 여성은…….

‘아니, 인정하자.’

자이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분은 어머니가 맞아.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아는 어머니와는 다른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 근원과 본질은 같다.

“터무니없는 소리군.”

그녀, 젊은 나이아로부터 들은 얘기를 한참 동안이나 곱씹은 프레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뭐? 자기 일부를 떼어내서 찬탈자에게 먹여? 절대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무슨 근거로? 무슨 자신감으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자이안은 순간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과거의 나이아에게 큰 집착을 품고 있을 프레이기에 눈앞의 여성을 나이아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의적으로 곡해한다거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반면 그와 마주한 나이아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니, 잘 보면 얼핏 웃음기가 보이는 것 같다.

태연한 척하지만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둑이 무너지듯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그런 표정.

“더럽게 너다운 짓거리라고.”

프레이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이 꼴통 새끼, 거의 20년 만에 보는데 변한 게 없네.”

프레이가 웃었다.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어.”

흘러넘치듯 웃으며 나이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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